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0(주) 주일예배 본문 마 7:13-14 제목 세상과 다른 길을 가는 크리스찬 목적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되고, 좁을 길을 가는 사명을 가슴에 품게 하고자 함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두 가지 사명이 주어집니다. 하나는 온갖 어려움을 넘어 설줄 아는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몸이 자랄 뿐 아니라,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모습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사회의 일원이 되어 함께 사는 성숙한 사회를 이루어가는 사명입니다.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십자가의 죽음 당하였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이 예수야 말로 참으로 살아계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따르는 거듭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사명이 주어집니다. 첫째는 성숙한 성도로 자라야 하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개인적 필요 때문에 예수를 찾았던 단계를 벗어나 “오직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예수만이 나의 주, 나의 왕이심을 신뢰하고 예수의 가르침과 길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앙에 있어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남달리 어떤 신비한 능력, 권세”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특별한 능력과 상관없이, 어떤 시련이 와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배할 줄 아는 성숙함, 사랑으로 행하는 성숙함입니다. 우리에겐 “어린아이”에서 “어른”의 믿음으로 자라야 할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른의 믿음으로 자란다고 했을 때 “무조건 믿습니다”하는 식의 우매한 믿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우스꽝스런 인격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뉴질랜드의 때 묻지 않은 하늘과 강과 산을 보십시오. 작은 들풀 속에 깊이 새겨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그 깊이 있는 아름다움 품격과 무궁한 지혜를 보십시오. 무한이 펼쳐진 밤하늘을 보면서 상상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창조성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고결하고 거룩하고 순수 그 자체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이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그 모든 피조물들에는 하나님의 무궁한 선하심이 그대로 반영 되어있기에 그렇습니다. 특히 인간을 보십시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그 인격을 반영하고 있지만, 특별히 인간을 향해서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겐 무엇이 투사 되어 지어졌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투사 되어 지어졌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성품과 인격이 반영 된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 묻지 않은 “어린 아이”를 보고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합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함과 그 순수함과 그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형상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모습을 적어도 자식에게 만큼은 보여주셨던 “어머니,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그립고 보고픈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은 죄로 인해 모든 인간이 이 모습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형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된 근본 원인인 죄를 십자가로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그리곤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을 깨트리고 다신 사신 것입니다. 이 부활이 갖는 의미는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의미를 꼽는다면 하나는 증거요, 하나는 언약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는 존재, 즉 예수는 참 신이시다는 증거입니다. 또 이제 죄로 망가진 이 세계에 대한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산 증거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예수 안에서 이 세상과 믿는 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완전한 모습으로 완성 될 것임에 대한 언약입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구원의 목표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죄로 망가진 이 세상을 창조시의 그 형상을 회복하되, 그 보다 더 완전한 형상으로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증거요 그 언약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있는 우리를 주 예수께서 부르사 어디로 이끌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그 성품과 그 인격의 회복에로의 구원인 것입니다. 보석으로 치면 투박하고 아무 볼품없는 원석 속에 담겨진 그 빛나는 모습으로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함과 완전함과 순수함과 공의로움과 사랑의 성품으로 빛나는 사람, 이것이 바로 어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본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엡 4:16) “범사에 예수님에게까지 자라라”는 명령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있어서 예수님의 인격의 수준까지 이르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인격이라 했을 때 그 인격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욕하고 조롱하고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인격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용서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찰슨 콜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감옥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세상의 욕망을 좇아가던 삶을 회개하고 예수께 돌아와 예수를 위해 남은 생을 헌신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정치권력의 중심부에서 닉슨 대통령의 굳을 일을 도맡아 일할 때 보다 교회 내부에서 더 많은 험담을 들었습니다.” (The Christian, p144) 누가 그 험담을 했습니다.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다 회개합시다. 비판하고, 흉보고, 미워하고, 화내고, 보복하고, 속이고, 간음하고, 잘난 척하는 쉬운 길, 즉 자신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넓은 길을 버립시다. 대신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닮은 그 아름다운 형상으로 자라나라는 사명에 온전히 헌신합시다. 특히 말에 있어서 예수님의 사랑이 담긴 말이 아니면 하지 않기로 생명을 걸고 결단합시다. 우리를 부르심은 세상이 가지 않는 이 좁은 길로의 부르심입니다. 이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또 다른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은 너무나 가슴 벅찬 사명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진정한 교회가 되는 사명입니다. 잘 아시다 시피 교회는 예수를 믿음으로 죄의 백성에서 하나님의 자녀 부름 받은 자들이 교제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함께 교제하며 빛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함께 자라가는 우리 자신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디에 진정한 교회가 있는가 하고 묻고 찾습니다. 왜요? 교회가 교회다움, 즉 진정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진실로 하나님만 따르는 교회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의 방식대로만 행하는 교회입니다. 진실로 성령 하나님만 따르는 교회입니다. 즉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는 그 길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만 따르는 길을 고수하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만 따르는 진정한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교회를 통하여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빛나는 완전한 형상으로의 회복, 즉 구원이라는 전체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전체 그림은 네 조각으로 구분 됩니다. 첫째는 창조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그 성품과 그 인격이 반영되어 창조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 자체는 선합니다. 둘째는 죄로 타락한 세상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버린 죄로 인해 선한 이 세상이 파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수많은 온갖 악이 파생됩니다. 질병과 죽음과 시기와 미움과 거짓과 속임과 복수와 분열과 싸움과 전쟁이 난무합니다. 이것이 현실 세계입니다. 셋째는 구원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그 결과로 파괴된 이 세상과 인간을 본래의 모습으로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예수를 보내사 시작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구원의 완성입니다. 예수를 통해 시작 된 구원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 완성의 때가 바로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때입니다. 그 때 이 땅의 모든 죄와 악은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무한한 거룩과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과 평화와 감격과 진정한 만족으로 가득한 파라다이스가 이 땅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시작과 구원의 완성이란 이 큰 그림 속에 교회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요? 구원의 시작과 구원의 완성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도 바로 이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교회의 사명이 명확해집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로 시작 된 구원이 완성 될 때가 다가오니 이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입니다. 무섭고 두려운 심판의 때가 다가온다는 그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구원을 시작하셨고, 그 구원이 완성 될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너무나 놀랍고 기쁜 소식을 고통 중에 신음하는 이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대 위임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렇기에 교회는 이 흑암한 세상에 하나님이 세운 등불입니다. 세상의 희망입니다. 세상은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이 계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상이 교회를 보아도 무감각 하고, 이 놀라운 구원의 희망을 전해도 듣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죄의 눈으로 어두워 졌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세상의 풍조가 하나님이 없는 세속으로 치닫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이유는 교회인 우리가 진정 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진정성입니까?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방식대로만 사는 진정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교회라고는 하나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모습에 세상은 실망을 했습니다. 개 교회만 잘 되면 되는 것 인양 개 교회 이기주의 빠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을 향하여 치닫는 교회 속에서 세상은 죽은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세상과 똑 같이 세상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며 치부를 드러내는 모습 속에서 세상 보다 못한 모습을 봅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싸우고 분열하는 모습 속에서 진리라는 것이 허무한 것임을 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성공, 자본, 경영의 논리에 장악 된 모습 속에서 세속의 가치에 오염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교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위대한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교회는 언제나 도시 한 복 판에 세워집니다. 배가 있어야 할 곳은 언제나 바다 한 가운데 이듯이 교회가 있어야 할 곳도 세상 한 가운데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교회가 가장 빛나는 모습이 되는 길은 세상에 동화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선한 하나님의 창조물을 잘 못된 방향으로 사용하는 세상 한 복판에서 본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이용하는 모습에서 섬기는 모습으로, 밟아 누르는 모습에서 낮아지는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부와 권력과 재능과 성을 남용하지 않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실재하시고, 하나님의 길을 따름이 진리이기에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 세상과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자신과 다른 우리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하는 복음이 살아 있는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작가 워커 퍼시는 세상은 “우주에서 길을 잃은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길을 잃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철학도, 이 세상의 그 어떤 첨단 기술도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교회가 영원한 진리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을 예배하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 세상과 다른 진리의 길을 따를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길을 보게 됩니다. 우리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습으로 이 도시을 향해 서 있을 때 사탄은 떨고, 진리가 이 땅을 진동케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이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옥한음 목사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는 부패한 본성이 있다. 옛 자아가 날뛴다. 이것을 죽이고, 못 박는 것이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를 위해 자기의 것을 내 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음으로 오는 고독, 불이익, 핍박을 감수해야 한다.” 또 “자기 부인의 길은 자신을 도려내는 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자기 부인의 길을 가는 사람은 항상 어디에 그 무릎이 꿀려 있습니까? 하나님 앞입니다. 자기를 도려내는 자기 부인의 길은 언제나 하나님의 힘으로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먼저 자신을 도려내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을 욕하고 비난하고 못 박는 사람까지도 품고 갈 수 있는 어른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눈물의 기도 자기를 버리는 기도 없이는 자신을 도려 낼 수 없습니다. “교회가 왜 이레?” 하기 이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 자기를 도려내는 하나님의 수술 대 위에 자신을 먼저 올려놓으십시오. 이것이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부인함은 필연 져야 할 십자가로 귀결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부인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를 따름에 오는 질투 받음, 비난 받음, 오해 받음, 손해 봄, 핍박 받음, 내어 쫒김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다 잃은 다 해도 주님께서 주실 위로와 빛나는 구원의 나라를 보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 모습 속에서 그 교회, 그 성도만이 가지는 스토리가 생깁니다. 모든 사람으로 주목하게는 살아있는 믿음의 스토리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교회가 가진 진정한 힘입니다. 그 스토리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 모습으로 세상에 서 있을 때 “길을 잃은 세상은 진정한 진리의 길” 곧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 그리하여 우리에게 맡겨주신 놀라운 구원의 기쁜 소식이 살아 있는 진리로 빛나게 되는 길은 교회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어른 신앙으로 이 교회를 이루어 갈 때 이 모습 속에서 세상은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이런 교회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