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30(주) 주일예배 본문 하박국 3:16-19 제목 고난 중 믿음의 역설 목적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도리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 장성한 사람이 되게하려 함이다. 딸과 윷놀이를 했습니다. 얼추 시간이 지났습니다. 두 사람 다 말 셋씩을 났습니다. 그리곤 서로 하나를 남겨 놓고 간발의 차이로 앞서 거니 뒤서거니 했습니다. 딸은 윷 하나만 나오면 되는 곳에 말이 있었고, 제가 바로 그 뒤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순서가 되어 손가락에 하나를 끼고, 나머지 세 윷가락은 등이 위로 오게 해서 손바닥에 나란히 펴 잡았습니다. 그리곤 손가락에 낀 하나만 위로 던지고 나머지는 그대로 손바닥으로 눌러 깔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손가락에 낀 말이 도가 나오게 할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손바닥에 딱 붙여 깔았던 세 윷가락 중에 하나가 제대로 안 되 결국 개가 나왔습니다. 하여 앞에 있는 딸의 말을 잡지 못하고 건너뛰었습니다. 이번에는 딸이 던졌습니다. 개가 나와 이번에는 딸의 말이 제 말을 건너뛰었습니다. 딸은 자기 말이 잡힐 거라고는 생각도 안하고 한 칸 앞서 있다고 좋아라 했습니다. 저는 기회는 왔다하고 높이 윷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딸의 마지막 말을 잡아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딸의 얼굴이 붉어지고 금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그리고는 “아빠가 속여서 그렇다”고 목소리를 높이고는 자기 방으로 휑하니 가버렸습니다. 그리곤 문을 꽝 닫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서러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 딸이 어떤 것 같습니까? 어리지요. 어려도 한참 어립니다. 윷놀이 하다가 졌다고 그걸 못 참고 눈물 흘릴 정도니 얼마나 어린 모습입니까? 저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딸이 이 험한 세상을 살다가 별 일을 다 격을 텐데, 그 때 마다 어린 아이처럼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더라도 그것에 짓눌려 주저앉아 방황하는 딸이 아니라, 담대히 그 시련을 대면하고 이겨내는 딸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늘이 무너져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무너진 하늘을 아래에서 소망의 빛을 발견하고 일어서는 딸이 되게 해주옵소서. 모든 것을 다 잃어도 하박국 선지자 같이 함께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눈물을 훔치고 도리어 감사하며 기뻐하는 장성한 딸이 되게 하소서.” 이 기도는 저 뿐만 아니라 자녀를 둔 모든 부모들의 기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이가 계십니다. 깨진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모든 인류와 피조물의 주인 되신 예수님, 이 예수를 보내시고 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자녀 삼으신 여호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딸, 아들이 되기를 원하실까요? 어린이 아이에서, 청소년으로, 청년으로, 나중엔 가정을 이루고 그 자녀들을 놓고 번듯하게 길러내는 아비, 어머니 같은 장성한 영혼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즉, 믿음이 장성하여 태산과 같은 시련을 이기는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믿음의 모습을 그 사명을 끝가지 감당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만 오늘은 그 중 한 사람인 하박국 선지자의 믿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박국은 B.C.621년부터 약 12년 정도 활동을 했습니다. 이때는 남 이스라엘의 국운이 거의 다 해 가던 시기 였습니다. 이 때 하박국은 하나님 앞에 나라를 고쳐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여호야김은 폭정을 행했고, 백성들은 부도덕 했고,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무너지고 공의가 깨트려진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의 기도에 어떤 기적도 역사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의 그 괴로움과 아픔이 1: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 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1:1) 이 기도 속에 하나님께 대한 하박국의 실망이 깊이 묻어납니다. 또 오늘 본문 16절에서는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전쟁의 공포에 빠진 것입니다. 바벨론이 침공하는 환상과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망하게 될 환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죽음과 절망의 공포입니다.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중동의 한 전쟁에 투입된 미 특수부대원의 다큐였습니다. 8명의 특수부대원들이 작전을 펼치다 고립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 세계 최고 수준의 미 특공대원들이니 그 정도쯤이야 하고 거뜬하게 해치고 나올 용감무쌍함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큐에서 미 특수부대원은 자신들도 죽음과 두려움의 공포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이공포를 하박국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17-18절에서 놀라운 반전을 보여줍니다.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전쟁의 공포, 나라가 망하게 될 절망, 개인적으로도 모든 것을 잃게 될 극한 상황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좌절하고,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 하고 절망한다 해도 최소한 동정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쓴 눈물과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하박국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모든 상황을 초월한 초인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자신은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고백은 초현실적인 고백입니다. 상식적으로보면 실성한 사람의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즐거워 한다는 말이 정상입니까? 나라가 망하고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는데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한다는 것이 가당키는 한 말입니까? 아닙니다. 미치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구약의 인물 중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박국의 말처럼, 자신의 모든 재산, 자신의 일곱 아들을 한 날에 잃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온 몸, 머리서부터 발바닥까지 종기가 나고, 짓물러 터져 고름이 흘러내려 게가 와서 핥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남편의 초현실적 모습에 아내가 질린 것입니다. 이쯤 되면 다 포기하고 하나님마저 버려야 한 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박국이 그런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라도 자기 생명도 다 잃을 처지에 있음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도리어 그 속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함으로 인간의 고결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상황을 핑계 삼아 세상의 방법과 타협하지 않고 거룩한 길을 끝까지 가는 의연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된 우리가 바로 이러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든 시련과 절망의 상황에서도 굳게 서서 자기 십지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장성한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야 실패와 시련을 핑계로 세상과 타협하여 죽음의 길로 가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을 깨트리고 되어야 할 진정한 내가 되는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이 땅을 새롭게 하라는 사명을 감당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직장을 사회를 살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즐거워하며 그 모든 상황을 이기는 하박국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저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이기에 절망해야 할 이 상황에서 도리어 견고히 서서 자기 길을 간단 말인가? 나도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예수가 누구인지 한 번 알고 싶다”라는 거룩한 호기심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감사한 것은 이 믿음이 어느 특별한 누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그러 장성한 믿음의 사람의 길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가 다” 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속임수와 유혹과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대면하여 요동치 않는 믿음의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장성하기를 기대 하듯,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를 그 길로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어떻게 그런 장성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게 될까요? 한 번 따라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믿음이 자란다” 오늘 본문의 하박국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랑 같은 조건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더디고 기도대로 해주지 않는 하나님께 실망한 듯 한 모습을 1:2절에서 보여줍니다. 이 점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다른 점은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모든 것을 잃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그는 도리어 하나님을 신뢰하고, 즐거워하며, 장차 있게 될 구원을 기뻐함으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도리어 새로운 꿈을 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리 된 것입니까? 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더 깊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2:4절”에서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즉 “하나님을 믿는 의의 백성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치는 바벨론처럼 그 힘과 우상과 불의함으로 살지 않고, 의로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전에 하나님은 하박국의 기도에 답하기를 부도덕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고칠 것이나, 그 일을 바벨론을 통하여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내용이 하박국 1장 5-11절에 나옵니다. 그러자 하박국이 다시 “의롭지 못한 이방 나라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심판하게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항의를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의롭지 못한 바벨론이란 이방 나라를 통하여 심판하나 거기에도 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그 뜻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2:4-19절에 걸쳐 바벨론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망하고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일이 세상에 가득 할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이 2:14절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물이 바다 덮은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라” 자 하박국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았습니까? 이스라엘을 심판 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바벨론이란 나라를 통하여 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을 택한 여호와란 존재도 별 것 아니라는 비웃음 당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당시 최강의 나라인 바벨론조차 하나님의 권능 하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일이 물이 바다 덮은 같이 세상에 충만할 하실 하나님이심을 그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믿음의 눈이 확 열렸습니다. 그 결과 절망의 상황과 공포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초연하게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 물이 바다 덮은 같이 온 세상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충만하게 될 그 구원을 기뻐하며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지금의 현실은 이러하나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 현실을 이기게 하실 것이요, 되어져야 할 나의 모습과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끄실 것을 신뢰합니다. 그러자 그 마음이 견고해져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이 힘이 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박국이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흔들리지 않고 도리어 즐거워하고, 오직 여호와가 나의 힘이라 고백하는 믿음에 이르게 된 것은 바로 그가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바로 잡으시는 분이심을 ”를 새롭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마찬 가지로 나에게는 왜 믿음이 없나 고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박국이 그랬고 모든 믿음의 사람이 그랬듯이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신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깊이 아는 것이요, 이 예수를 보내주신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의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 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진정한 인간 되는 길은 이처럼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승천하신 예수, 그러나 다시 오실 이 예수가 이 세상을 죄와 불의에서 구원하신 온 인류의 주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고난 중에 도리어 소망의 빛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기는 믿음의 역설, 믿음의 승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뒤 돌아 볼 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예수님의 그 깊은 사랑,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깊이 깨닫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나의 생각대로 해주지 않고 도리어 좌절을 겪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케 하는 시련들을 거두어 가주지 않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깊은 사랑, 그 아들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그 깊은 은혜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회의와 불신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2:1절에 의하면 하박국은 자유를 그가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기다림으로 얻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렇습니다. 비록 답답하고 이해가 안 되지만 하나님 앞에 계속 기도하고 묻고 그 답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고, 그 말씀 중에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고난을 돌파하는 믿음은 막연히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계시 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정확히 어떤 분인가를 깨달을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붙들고 계시는 분이심을 정확히 할 때 믿음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시련이 고난이 앞에 있습니까? 말씀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기를 구하고 지혜를 구핫십시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자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랄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의 눈이 열리고 하박국처럼 고난 중에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믿음의 사람,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고 가정과 사회를 바로 세우는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