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7(주) 주일예배 본문 눅 15:11-31 제목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 목적 둘째 아들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아 하 나님께 돌아오게 하려 함이요
영상(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일기장) 영상속의 아버지는 바로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를 때, 그토록 귀찮게 할 때조차 사랑으로 대해주시고 품어주신 그 아버지의 깊은 사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 해온 이 같은 아버지의 사랑을 비유로 사용하여 하나님 아버지, 곧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로 올려놓으시고 회복시키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십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를 깨우쳐 주십니다. 누군가 나를 조건 없이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면 모든 것을 소유했다 해도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모든 재산을 다 주고서도 그 사랑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둘째 아들이 그런 사람입니다. 게다가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둘째 아들은 패륜아입니다. 어떤 면에서 둘 째 아들이 패륜아요 돌에 맞아 죽어도 싼 아들이었을까요? 첫째 아버지를 능욕했습니다. 당시의 법에 의하면 유산은 반드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야만 자녀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자녀들에게 미리 배분을 한다 해도 그 유산에 대한 재산권, 처분권은 여전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어떤 자녀도 손을 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둘째가 아버지께 미리 유산을 달라고 했다는 것은 아버지가 빨리 죽으라 말하는 것을 의미 했습니다. 그러니 당시의 사회에서 볼 때 둘째 아들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할 나쁜 놈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빨리 죽으라 능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몫을 줍니다. 둘째, 아버지를 버립니다. 유산을 주자 며칠이 안 되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갑니다. 아버지를 버린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아버지의 허물이 됩니다. 결국 아버지의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탕진합니다. 최후에는 이방인의 종이 되어 돼지를 치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연명해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주는 이 없어 주려 죽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치욕스런 아들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 같이 패륜아요 자격 없는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합니까? 죽었던 아들, 잃어버렸던 아들이 다시 돌아왔다고 아버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쁘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아들을 품어 환영합니다. 아버지의 이 모습 속에 드러난 사랑은 어떤 모습입니까? 첫째 무조건 적 사랑입니다. 참 된 행복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나들목교회 김형석 목사는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하나는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앞서 본 영상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해보십시오. 또 어머니를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들이 행복한 이유는 이런 어머니, 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산 태종대에 가면 모자 상이 있습니다. 하도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서 세운 것입니다. 낭떠러지에 서 있는 모자상이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나게 합니다. 이 후 이곳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마음 그 깊은 곳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무조건 적으로 사랑해 줄 수 있을까요? 내가 죄를 지어도, 내 허물이 보여도, 돌이킬 수 없는 모습을 가졌다 해도 그 속에는 사랑 받고자 하는 갈망이 있고 울고 있는 영혼이 있음을 헤아려, 그런 나를 누가 품어 줄 수 있을까요? 허물과 죄로 괴로워하는 나를 누가 책망 없이 조건 없이 사랑해 줄 수 있을까요? 이 사랑을 받을 수 만 있다면 누구나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를 능욕하고, 아버지를 버리고, 파산한 둘째 아들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이 멀리 있는데도 한눈에 알아봅니다. 아들이 나간 뒤로 한 시도 그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중 하나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험한 세상에서 길 잃은 자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자식을 잊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하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그런 부모가 혹 자식을 잊을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다고 하십니다.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이사야 49:15) 집을 나간 아들을 이렇게 잊은 적이 없으신 아버지는 끊임없이 아들을 기다립니다. 그리곤 멀리서 아들의 모습이 보이자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의 체면을 벗어던지고 아들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리곤 아들의 입에서 용서를 구하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목을 끌어않습니다. 입을 맞춥니다. 그 어떤 책망도 꾸중도 없이 온전한 사랑으로 조건 없이 그를 품어줍니다. 이 조건 없는 사랑이 아들의 지난날의 모든 허물과 죄와 실패를 치유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에서 자유케 합니다. 아버지의 이 사랑이 바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품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아버지를 버린 우리를 그 품에 거하게 하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죄인의 수치와 모욕을 대신 당합니다. 죄인이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며 십자가에 자신을 메답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이 아들을 십자가에서 잃는 아픔을 겪습니다. 성부와 성자께서는 죽어 마땅한 죄인 된 저희를 그렇게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사랑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든 자를 품어 주십니다. 그 큰 사랑으로 다 품어주십니다. 그 눈물을 닦아주시고 다시 기쁨의 눈물이 흐르게 합니다. 고뇌와 우울의 눈물이 감사와 승리의 눈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마침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라기 4:2) 우리를 살려 기뻐 뛰게 하는 조건 없는 사랑, 우리가 갈망하는 그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님 안에 흘러넘칩니다. 외롭습니까? 허물이 너무 많습니까? 조건 없는 사랑의 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 품은 아무 조건 없이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품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지금도 기다리는 그 사랑의 품으로 들어가십시오. 주님이 기쁘게 두 팔 벌려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둘째로,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랑입니다. 행복의 또 다른 조건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라고 김형석 목사는 말합니다. 내 삶이 진정으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행복함을 경험합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용서받고 치유 받아 새롭게 창조된 영혼이 되었다면 가치의 문제가 남습니다. 그런 나의 인생이 의미와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둘째 아들처럼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떠납니다. 둘째 아들에게 가치 있는 것은 자신이 가진 부로 즐거움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즐거움은 결코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할수록 더욱 강한 재미와 자극이 필요 했던 것입니다.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불쾌함은 더 깊어져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 외에 더 높은 것, 인간의 존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추구했던 것은 점점 그 존엄함에서 더 멀어지게 했고, 결국에는 돼지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맙니다. 파산한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조건 없는 사랑의 아버지께 돌아오자 어떻게 됩니까? 존귀한 옷을 입힙니다. 반지를 끼워줍니다. 이것은 아들의 지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가장 비참하게 살아가야 할 자가, 가장 존귀한 자의 자리에 다시 서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돌아갈 때 비로소 우리가 서야할 참 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언약 되어온 것입니다. 창세기 17:7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세기 17:7)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서는 이렇게 언약합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31:33)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통하여 온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게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버립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이 구원을 완성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어나기 시작 합니다. 요 1:12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 없는 허무하고 죄의 노예가 된 비참한 존재가 예수 안에서 만물의 창조자 되시고 완전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지위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자녀 된 자들에게는 사명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2:10) 대기업 회장들은 자기 아들들에게 큰 업체를 하나씩 주고 회사를 발전시키라고 합니다. 우리도 부모 잘 맛나 그런 기업 하나씩 받는 다면 얼마 좋을까요? 그러나 그것을 부러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에 비하면 그것은 시시한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아들 딸 된 우리들에게 이 세상을 주셨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경영을 우리에게 맡긴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각자에게 맞는 재능과 일을 통해 세상에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세상을 바꾸라는 가장 고귀하고 존귀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지금 준비하고 있는 그 분야에 들어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시행하고, 함께 일하고 만나는 영혼들을 치유하고 소망의 빛이 되라고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긍지와 의미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길은 남들과 비교 우위에 있는 우월감으로 사는 것과 다릅니다. 세상이 좀 더 알아주는 것 때문에 긍지를 갖는다는 것은 아직 신앙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남들보다 별루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이 둘은 나와 서로를 망하게 하는 사탄적이요, 또 진리 안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무조건 적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존귀하고 위대한 일이 있을 뿐이지, 거기에 어떤 귀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믿음과 의식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통해 둘째 아들과 같은 영혼을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상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고,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지금 내게 주신 그 일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나의 하는 일이 일이 세상을 살리는 위대한 일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진리 되신 예수를 따라 이 일을 수행 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제게 주신 하나님의 일을 통해 둘째 아들과 같은 영혼이 주님을 만나는 위대한 통로가 되게 하소서” 2018년 CBMC(onnecting Business & Marketplace to Christ), 즉 기독실업인회 회장을 맡았던 이승률 장로의 스토리입니다. 이분은 예수를 늦게 만났습니다. 그 때가 1990년입니다. 결혼 한 후 15년이 지나서 였습니다. 이를 위해 아내와 장모님은 엄청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예수 만난 후 2년 뒤 1992년 CBMC 전도모임에 초대를 받습니다. 거기서 김동호 목사의 설교를 듣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자, 돈 벌어서 남 주자, 출세해서 남 주자”는 메시지 였습니다. 이 때 그 메시지가 그 마음을 비수처럼 찔렀습니다. 기업인으로서 정당하게 벌어 정당하게 쓰는 것에만 몰두했던 그에게 김동호 목사의 메시지는 인생 후반전의 좌우명이 되게 하는 놀라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이승률 장로는 연변과기대를 세우는데 큰 역할 합니다. 나아가 북한에 과기대를 세우는 일도 수행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해석이 되자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 하게 된 것입니다. 사업이 커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최고의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일이기에 위대하고 최고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의 그 일을 통해 너를 통해 둘째 아들 같은 영혼이 나의 품에 들어오게 하라. 네가 일하는 일터가 진리가 시행 되는 나의 나라가 되게 하라.” 이 보다 더 가치 있고 존귀한 신분은 없습니다. 나아가 둘째 영혼 같은 영혼들을 살리는 위대한 사명, 진리를 세우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하는 그 일이 그토록 위대하고 가치 있는 일이요, 그런 위대한 일을 수행하는 존귀한 존재 것입니다. 이 눈이 열릴 때 우리의 일과 일터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조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품에 들어가십시오. 거기에 진정한 자유와 치유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로 부름 받아 사는 존귀한 인생이 열립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가정과 일터를 진리를 세우고, 둘째 아들과 같은 영혼이 주께 돌아오게 하는 일터가 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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