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3(주일) 3.1절 100주년 기념주일/성찬식 본문 마 5:13-16 제목 너희는 겨레의 소금과 빛이다 목적 나라의 위기 앞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오늘의 겨레가 있게 되는 초석이 된 믿음의 선배들을 통하여 교회인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사명을 부여 받았는가를 깨닫는 계기가 되고, 살게 하고자 함이다. 3.1독립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에 맞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의연이 일어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본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만방에 선포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독립운동을 통해 우리 겨레는 근대적인 민족으로 거듭났고,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고, 비로소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꾸며 연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억압과 불의에 맞서 의연이 일어나 항거한 이 정신은 대한민국의 헌법에도 명시 될 만큼 우리 겨레의 긍지요 중요한 정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3.1독립만세운동의 열매는 저절로 맺힌 것이 아닙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전국에서 1,542회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고, 2백2만3천명이상이 참여해서 독립을 부르짖었습니다. 그 중 7,059명이 사망했고, 15,961명이 부상당했습니다. 그리고 46,948명이 검거 되었다고 보고합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당시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했던 기독교인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 것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상을 함께 보겠습니다. (2분 43초) 영상의 내용은 100년 전 대한독립만세 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목사, 장로, 평신도, 기독학생 남자여자 성도 가릴 것 없이 모두 참여를 했습니다. 서울 수표교회 담임이자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명이었던 신석구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화영 목사가 천도교와 함께 연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펼치려 하니 참여 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과 ‘교리상 천도교와 함께 연합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생각해보겠노라 하고 즉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 후 새벽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하나님께 묻고 또 묻습니다. 그러자 2월 27일 이런 음성이 신목사에게 들렸습니다. “4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김승태, 3.1운동과 한국 기독교인, 코람데오닷컴) 이 음성을 듣고 즉시 결단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민족대표 33인에 서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석구목사는 이 운동으로 독립이 곧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습니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터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 천, 혹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속에는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신 3남매 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하여도 족하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을 버리고 독립위해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일본 헌병대가 조사한 1919년 말까지의 3.1운동 관련 검거된 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3,426명이 되었습니다. 이 양은 비종교인까지 포함한 전체 검거 된 자의 17.6%에 이릅니다. 또 이 중 목사를 포함한 교역자는 244명으로 천도교나 다른 종교의 두 배나 되었습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 검거된 471명 중 65% 이상인 309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인구의 1.5%에 불과한 기독교였는데, 대한독립만세운동에는 17%에서 22%까지 기독교인들이 적극 참여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기독교가 조선 땅에 들어온 지 불과 30년 밖에 안 되었는데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민족의 문제 앞에 앞장저서 저 뜨거운 독립의 불을 지피는 씨앗이 되었을까요? 앞서 본 영상에서도 설명 되었듯이 당시 믿음의 선배들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임과 동시에 민족의 일원으로써 동일한 억압을 받고 있었기에 신앙의 수호와 민족의 독립이 결코 분리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인으로써 더욱더 민족의식과 애국의식을 강하게 견지하고 있던 터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예수의 정신을 따라 분연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개인의 안위와 복락에 매몰된 신앙이 아니라, 나라와 겨레에 대한 억압과 불의에 대한 적극적인 항거와 참여로 자신을 희생하며 민족의 선두에 서서 독립운동을 이끌고 참여 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당시 미국 기독교연합회는 “예수를 믿는 다는 말과 독립 시위에 참여했다는 말은 지금 한국에서는 동의어가 되었다”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천도교, 불교뿐 아니라, 기독교 또한 그 시대의 소망이었고 빛이었습니다. 개인의 영화에 매몰 되지 않고 복음과 고난에 동참 하는 것을 진정한 복으로 여겼기에, 구차히 목숨을 부지하기보다 차라리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는 길을 담대히 걸어 갔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에겐 다 잃어도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붙잡고 사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듯이,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예수를 따랐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을 버리는 소금의 삶을 통해 암울한 시대 겨레의 빛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선배들은 그 시대의 소금과 빛이 이었습니다. 그러나 현 세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교회인 우리는 그만 그 모습을 이어가고 있지 못합니다. 기독교 인구가 20%가 넘는다 하나그 위력은 100년 전 1.5%의 선배들의 믿음에 비할 바 못되고, 로마 시대의 3% 선배들의 믿음에 비할 바 못 됩니다. 백여 년이 지난 우리는 왜 많은 성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맛 잃은 소금이 되었을까요? 왜 세상에 밟히는 모습이 되었을까요?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번영과 세상에서의 보상과 성공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것을 추구한 것입니다. 하여 세상의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 두 가지를 잃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꿈인 하나님 나라를 잃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평화와 공의가 다스리는 나라를 향한 목표 대신 세상의 복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십자가 예수의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을 버려서라도 주 예수의 뜻,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겠다는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요? 하나님은 히브리서를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 하여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7-8)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른 진정한 믿음의 선배들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것, 그것이 물질이던 목숨이던 간에 집착하지 않고, 치욕과 억압을 받던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믿음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자 세상을 이기는 역사, 세상이 스스로 변하는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용서하셨고, 불의 앞에서도 의의 길을 가신 예수의 방식을 따름이 결국에는 진정한 길, 승리의 길임을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 입증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길이 옳다함을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님이 보증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굴욕을 당해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도리어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며 주를 따를 때 “네가 옳다” 하며 변함없이 보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계속 가라 격려하며 붙들어 주시는 변함없는 예수님, 변함없는 이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뉴욕 리딤어처치의 담임목사인 티머시 켈리목사는 “세상이 묻고 진리가 답하다”는 책의 “살아있는 신: 진리의 배타성”이란 자신의 글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수께끼 같은 일을 소개합니다. 그 수수께끼는 “왜 기독교가 결국 로마 제국을 지배하게 되었을까?”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고, 게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자를 믿는 미개한 이들이라 경멸당하는 자들이었음에도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300년의 억압을 이기고 로마를 지배하는 일까지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믿음에 따른 삶 때문입니다. 로마시대 예수를 믿는 자들은 다른 종교인들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경멸 받던 가난한 자들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무시당하던 여성들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인종과 계급을 구분하던 사회였으나 그리스도인들은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2세기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 안에서 죽어갔고 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사람들로 가득 찼을 때도 그리스도인들을 도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남아서 그 이방인 이웃들을 돌보느라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억압과 고난 속에서도 가장 평화로우며, 가장 너그러우며, 가장 희생적이고, 가장 포용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당시 사회와 다르게 무모하게 보이는 길을 갔을까요? 그것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근본 진리 때문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원수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고 그들을 사랑한 예수”를 근본 진리로 믿은 것입니다. 나아가 이 예수가 그들의 뼈 속 깊이까지 새겨져 있었기에 그들은 그 시대와 달리 세상과 전혀 다른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2천 여 년 전 로마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했던 기독교도들이 300여년의 억압과 고통 속에서도 자기를 반대한 사람들을 위해 사랑하고 용서하며 죽으신 예수를 따르는 소금 같은 삶으로 로마 스스로 변화되게까지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겨레의 땅에서 일어난 1.5%믿음의 선배들의 희생에서 그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원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며,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위해 용서하며 죽음에 이른, 그러나 부활하신 이 예수만이 진리임을 믿고 그 삶을 따르는 자들의 길이 옳다함을 로마시대의 선배들이, 100년 전 우리 겨레의 선배들이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옳다 함을 예수께서 지금도 변함없이 보증하고 계십니다. 만일 이 시대 교회인 우리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승리를 방식을 의지하여 예수와 그 삶을 우리 뼈에 새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모습으로 우리 겨레의 땅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 위에서고, 일본 보다 더한 악함과 억압으로 백성을 감옥에 가둔 저 북한이 자유와 공의의 가치 위에 세워지기를 기도하며 예수의 삶을 따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초대교회의 선배들이 그랬고, 100여 년 전 우리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이 겨레는 교회를 통하여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요, 독립의 진정한 목표, 곧 자유와 평화와 공의 위에 세워지는 대한 겨레가 될 것이요, 100여 년 전 이 꿈을 안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버렸던 믿음의 선배들이 이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본다면 감격하고 기뻐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주를 위해 겨레를 위해 죽임당한 이 세상에서의 삶을 후회치 않을 것입니다. 천 번이라도 죽으리라 다짐 할 것입니다. 우리 다시 믿음의 진정함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와 평화와 공의가 다스리는 나라가 되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오직 예수의 삶을 철저히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과 오셔서 주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삶의 방식대로 사는데 우리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은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요. 그 때 우리의 삶은 세상의 소망, 빛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