20191110(주) 주일예배 본문 막 2:14-17 제목 인간에게 필요한 것 목적 오늘 설교를 통해 1) 우리는 죄로 인한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자요, 2) 이러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어떤 것(세상, 타종교의 시도)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새롭게 할 오직 십자가의 예수임을 깨닫고 3) 예수를 따르게 하고, 4)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레위 마태의 따름을 본받게 한다. 1712년 6월 28일 스위스 제네바 공화국에서 한 남자 아이가 태어납니다. 이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고, 자기의 철학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그 시대와 그 이후의 많은 지식인과 혁명가들이 그의 사상을 환호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사상은 이렇게 요약 됩니다. “자연은 인간을 선량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회가 인간을 사악함과 노예와 불행으로 몰아넣었다”(위키피디아 인용)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자연으로 돌아가라 외치며 고상한 삶을 추구했던, 그러나 이 여자 저 여자에게로 떠돌아다니다 한 하녀와 살았고, 그녀와 낳은 5명의 자녀를 고아원 계단에 갔다버린 사람, 바로 장자크 루소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인간은 신의 작품이 아니라 자연의 산물입니다. 신은 없습니다. 자연의 산물인 사람은 본래 선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세상은 불공평하고 고통이 넘치는가? 그는 사회가 잘 못 되어 본래의 선함을 잃게 만들었기 때문이라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국가란 본래부터 선한 개개인의 선한 의지가 모여서 이루어진 선한 절대적인 존재로써, 국가가 사회와 인간을 개조하고 해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선일 수밖에 없는 국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나타날 경우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그는 각 개인은 “자유하게 끔 강요되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그리스도인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p266) 즉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는데 반대하는 자들을 강요해서 따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1793년 프랑스 혁명 후의 공포시대를 이끈 로베스피에로가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합니다. 즉 “강요”라는 말을, 새로운 질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유죄판결을 내리고 처형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리곤 그해 30만 명의 귀족, 사제, 정치적 반대자들을 투옥시켰고, 17,000명을 죽입니다.(그리스도인,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찰슨 콜슨) 국가에 의한 이 강요의 합법화가 로베스피에르에서 시작하여 마르크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뚱 같은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상적인 정의, 자유, 평등의 사회, 즉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부조리한 사회를 뒤집어 없어야 하며, 이를 반대하는 모든 대상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척결해도 된다는 영감의 뿌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곤 정의롭고 평등한 낙원을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공포스런 사회, 가장 잔인한 죽음의 열매를 쏟아놓습니다. 수백, 수 천만 명을 죽입니다. 프랑스 풍자가 아나톨 프랑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하다는 원리의 미명하에 살해 된 사람들의 수가 다른 어떤 교리의 이름으로 살해된 숫자보다 많다” 왜 사람은 선하다고 하는 고상한 철학의 결과가 이처럼 가장 사악하고 잔인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까요? 인간의 본성이 죄로 물들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인간은 선하다는 신념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신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보았고, 선한의지로 충만한 국가와 그에 걸 맞는 권력과 환경을 제공하면 된다고 착각한 오만의 결과입니다. 결국 죄된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악명 높은 히틀러의 파시즘, 막스 레닌에 의한 공산당 일당독재의 나라들은 철저히 망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하며간 스스로 좋은 사회를 건설해 나갈 수 있다는 유토피아주의까지 망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서방세계, 북한을 그리고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다른 생각을 가지거나 반대자는 다 척결의 대상입니다. 다만 천천히 속도를 조절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똑 같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산물로 선하며 더 이상 신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사람은 자연의 산물이 선한 본성을 가졌을까요? 스스로를 개조 할 만 한 능력이 있을까요? 뉴질랜드를 비롯해서 많은 서구는 복지국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류역사 이래 지금처럼 잘 사는 경우가 없었을 만큼 최상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회에 범죄가 없습니까? 지상낙원입니까? 아닙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구 세계에서는 교육기회가 급속히 증가되었고, 복지국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악하게 만드는 인간의 능력은 그칠 줄 모르는 것 같다. 끊임없이 계속 되는 세계적 갈등, 만연한 인권무시, 폭력과 범죄 증가 등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린 각 사람의 깊은 곳에는 이기심이 들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기독교의 기본진리, 존 스토트 P100)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소위 문명화 된‘ 사회에서 당연시 되는 것들 중 대부분이 인간의 죄를 전제하고 있다. 법이 생긴 것은 대부분 인간 사이의 분쟁을 이기심 없이 공평하게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약속만으로 부족하다. 계약서가 필요하다. 문만으로 부족하다. 자물쇠로 잠그고 빗장을 채워야 한다. ... 법과 질서로는 부족하다. 법을 집행하는 경찰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죄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할 수 없다. 서로를 대하여 방어해야 한다.”(기독교의 기본진리, 존 스토트 P101) 결국 모든 인간은 죄를 전제로 한 법과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누구나 죄를 범한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범죄 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라고 했고(왕상8:46), 또 전도서에서도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라고 했습니다.(전 7:20) 아담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는 범죄 이후, 아담 이후의 모든 후손들은 아담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는 죄 성을 물려받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날 때 그렇게 순수하고 티 없는 모습 그 자체이나 그런 아이 조차 아담의 본성을 받아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 물든 본성으로 인해 죄 없이 사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 구체적인 예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을 전심을 다해 사랑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헛되이 부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지 않습니다. 둘째, 이웃을 전심을 다해 사랑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경시하고, 이웃을 미워함으로 살인하고, 마음으로 간음하고, 시간과 세금과 하나님께 드릴 것을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속이고 왜곡하고, 이웃의 물건을 탐하고, 이웃의 아내 남편을 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매일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러한 죄가 만들어내는 무서운 죽음의 열매가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세 가지를 말합니다. (기독교기본진리) 첫째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잘 의식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죄의 결과 중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엄마 아빠와 아이들의 관계로 보면 금방이해가 갑니다. 아이들에겐 엄마, 아빠가 전부입니다. 그런 엄마 아빠와의 관계가 단절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보다 더 아프고 무서운 게 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 된 영혼의 처지입니다. 가장 불쌍한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복된 일은 무엇입니까? 아낌없는 사랑으로 품어주는 엄마, 아빠와의 깊은 관계에 거하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인간의 최고의 복은 사랑의 하나님을 알고 개인적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토록 갈망하는 인생의 진정한 만족과 평안과 이김과 영광이 창조자시며,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심에 완전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즉 죄인은 이러한 하나님께 나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 죄 이후 모든 인간은 죄를 행하는 존재로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난 존재입니다. 마치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처럼 된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불안의 원인이며,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의 근본 원인입니다. 쾌락도, 성공도, 명예도, 부(富)도, 자식의 성공도 이 공허를 채울 수 없습니다. 죄를 씻음 받고 하나님과 교제 하기전 까지 이 비참한 상태는 계속 됩니다. 그러나 더 비참한 것은 그런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허물과 죄로 죽은 자 죽은 자의 모습입니다.(엡2:1) 둘째로 죄에게 내면이 속박 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죄는 단순히 잘 못된 외적 행동이나 습관이 아니다.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내적 병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 내면이 죄로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사회의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세상의 사상가들과 달리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 예수님의 진단이 그것을 분명히 해줍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죄가 내 마음을 장악하여 온갖 악을 다 쏟아 놓음이 이 사회의 악이요 고통인 것입니다. 죄가 내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어 나를 종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에 붙잡힌 죄의 종, 노예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자유의 삶을 원하지만 우리 중심이 죄의 사슬에 매여 있는 노예입니다. 하여 그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다”(롬6:17) 이것을 무엇으로 풀 수 있을까요? 매일 목욕하면 될까요? NO! 좋은 법을 정해서 따르면 될까요? 소용없습니다. 그걸 지킬 만한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일 좋은 강의를 들으면 될까요? 마음의 변화 없는 지식교육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죄로 물든 속박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힘, 곧 영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셋째로 죄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의 파괴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이 내용과 함께 순서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는 하나님이 먼저, 이웃이 둘재, 나는 마지막입니다.(기독교의 기본진리, 존 스토트, P124-5)
그러나 죄에 물든 우리는 이 순서를 어떻게 바꿉니까? 우리 자신을 첫째에 두고, 이웃을 둘째에, 하나님을 마지막에 둡니다. 이런 이기적 자기중심성에 대해 템플대주교는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보는 세계의 중심이다. 시야는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결정 된다.”모든 기준과 판단의 중심이 철저히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들이 벌어집니까?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시기합니다. 비교를 통해 우월감을 갖거나 열등감을 갖습니다. 자기 관점에서 아내가 남편을 욕하고, 남편도 지지 않습니다. 종업원은 자신의 관점에서 고용주를 오해하거나 비난하고, 고용주는 종업원을 믿지 못합니다. 모두 자기 입장에서 일방적 시야를 가지고 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 자신의 선함을 과장하고, 남의 악함을 더욱 크게 말합니다. 여기에 갈등과 파괴가 있습니다. 즉 죄로 인한 자기중심성이 바로 이 사회의 문제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가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자기를 희생하는 자세로 바뀔 수 만 있다면 갈등은 끝이 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버리고, 자신을 주신 것처럼 우리가 사랑의 길을 갈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 될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악과 갈등의 문제는 바로 죄로 오염되어, 죄의 종이 된 나의 내면과 나의 마음, 오직 나 중심의 죄 성에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죄로 물든 본성의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로 물든 나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줄 수 있을까요?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이십니다. 본문에 세리였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등장합니다. 그는 모두가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하는 부자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열등감과 소외감과 낮은 자존감과 공허에 휩싸여 살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관에 앉은 그를 보자 그에게 말씀합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즉시 일어나 예수를 따릅니다. 죄인이었던 레위는 자신을 부르시는 그의 위엄에 즉시 순종합니다. 죄인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곤 레위는 자기 집에 많은 세리들과 다른 죄인들을 불러 예수와 함께 앉아 식사를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선하다는 관점, 사회개조를 통해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보는 유토피아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매국노요 죄인이요 척결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가장 거룩한 자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십니다. 그들과 함께 합니다. 이들은 진정한 위로와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사회적 냉대와 차별 속에서 받은 깊은 아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부를 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겸손히 예수께 나온 것입니다. 이에 아무도 예외 없이 다 주님의 품에 안기어 그 동안의 소외와 멸시와 모욕을 씻음 받고 위로받는 복중의 복을 받습니다. 예수 안에 죄인이 새롭게 되는 깊은 사랑의 은혜, 새 생명의 은혜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반면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품어주며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비난하던 자들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의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순결성을 강조하며 죄인들과 식사하는 것, 교제하는 것을 금기시 했습니다. 불결해진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의 의를 타인에게 강요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예수의 모습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을 본 듯 놀랐던 것입니다. 그리곤 그 모습을 비난하는 마음으로 제자들을 불러 물었던 것입니다.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가? 그러자 그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 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병든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고침 받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끝내 예수님 앞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께 나가야 할 만큼 더럽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결국 예수를 죽입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그 부활로써 자신이 바로 참말로 죄인을 위해 죽음으로써 죄에서 자유케 하기 위해 온 구원의 왕이요 주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고아처럼 공허합니까? 죄의 노예입니까? 죄로 자기중심적 삶에 빠져 사람들과 갈등의 중심에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죄로 물든 우리 자신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4-36)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사 우리 죄 값을 다 치르신 예수, 그러나 부활하사 살아계신 예수는 진실로 우리를 자유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 예수를 믿음에 자유케 되는 길이 열립니다. 주님이 명령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 예수여, 나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나를 긍휼이 여기사 받아 주소서. 예수를 믿고 따른다 했지만 여전히 죄 속에 살았습니다. -이 시간 다시금 머리 숙이며 주의 긍휼을 구하오니 저를 불쌍이 여기사 주를 따를 새 힘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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