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2㈜ 주일예배-대림절 넷째주일 본문 베드로후서 3:10-13 제목 주님의 다시 오심2 목적 다시 오심과 주실 나라에 대한 가슴 벅찬 소망을 품는다. 소망에 찬 기쁨으로 그 때에 합당한 삶에 도전하게 한다. 지난 주에는 주님의 오심에 대해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더디 오시는 것 같지만 실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참으시는 사랑의 인내 때문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변함없는 진리는 이 땅에 한 번 오셨던 주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언제입니까? 10절에서 말씀합니다. “그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언젠가 오시는데 그 때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때라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주님 오실 때에는 서로 믿는 자들을 고발하고 잡아주고, 미워하고,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고, 불법이 횡행하고,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징조가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징조에 대해 말씀하셨지 어느 해, 어느 날, 어느 시에 올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승천하신 뒤로 한 날도 잠잠한 날이 없었습니다. 즉 늘 주님이 말씀하신 징조가 이 세상에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주님이 언제든지 올 때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여기에 있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신 것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오실 때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날에 오신다는 것을 통해 성도들에게 경각의 마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이는 주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주께서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5) 그렇기에 도둑이 몰래 오듯이 불현듯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아는 베드로는 믿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말씀합니다.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11절 첫 머리에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말씀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에 죄악의 세상과 죄인들에게 있을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앞선 10절에서도 말씀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베드로는 불의 심판을 통해 믿지 않는 자들이 그동안 붙들고 살아온 이 땅, 하늘이 다 풀어질 것이라 예고합니다. 이 우주, 이 지구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거짓되고, 불의 한 죄와 악의 세상이 심판을 받고, 또 예수를 믿지 않고 외면한 혹은 버린 모든 죄인들이 영원한 심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없어서 자식들에게 믿음의 눈을 열어주지 못한 부모들, 그런 부모를 둔 믿음 없는 자식들은 그날에 뼈아픈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모든 죄가 드러날 것이요 그 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시는 날은 이들에겐 결코 사모할 날이 못됩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11절에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고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은 예수를 주로 믿고 따르는 참 신자들에게 하는 교훈입니다. 왜 이런 교훈을 주는 것일까요? 그날은 믿는 자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은혜 날, 곧 이 땅의 수고를 그치고 모든 아픔과 눈물과 상처와 죽음이 없는 새로운 세상이 임하고 주어지는 날이기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해외 살다 보면 주님이 다시 오심에 대한 이해가 피부에 와 닿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에서 보고 싶은 사람들이 올 때입니다. 특히 남편이 한국이나, 다른 외국에 계시는 분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남편이 올 때가 안된 분들은 자유분방합니다. 옷도 대충 입고 다닙니다. 화장도 별로 안 합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온다는 날짜가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입술의 색갈이 점점 짙어 집니다. 피부의 윤기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이 라인도 선명해집니다. 결정적으로 헤어스타일이 세련되게 달라집니다. 지지고 복고, 커트하고, 예쁜 색으로 물도 드립니다. 신랑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곤 오는 날이 되면 더 광을 내고는 신이 나서 공항으로 달려갑니다. 왜요? 기다리고 기다리며 보고 싶었던 남편, 자기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이가 오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또 얼마나 기뻐합니까? 온 가족이 기뻐 난리입니다. 오랜 만에 보는 남편, 아빠를 만나니 그 구누도 대신 줄 수 없는 기쁨과 행복감이 쏟아집니다. 해서 그날 식탁은 별 차린 것 없어도 더욱 맛있고 웃음의 꽃, 행복의 꽃이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남편 아빠가 더 큰 사랑으로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대신 죄의 값을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 승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참 신자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또한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보다 분명하게는 요한계시록 19:7-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는 깨끗한 세마포를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구약시대 이스라엘은 죄인이 죄를 씻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대신할 어린양을 죽여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주인의 죄를 어린양이 뒤집어쓰고 죽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임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묘사를 합니다. 그런데 앞서의 계시록 말씀에서 신부인 성도 혹은 교회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 잔치에 들어간다는 묘사를 합니다. 결혼식에 가보셨고 또 해보셔서 알겠지만 인생에 있어서 그날만큼 의미 있는 날도 드뭅니다. 얼마나 화려합니까? 얼마나 풍성합니까? 무엇보다 얼마나 즐겁고 행복합니까? 인생에 있어서 꼭 만나야 할 사랑하는 이와 한 평생 같이 살기를 다짐하고 한 가정을 이루는 그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분, 하늘에 오르사 변함없는 사랑으로 기도하시며 성령을 통해 품어주시고 인도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하는 잔치의 날이 됩니다. 할렐루야! 그날, 예수 믿는 믿음을 조롱하는 자들과 멸시하는 자들로 인한 아픔과 쓴 눈물, 혹은 인생의 깊은 시련과 고통, 혹은 핍박하는 자들로 인하여 목숨을 잃어야 했던 성도는 그 아픔을 다 위로 받고 씻음 받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몸과 동일한 완전한 부활의 몸을 덧입고 주 예수와 대면하며 무한한 승리와 영광의 삶이 시작됩니다. 죄로 찌들었던 세상과 죄와 악과 불의를 완전히 사라진 새하늘과 새 땅에서 주와 믿음의 가족들과 영원한 잔치를 벌입니다. 또 날마다 주님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새 은혜로 인해 찬미를 멈출 수 없는 감격 삶이 임합니다. 게다가 완전한 사랑과 평화로 출렁이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참 신자 되신 교우 여러분, 이 땅에서의 주를 따름에 삶이 잠시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아픔이 있으나, 주님이 오실 때 모든 것을 갚아 주실 줄 믿고, 믿음으로 오실 주를 기다리고 간절히 사모는 길을 가십시요. 불현듯 오실 주를 간절히 사모하는 이에게 주시는 두번째 말씀은 둘째,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오해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받는 다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를 참으로 믿는 다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 믿는 다는 말에 항상 따라다니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행동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동생이자, 예루살렘교회 리더였던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또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으니라”(2:17,22) 믿음의 참 됨을 행동이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믿는 다고 다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믿음이 참임을 드러내는 신자라야 완전한 구원, 하나님 나라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행동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구원 얻는 조건으로써의 행동이 아니라, 참 믿음은 필연적으로 자기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응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구원의 완성을 주시고자 할까요? 무엇을 위해 우리를 택하신 것일까요? 구원의 목표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롬 8:29절에서 그것을 깨우쳐줍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의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온전히 닮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단지 미래의 행복이나 보장 된 천국입성 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닮고 그 결과 하나님 자신을 닮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다는 고백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믿음의 행동이 동반되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닮도록,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로 부름 받았기에 이 땅에 사는 동안 그에 합당한 길을 기꺼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사랑으로 나를 품어주시고 생명주신 예수님 그 큰 사랑,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여 기꺼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이요 경건한 삶입니다. 세상을 따르지 않고 온전히 주님께 헌신 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고 하나님께 헌신 된 거룩의 길, 경건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첫째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행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이 성령께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문을 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깨어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조차 한 인간으로서 성령의 충만함을 매일 추구했습니다. 습관처럼 새벽에 하나님께 나아가 그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주님조차 이렇게 매일 은혜를 구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해야 할까요? 안일과 게으름에서 일어나 깨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성도가 되십시요.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에게 역사가 성령을 부어주사 매사를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항상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길을 사모하고 찾으십시요. 둘째,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일원이 되어 서로의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되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각각의 재능과 영적 선물을 통해 서로를 섬기는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이 일을 통해 교우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성실한 봉사의 길을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의 목적을 성취하기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소중한 은혜의 수단입니다. 힘들고 때론 귀찮고 때론 오해 받지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을 세우라고 주신 은혜의 수단을 저버린다면 교회가 그리스도 닮는 것은 훼방하는 사람이요, 본인 스스로도 그리스도를 닮는 데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통해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5) 우리는 서로 종이 되어 섬겨야 합니다.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는 어떻게 이루어져 갑니까? 교회의 일원으로 한 몸이 되어 서로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도록 섬기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거룩이요 경건입니다. 셋째로 이웃을 위한 사랑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12:31) 예수님은 마 25장에서 마지막 때의 심판에 대한 장면을 묘사하셨습니다. 이름하여 양과 염소의 심판입니다. 양에게는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 나라가 주어집니다. 여기에서 양은 누구입니까? 주릴 때에 먹을 것 준자, 목마를 때 마시게 한 자, 나그네 되었을 때 돌본 자, 옥에 갇혔을 때 와서 위로한 자입니다. (마25:34-36) 그런데 양에게 속한 자들이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습니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25:37-39) 그 때 심판하는 임금이 답을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로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난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반면 심판의 말미에서 심판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5)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닮아갑니까? 지극히 작은 자들, 곧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궁핍한 자에게 입을 것을 주며, 낯선 사람을 초대하고, 병자를 돌보고, 갇힌 자”에게 찾아가는 섬김을 통해서입니다. 이렇게 참 신자는 성령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서로를 섬기고, 나아가 가장 작은 이웃까지도 돌아보는 삶을 살라는 주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함으로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그러나 이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길에는 예상치 못한 고통, 시련, 배신, 절망, 죽음의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믿음으로 다 감당치 못할 것 같이 여겨지고 그 길을 다 가지 못할 것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말 것은 그 때에도 주께서 힘을 주사 믿음으로 그 모든 상황을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8-39) 십자가에 예수를 내어 주시고 그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사랑을 막거나 끊을 만한 더 큰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주를 닮아가고자 기도하며 섬기고 이웃을 돌아보는 참 신자를 항상 붙들고 있습니다. 하여 변함없는 강력한 사랑이 참 신자로 하여금 굳게 서서 인내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그 믿음을 잃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 그 믿음을 지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고 소원한 하나님 나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오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상치 못한 때 도둑 같이 오십니다. 그러나 참 신자에겐 두려움의 날이 아닙니다. 마치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와 같은 혼인잔치의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날이요, 완전한 구원의 날이요,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받는 날입니다. 그러니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고 바라보고 기다리십시요. 그리고 그 사모함과 기다림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즉 우리를 부르신 목적,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따르는 것이요, 교회의 일원이 되어 서로를 섬기는 것이요, 가장 작은 자 같은 이웃에게 사랑의 손을 내미는 것을 통해 자라갑니다. 그 길이 아무리 험할지라도 주님께서 큰 사랑으로 붙드사 끝까지 견디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바라던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자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참 언약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