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5(화)성탄절 본문 마 1:18-25 제목 함께 계시는 하나님 목적 하나님 없는 세상에 하나님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모든 것의 답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새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 삶-자유, 이김, 기쁨, 평강, 사랑과 능력 즉 생명의 삶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실체와 비극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와 그 모략:십자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안에서의 새 생명의 삶(풍성함) 할렐루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구원을 주시기 위해 메시야, 구원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할렐루야! 인터넷에 “크리스 마스 이브를 함께 보내고 싶은 스타 1위”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와 읽어보았습니다. 일위는 누구일까요? “국민 남친 박보검”이었습니다. 또 크리스마스 하면 가장 많이 연상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예수가 아니라 “산타 클로스”입니다. 이처럼 성탄절의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 세상의 재미와 풍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탄절 아침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바르게 앉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그 의미를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옆에 분에게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님의 이름에 어떤 뜻이 담겨져 있습니까?” 이름에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부모의 깊은 기도와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름이 담고 있는 뜻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께는 어떤 이름을 지어줬을까요? 2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동거도 하지 않은 마리아가 임신한 것과 앞으로 있을 일들을 두려워 말라 합니다. 마리아의 임신은 간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 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 마리아에게서 날 아기는 육신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직접 지어주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 합니까? 예수라는 이름에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강력한 의지와 뜻이 담겨”있음을 말합니다. 그럼 예수라는 이름에 담겨진 하나님이 강력한 의지와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말합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자기 백성, 즉, 구원이 필요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조금 싱겁다는 생각이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는 것과 다른 뜻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멋진 차입니다. 멋진 집입니다. 폼나는 직업입니다. 사업이 잘 되는 것입니다. 꿀리지 않는 신랑, 남편감을 만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름 꽤나 날리는 것입니다. 권력을 쥐고 폼나게 사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성탄절에 예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어떤 선물을 기다리듯이, 세상이 기다리는 것은 당장 내 필요를 채워주고 나를 세워주는 눈에 보이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주시려는 눈에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매우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그렇게 긴급하게 여겨지거나 어떤 절박한 필요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인간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에서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눈물과 아픔과 갈등과 허무는 다 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죄가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기 뜻대로 행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리지날 죄, 원죄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능력 안에 거하는 삶을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없는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죄의 열매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필립얀시는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내”라는 책에서 중세시대 신앙의 대가들이 깊은 기도 속에서 발견한 자기 안에 있는 일곱 가지의 근본적인 죄에 대해 말합니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죄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교만, 질투, 분노, 탐욕, 나태, 탐심, 음욕”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인간 안에는 이런 죄의 모습이 뼛속 깊이,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나오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갈등과 싸움이요, 분열과 전쟁이요, 사기와 복수요, 탐욕과 나태의 노예요, 출렁이는 음욕의 바다에서 허우적 거리는 이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이 같은 죄의 열매를 뿌리며 서로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며, 그 속에서 모든 것을 가졌어도 허무와 우울 속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멋진 자동차로 해결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자동차로 도배 했을 것입니다. 만약 돈으로 해결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돈으로 도배 했을 것입니다. 만약 이 문제를 교육으로 해결 할 수 있었다면 세계 모든 곳에 하버드대 수준의 학교를 세우셨을 것입니다. 정치로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을 최고의 정치 전문가로 세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왜요? 이런 것들로 해결 할 수 없는 더 깊고 깊은 근원적인 문제인 죄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문제의 근원이 죄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엄마를 잃은 어린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장난감이 아니라, 따뜻한 엄마 그 자체입니다. 마찬 가지지로 하나님이 없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럴듯한 장난감인 돈, 교육, 정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토록 찾는 진정한 인생의 의미, 우리가 그 토록 찾는 진정한 사랑, 모두가 그 토록 찾는 진정한 평화, 모든 생명 있는 존재가 그 토록 찾는 참 생명, 곧 영생이 하나님 안에 다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구원을 주시려고 죄의 노예가 된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죄를 다 짊어지사 모든 죄의 값을 다 치루신 것입니다. 이로서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믿고 돌아서는 자는 예수 안에서 참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놀라운 구원이 임하였습니다. 죄에서 자유케 된 것은 물론이요, 하나님 품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용서와, 위로와, 치유와 평화와 소망과 능력을 날마다 덧입으며 사는 구원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 오실 때 완전한 구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아침 예수님의 그 이름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 안에서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 안에서 내가 너는 내 것이다.” 할렐루야! 예수님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23절에서 말씀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예수”라는 이름 외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갖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도 사자를 통하여 전달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 이름이라는 의미도 충분한데, 굳이 왜 “임마누엘”이라고 명명을 하셨을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께 정하여 주신 것일까요?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반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죄에서 구원 받은 이후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강조 하는 이름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이제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예수 안에 있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인물들 중에 하나님께 크게 쓰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그 시대의 사명과 역사 속에서 큰 획을 긋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의 특징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언약을 주셨고, 그 언약을 이루어지기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 마다 함께 하사 그 앞에 있는 모든 인생의 시련들을 이기게 하셨고, 그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된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는 중 돌을 베게 삼아 초라한 잠을 잘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이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말씀하실 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1) 또 여호수아가 모세 이후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할 두려운 사명을 받을 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그 일꾼들에게 한 마디를 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리고 이 말씀을 붙잡고 모든 것을 대면했고, 이겼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사 이길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 능력과 권세로 붙들어주시고,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이름을 주시고 계십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들과 가정과 교회 위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겠다는 언약이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이 이름의 뜻이 다시 한 번 마태복음 마지막 절에 등장합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시작부터 마지막 까지 어떤 하나님을 우리에게 언약하고 있는 것입니까? “함께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의 길을 다 가기까지, 어디로 가든지 간에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를 붙들어 주시겠다는 언약인 것입니다. 다윗이 이것을 깨닫고 시 139편 9-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요셉의 경우 어린 나이에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노예가 되었습니다.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누가 보던지 속이 터져 죽어도 시원치 않은 처지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막힌 인생은 이스라엘을 살게 하는 생명의 통로가 됩니다. 망하는 것이 당연한데 어떻게 그가 그토록 훌륭한 인생의 길을 가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한 마디를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신지라”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그를 붙들고, 이끌어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이렇게 선포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함께 계시는 하나님만 계시면 다 된다” 왜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와 아들을 주시는 사랑이 우리를 붙들 때 그것을 막을 것이 없고, 그것을 끊어 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함께 계셔서 그 능력으로, 그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0:10) 혼자로 외로우십니까? 주님이 말씀합니다. “혼자라 외로워하지 마라. 내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할 것이라, , 가진 것 없고 모든 것이 부족하여 두렵습니까?주님이 말씀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것이요, 내가 너의 능력이 됨이라“(고후12:9) 예수를 안에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만 바라보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 너는 내것이다. 외로워하지말라. 내가 함께 할 것이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의 능력이 될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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