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5(주) 주일예배 본문 벧후 3:1-10 제목 주님의 다시 오심 1 목적 더디 오시는 것 처럼 보이는 섭리속에 있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복음으로 들려지게 하고, 이 때에 더욱 예수 알기를 구하고, 증언의 삶을 살도록 하게 하려함이다. 11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3개월 마다 있는 집 인스펙션을 받았습니다. 그 전에 인스펙션을 하겠다는 주인의 예고를 받았습니다. 저와 아내는 왜 이렇게 인스펙션 날자가 빨리오냐 툴툴 거리며 그 날을 준비를 합니다. 저와 아내의 일이 약간 구분되어 있는데 저는 집밖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고 아내는 집안을 합니다. 우선 바닥에 나 있는 크고 작은 잡풀들 제거를 위해 제초제를 2주 전쯤 뿌려 놓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남겨 놓고 가든을 정리합니다. 풀을 뽑고 가지치기도 하고 청소도 하는데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집 외벽 거미줄을 제거하고 겨울 동안 슨 곰팡이와 먼지를 제거합니다. 더러워진 외벽 유리창을 일일이 물청소를 합니다. 그리고 주인이 오는 날 아침 잔디를 깍고, 롤러를 이용해 잔디밭의 엣지를 깔끔하게 도려냅니다. 하지만 이렇게 준비할 때 시간이 촉박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속이 탑니다. 주인이 올 때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 할 일이 남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 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오늘 주인이 안 왔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어김없이 약속된 시간에 왔습니다. 그래서 인스펙션을 할 때 마다 다시 오실 주가 꼭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 승천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신분으로서 본래의 자리, 즉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영광의 자리에 복귀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전에, 그리고 죽으신 후, 또 승천하셔서 영광의 자리에 돌아가신 후에도 다시 오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생전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주의하라 그 대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막14:25, 33, 37)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하-3) 승천하시는 주 모습을 지켜보며 떠나시는 주를 인해 말을 잇지 못하던 제자들에겐 천사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사도 베드로도 두번째 설교를 통해 주의 다시 오심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그를 마땅히 받아 두리라”(행3:19-21) 성부께서 예수를 보내실 것이라 선포합니다. 사도 바울도 주의 다시 오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갈 4:16-17) 사도요한도 동일하게 주의 오심을 증거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또 계시록을 통해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라고 증언합니다(계1:4) 아예 “장차 오실 이”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볼지어다. 그가 구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리하리라”(계1:7) 재차 증언합니다. 오실 주 예수를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요 애곡할 것이라 합니다.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오신 예수님을 보고 후회와 절망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생전에 그러셨던 것 같이 예수님께서는 승천 후에도 요한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자라”(계1:8) 장차 올 자라는 스스로 칭한 것입니다. 또 계 22:7,12 절에선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20절에선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증언, 승천 이후의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예수님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이유는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입니다.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동거하는 복을 주시려 함이요, 반대로 예수를 부인하는 사탄과 그 죄와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사 죄와 악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에 믿는 자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였습니다. 오셔서 모든 아픔을 위로하시고, 핍박하는 자들을 심판하사 억울함을 풀어주실 주를 기다리며 고통을 이겨낸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 성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좇아 주장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세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예수가 다시 온다는 언약은 헛말이다”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쓸 때가 AD 60년대입니다. 로마 대화제가 AD64년에 일어났고, 네로는 화제의 원인이 기독교인들 때문이라 책임을 덮어 씌웁니다. 그리곤 책임을 물어 당시의 사도들과 재판을 받으러 간 사도 바울까지 함께 다 사형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불과 30년즘 지났을 때 벌써 예수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교묘하게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는 자신의 두번째 편지인 베드로 후서를 통해 그들의 잘 못됨을 지적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과 다르다 라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예수님 오신 이후 2020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말이 2천 20년이지 참으로 엄청난 시간이 지난 간 것입니다. 그 긴 시간동안 한반도에는 삼국시대, 발해의 건국, 통일 삼국시대, 고려시대, 600년 조선시대가 전개되었습니다. 또 일제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2천년 이상의 세월이 전개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다시 오심을 실제로 믿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 긴 세월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인간들의 상식에 기초한 시간 개념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이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우리가 잘 알 듯이 하루 살이에게는 내일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당연히 “내일 모레, 글피, 그 글피”라는 단어는 더 있을리 만무합니다. 하물며 1년 이란 단어이겠습니까? 하루 살이에게는 하루도 긴 것입니다. 하루도 무한한 세월인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해야 70-80산다고 했습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도합니다만 아직까지는 100세까지 사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 치자면 100년이 한계입니다. 그래서 뭐든지 그 안에 끝을 봐야 합니다. 자기가 사는 동안 뭔 일이 일어나도 일어나야 합니다. 자기 인생이 긴 것처럼 보이고 그 이전,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신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루 살이가 어제라는 단어를 모르고, 내일이라는 단어를 모르듯 인간은 지난 과거를 다가올 무한한 시대를 모릅니다. 그러나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변함없어야 하고 항상 진리여야 하듯이, 인간의 생각,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 파악하지 못할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게는 인간의 시간의 개념이 적용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입니다. 즉 많은 세월이 지난 것 같으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그것은 하루에 불과할 만큼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루살이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인간의 지난 시간들을 볼 때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입니까? 겨우 이틀이 지난 것입니다. 즉 우리가 많이 지났다 하는 시간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실은 얼마되지도 않는 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여 왜 더 디오느냐, 더 나아가 안 오신다 할 근거로 삼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볼 때 때가 아직 안 되었을 뿐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시마 약속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막 13:31) 그럼에도 “주님이 더디 온다” 여기는 자들에게 주는 둘째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9절 말씀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인간의 눈을 볼 때 주님이 더디 오신다고 여겨지는 것은 주님이 게으르거나, 혹은 믿는 자들을 잊어서가 아니라 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오래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왜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죄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가 나를 위해, 세상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구원의 왕이심을 알지못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하고자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기다림이 없었다면 어쩌면 이 자리에 계신 그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은혜를 덧입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만약 십자가의 예수, 부활의 예수, 다시 오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구원의 주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닫고 믿게 되었다고 쳐보겠습니다. 어제까지는 예수를 미처 알지 못했고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때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참고 기다리지 않으시고, 어제 오셨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저는 예수를 믿지 않은 채 다시 오신 예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즉 그동안의 삶을 통해 예수를 믿지 않고 따르지 않은 죄인으로서 심판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못난 저의 눈이 열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고 돌아오기까지 기다려 주신 것입니다. 저도 자식을 키우다 보니 옛 생각이 납니다. 제가 아버지 어머니 속을 썩일 때가 생각납니다. 가만히 저의 청소년시절을 생각해보니 늘 힘들게 살아오신 두 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늘 못난 자식 처럼 엄청난 스트레스만을 끼친 모습이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그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어떻게 그걸 참아내셨을까 생각 할 때 눈물이 납니다. 나중에 제가 예수 믿고 나서 비로서 두 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식이 되어야 겠구나 하고 눈이 떠질 때까지 두 분은 말없이 스트레스를 참아내셨고, 또 참아 내셨습니다. 자식이기 때문에 차마 버리지 못하여 견뎌 내고 부모의 사명을 끝까지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게 부모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람 되라고 끝까지 기다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이 이것입니다. 못난 우리들이 그 깊은 십자가 사랑의 주 예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기다리심의 긍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덧입은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집에 있는 자식 보다 집을 나간 자식을 더 애타게 기다리는 그 마음으로, 아직도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가 나를 구하고자 대신 하여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사랑의 내 주이심을 깨닫지 못한 채 영원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을 아프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안에서 다 하나님 푸에 안기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기다리는 주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때 어찌 속히 안오시냐고 반문 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도리어 속히 오실까 두렵습니다. 저에게는 고모님 두 분이 계십니다. 그 중에 한 분 고모님은 시골 농부이자 맏아들에게 시집을 가셨습니다. 처녀 때 예수님을 믿기도 했으나, 믿지 않는 가정 맏며느리로 시집가신 뒤로 신앙의 길은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연세 드셔 연로하신 그 마음에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음을 보고 그나마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생 믿음 없는 가정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농사만 짓고 살아오신 고모부님을 생각 할 때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매일 기도합니다. 연세가 드시다 보니 뇌에 문제가 생겼고 몸이 이곳 저곳 고장이 났습니다. 벌써 10년 이상 움직이지 못하시고, 콧줄로 음식을 만들어 넣어 연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지만 말씀도 조금씩 하시고 의식 있고 사람을 알아봅니다. 고모를 통해 제가 전화를 하면 고모부께서 제가 전화했다고 눈물을 흘리신다고 합니다. 저에 대한 정이 많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는 저는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 오시기전, 아니 주님이 데리고 가시기전 고모부님께 복음 전할 기회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저에게 주님은 더디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고모부를 향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한 배가 유유히 강물을 따라 내려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깁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배는 동력을 잃고 맙니다. 처음에는 별 염려를 안했는데, 닻을 내렸음에도 배가 멈추질 않자 다들 불안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점점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불과 수분 후에는 수백길의 폭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내 공포에 빠져 소리치고 뛰어내리며 아수라장입니다. 이때 이 장면을 보고 있는 강 건너의 사람들 중에 다들 발을 동동거리며 이리뛰고 저리 뛰면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 저 배가 왜 이렇게 더디 내려가지. 좀더 빨리 흘러가면 좋겠다.” 다만 그들은 다들 이렇게 울부짖으며 외쳤습니다. “강물아 제발 멈춰다오. 저 배를 구하기까지 제발 그 자리에 서다오.” 그 배에는 평생을 알아온 가장 친한 친구, 평생 고생만 하다 자식 덕으로 모처럼 팔순 부부 여행을 하는 부모, 공부만 하다 수학 여행을 떠난 사랑하는 자녀가 타고 있으니 어찌 이리 울부 짖지 않을 수 있고, “제발 멈춰다오, 더디 가다오” 외치지 않겠습니까? 그 배는 더디가야 합니다. 아니 거기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더디 오심은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 부모, 내 자녀, 내 이웃이, 그리고 우리 중에 어느 누군가는 아직, 주 예수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들지 못하였기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나 자신 뿐 아니라, 부모 가족 자녀 이웃을 위한 기다림의 늦어지는 것임을 깊이 헤아려 서둘러 예수께 인도하는 성도가 되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