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7(주)주일예배 본문 요 14;16-17 제목 뜨거운 겨울 3-성령을 아는가? 목적 성령을 바로 알아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열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도가 되고,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로 서게 하려 함이다. 베리타스라는 인터넷기독교신문에 읽기에 겁나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제목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과 텅빈 사람의 10가지 차이” 였습니다. 이는 미국의 “홀리 파이어 미니스트리스(Holy Fire Ministries)의 설립자인 버트 파리아스(Bert Farias)가 분석한 내용이었습니다.(베리타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과 텅빈 사람의 10가지 차이’ 중에서 인용, 2016년, 5월 17일자) 저는 왜 이글을 읽기가 겁이 났을까요? 제 자신이 텅빈 사람으로 판명될까와 겁이 났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용감하게 읽어 내려가면서 저의 모습을 되 집어 보았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한 번 자신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 텅 빈 사람의 초점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연약함(약점), 결점(단점)이다. 그리고 점점 더 낮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반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성령에 초점을 두며, 점점 더 높이 난다. 2. 텅 빈 사람은 물질 공급과 호의, 성공을 쫓는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이런 것들이 뒤 쫓아 온다. 3. 텅 빈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 뜻을 몰라 혼란스럽고 당황하고 어리둥절해 하며 헛되이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으로 가득하고,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 뜻을 알고 있다. 4. 텅 빈 사람은 세속적인 것과 자신의 계획을 위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충만함과 하나님의 계획을 제외한 다른 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5. 텅 빈 사람은 세속적인 다른 사람의 견해와 조언 등을 위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조언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을 위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 6. 텅 빈 사람은 바른 말을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공허함은 여전하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며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온 말을 쓰지 않는다. 7. 텅 빈 사람은 자기 방어기제를 갖고 있으며 주의 깊지 않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기도하며 주의 깊고, 그러므로 불필요한 많은 어려움이나 위험을 우회한다. 8. 텅 빈 사람은 자연적 영역에서만 살아간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살아간다. 9. 텅 빈 사람은 위기의 연속인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승리의 연속인 삶을 살아간다. 10. 텅 빈 사람은 입이 가볍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말한다. 이 분석 내용이 어떻게 들리셨는지요? 우리 안에 성령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면 텅 빈 그 자리에 세상의 온갖 것이 그 자리를 대신 할 것입니다. 무엇이 성도님들의 마음과 영혼을 채우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 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힘으로 사는 존재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사랑, 희랑,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온유, 충성, 절제와 같은 인격적인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부름 받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진정한 성도가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하나님 뜻에 바르게 응답 할 수 있을까요?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성령님이 어떤 분인 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첫 번째 말씀으로 “뜨거운 겨울 2- 성령은 누구인가”라는 말씀을 지난 6월 9일에 드렸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에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임한 분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 했고, 또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내신다 언약 했던 바로 “ 그 성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신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신적 본성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승천하셨지만 성부와 성자께서 보내신 성령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함께 계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제자들과 늘 함께 계시고 이끌어주셨던 주 예수님처럼, 또 다른 보혜사로 오셔서 제자들, 즉 교회와 함께 계시고 이끄시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에서 그 사실을 명확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부와 성자께서 보내신 또 다른 보혜사가 “너희에게” 즉 예수를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 즉 교회와 영원토록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실 구원의 주이심을 깨닫지 못하는 세상은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예수를 위해 자신을 드린 교회 속에 영원히 거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나의 주, 세상을 구하실 구세 주로 믿고, 오직 예수만을 따르기로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믿음의 무리들인 교회 속에 하나님이 임하여 계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2주전 김구태 목사님께서 “교회, 그 파워”의 제목으로 말씀 하신 것처럼, 교회는 힘이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함께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과 생명을 창조하신 성령 하나님이 임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파워는 사람의 숫자가 아닙니다. 지난 주 한용대 원로목사님께서 말씀 중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하신 말씀처럼, 믿는 자들 속에 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교회의 파워인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그 주님이 성령과 함께 교회에 와 계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교회인 위리와 성령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정작 그런 능력, 그런 표지, 그런 힘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왜 일까요? 사람이 적어서, 재정이 부족해서, 빵빵한 찬양 팀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함께 계신 성령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고 따른다 하면서 실은 다 자기 맘대로 하는 것입니다. 다 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역사하실 일이 만무한 것입니다. 잔느 귀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을 구하면서 죄를 끊을 마음이 없다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왜 그런가? 주님이 안 계신 곳에서 그분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CUP,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p114) 본문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어떻게 호칭하고 계신지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him)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him) 아나니 그는(him)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보혜사, 진리의 령, 곧 성령을 “그를, 그는” 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한 인격체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신처럼, 성령도 인격 한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잘 못된 인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비인격적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뿌리는 오래전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아주 아주 오래전 AD. 250년-336년 사이에 살았던 아리우스(Arius)라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는 성부 하나님과 유사한 본질인 신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신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보다 뛰어난 천사 정도로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령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는 에너지로 보았습니다. 그 후 세월이 한 참 지난 16세기에 폴란드 헝가리 개혁교회에 영향을 주었던 소니시안주의가 있는데, 소니시안도 성령을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온 힘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근자에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성령을 인격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의 능력으로만 이해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런 능력을 받으려 하고,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마치 사도들을 통해 나타는 성령의 능력을 보고, 그것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사마리아의 시몬처럼 성령이라는 능력을 자기 소유로 삼으려 하는 것입니다.(행8:19) 여기에는 성령을 하나님으로, 인격적인 분으로 존중하고 높이는 바른 신앙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곳에서 인격적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성령을 통해서 행해졌음을 보여주고, 성령은 우리가 높이고 존종하고 모셔야 할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예를 들면(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 교리교육 중에서 인용) 1. 성령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 2.인간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 3.우리를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4.예수께 대해 증거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의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터이요”(요15:26) 5.성도를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도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아니하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6.근심하는 마음을 갖고 계신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40) 이 상과 같이 성령님은 인격적인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인격적 활동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말씀하시고, 연약함을 도우시고, 가르치시고, 예수를 깨우쳐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모습을 보며 근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께 돌아서게 하시고, 믿음을 주시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게 이르기까지 우리를 보호 견인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의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한 인격을 갖고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자, 성령은 하나님이시오, 인격적인 분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성령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인격적으로 나를 대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이신 성령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즉 성령님을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분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우리 교회와 내 안에 오신 하나님으로 높이고 모시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밥을 먹으면 든든해지고 힘을 얻듯이,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모시고 따르게 될 때 뜨거운 영혼이 됩니다. 성령의 인도, 은혜, 역사로 충만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오늘 보다 내일 더욱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영혼까지 품고 기도하며 화목을 심는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또 내게 주신 인생의 사명도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받아 승리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길이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모시고 교제하며 전적으로 순종하기를 계속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5-18)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지혜 있는 자가 되어 시간을 아껴 주의 뜻을 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충만함을 받는 다는 것은 성령의 베푸시는 은혜와 능력과 인도하심과 믿음과 소망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수동태 현재용법입니다. 계속해서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매일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모시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기도와 묵상입니다. 목마른 사슴 같이 그리해야 합니다. 이 길을 갈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모시고 충만함을 덧입는 길을 갈 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 길을 가야할 것 같은 마음, 열정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자녀들이 어떻게 자라나는 가를 봐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이 어떻게 자랍니까? 어느 날 엄마가 맛있는 것을 해주었는데, 그걸 엄청 먹더니 그 다음날 30cm, 50cm가 컸더라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맛있는 것 먹던, 맛없는 걸 먹던 매일 먹는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서 보이지 않게 큽니다. 마찬 가지로 믿음이 자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영혼이 되고, 참 성도가 되는 길은 하루아침의 기도와 모든 것을 다 버린 결단으로 자라나는 게 아닙니다. 매일 꾸준히 쉼 없이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모시고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를 덧입고 영혼의 양식을 먹는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게 저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는 습관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그렇게 저를 훈련시켰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닙니다. 여하튼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는 습관을 기르다 보니 나중에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러 가는 것이 자연스레 훈련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 기도회를 참석하면서 뜨겁게 기도했고, 그 때의 기도로 목이 터져 노래 할 때 소리도 괜찮아지는 부수적 효과도 생겼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공급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하나님과 만남으로서 새 힘을 얻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연약함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룩의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길을 조금씩 더 깊이, 너 높이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펼칠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가야 할 길을 보게 하십니다. 즉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새롭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베푸시는 사랑과 인도하심으로 새 힘을 얻게 하십니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갈급해 함 같은 심정으로 주를 사모하는 자에게 생명의 물을 말씀으로 마시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강함이 있습니다. 성령의 권세와 능력이 우리의 권세와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길을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 길에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지고, 성령님을 높이고 따르는 길이 열리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이에 화목의 열매를 맺는 영혼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세월이 악합니다. 시대의 풍조와 기류는 점점 하나님을 떠나라 유혹하고 쉴 새 없이 속삭입니다. 그러니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시간을 붙잡아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인도하심을 받는 길을 목마른 사슴같이 찾아 구하십시요. 추운 겨울 따뜻한 국 한 그릇이 온 몸을 데워주듯이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뜨거운 성령의 국을 먹어야 하겠습니다. 이로써 성령께서 인생의 추운 계절을 뜨겁게 이기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기도하며 화목의 열매를 맺는 은혜로 사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