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1(주) 주일예배 본문 마 5:9 제목 우리가 부름 받은 삶의 방향 목적 피스를 만들어 내는 제자가 되라는 주의 부르심을 삶의 목표로 삼도록. 지난 한 주간 우리 키위와 한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진행 되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주간을 지킨 것입니다. 많아야 7명 정도 밖에 안 되는 분들이 모였지만 겸손히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평화를 주시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 땅과 이 사회에, 그리고 함께 고통 받고 있는 이 자연세계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설교도 없고 인쇄 된 평화에 대한 서너 줄의 짧은 멧시지를 돌아가면서 읽었습니다. 더 있다면 평화의 주인 되신 하나님과 평화를 기원하는 찬송가를 시작과 끝에 부른 정도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기도회라고 부를 수도 없는 형식의 모임이었습니다. 평화를 이루어 주시기를 목 놓아 부르짖는 모습은 아예 발견 할 수 없었고, 기도회라고 하면서 정작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다운 기도조차 없었습니다. 기도라고 해야 인쇄된 기도문을 함께 읽는 것이 다 였습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이렇게 기도해서 이 세상에 평화가 올 것 같지 않은데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이렇게 맥없는 기도가 성령께 들릴라나 모르겠다. 오히려 성령께서 ‘아이구 저것도 기도라고 하고 있나’ 하고 핀잔을 하시지 않을까?” 그런데 하루하루 계속 참석하다 보니까 성령께서 서서히 역사 하셨습니다. 인쇄물을 따라 읽는 기도문대로 당장 이루어지는 그런 역사로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참여 하고 있는 우리의 생각, 특히 저의 생각을 바꾸시는 역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미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신앙의 방향이 결국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다시금 일깨움을 얻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셔서 오직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새 삶을 주시는 궁극적 목적을 분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아들 예수를 보내신 궁극적 이유를 다시금 상기케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신앙 하면 나 자신의 구원, 혹은 영혼의 구원을 생각합니다. 예수 믿고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 나아가 죽음 뒤에도 다시 사는 부활과 영생이라는 구원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영혼 구원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고, 전도하고, 선교도 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인적인 구원들이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의 차원에서 생각 할 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경향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주셔서 이루고자 하시는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림을 맞추기 퍼즐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조각난 퍼즐만 보면 이게 어떤 그림이고, 어디에 들어가야 하는지 모릅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그 자체가 너무나 은혜롭고 넘치는 사랑의 역사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런 나의 구원이 하나님이 그리려 하는 전체 그림을 알지 못하면 신앙이 겉돌게 됩니다. 자라지 못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신앙하는 목적이 이 땅에서 평안하게 잘 살기 위해, 이 땅에서 나의 비전을 이루는데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줄 개인의 신이 필요한 기복신앙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여느 유사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차원으로 내려 않는 것입니다. 조금 낫다고 하면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소외된 사람을 섬기는 정도의 선한 삶을 도모하는 정도입니다. 물론 이정도의 삶도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길을 교회가 추구 한다고 했을 때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한 추구가 진정한 사랑에서 나오지 않고, 교회의 선교를 위해, 교회를 알리기 위해, 혹은 교회가 얼마나 의로운 가를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만큼 봉사를 많이 하는 단체도 없는데, 실제로 그 영향력이 미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순수하지 않고 진정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착한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라 하겠지만 사회의 눈으로 볼 때는 진정성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도 포함 되어 있겠지만, 그 보다 더 큰 목적이 선행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봉사단은 10년 전인 지난 2007년 서해안 최악의 기름유출 사고가 발생했던 충남 태안지역 기름제거 작업에 기독교계가 앞장서면서 조직된 단체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너나할 것 없이 전국에서 태안으로 달려가 해안으로 밀려든 기름때를 닦아내면서 하나님 만드신 창조질서 회복에 힘을 쏟았습니다. 나아가 국내 10개 교단 내 상대적으로 젊은 목회자 120명이 의욕적으로 봉사에 나서고 있던 한국교회희망연대와도 통합을 이뤄내며 '섬김 사역'의 단일 기구가 됐습니다. 이 한국교회봉사단이 창립 1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 사회봉사활동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기독교의 사회봉사 활동에 호감을 갖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한다', '활발하게 한다', '헌신적으로 봉사 한다' 등의 순으로 답을 했습니다. 반면 비 호감을 갖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답했습니다. '전도 수단으로 삼아서', '보여주기 식으로 활동해서', '형식적이어서' 등이 주를 이뤘습니다. 즉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천주교회가 아닌 일반교회의 봉사활동에 대해 진정성이 느껴진다고 대답한 사람은 천명 중에 10%에 불과 했습니다. 이 결과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을까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인식이 여전히 교회 성장과 영혼구원에 대한 이해에 멈춰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궁극적인 비전에 비해 너무나 작은 것에 매몰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한 개인의 구원, 개 교회의 성장, 이 땅에서의 성공에 도움이 되는 하나님, 어려움을 이기게 해주시는 하나님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착하게 사는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도 하나님 나라가 온전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즉 한 영혼의 구원을 포함하여 망가진 이 피조세계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악이 멸하고 하나님의 의와 사랑과 기쁨과 평화로 가득한 새 세상으로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완전하게 회복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평화의 세상인 것입니다. 이 아픈 세상을 모든 인간이, 모든 만물이 그토록 원하는 그 평화의 세계로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즉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심은 나 개인의 구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을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더 큰 목적, 곧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평화, 곧 샬롬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 믿음으로 승리하여 죽은 후에는 천국 가는 개인적 구원이 전부가 아니라 이 망가진 세상 전체를 새롭게 하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예수께서 오셔서 시작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부름 받은 삶의 방향도 이 목적에 준하여 새롭게 설정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안에서 부르심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개인적 구원을 넘어,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일에 동참하는 아들로의 부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뜻이 주의 기도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마6:9-10) 무엇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그것을 위해기 기도하고, 그것을 위해 사는 삶이 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님과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그 평화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안에서 감격하고 예배하고 오직 하나님을 붙들기를 구하는 믿음에서 더 나아가야합니다. 우리를 부르심은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일에 동참하는 아들로의 부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사 자녀를 삼으시고, 우리에게 각기 다른 재능과 비전을 주셨지만 그 모든 것들은 다 어디를 향하여 초점이 맞추어 져 있다는 것입니까? 이 땅을 회복시키려는 그 나라, 곧 평화의 나라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일하는 일의 모든 지향점은 하나님 나라, 곧 평화의 나라입니다. 내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내가 공부하고 쌓은 실력을 통하여 일하는 그 곳을 평화의 나라로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심의 방향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개인에 매몰되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나라, 평화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꿈으로의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뜻 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니라” 여기에서 ‘화평하게 자’를 영어 성경은 “Peacemaker” 번역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평화의 다리를 놓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평화의 다리는 놓은 자의 모습을 단순하고도 가장 심오하게 표현하고 있는 시가 있습니다. 바로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입니다.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지난 주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 시간을 시작 할 때, 혹은 끝날 때 꼭 이기도 따라 읽으며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의 삶의 정신과 가치와 뜻이 그대로 담긴 이 위대한 시를 따라 읽을 때 마다 성령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 기도가 목표하는 바를 위해서 살아라” 바로 평화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미움이 있고, 다툼이 있고, 의혹이 있는 곳에 사랑과 용서와 신뢰를 심는 삼은 사는 것입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이 다 고통 하는 이 땅에, 특히 내가 머무는 가정, 일터, 이웃, 이 사회에 주님의 평화를 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을 말씀하시는데 특이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는 힘으로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고 평화를 이끌어 냈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평화가 아니라 힘의 억압에 의해 억지로 죽어지내는 가짜 평화였습니다. 그리고 이 평화를 만들어 낸 로마의 황제 중에 “가이사 아구스도 디베료”(티베리아스 황제)의 호칭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만큼 로마 황제는 자신이 범접 할 수 없는 하나님이 낸 아들이라 함으로써 자신의 위엄과 권위를 하늘에 까지 높였습니다. 그만큼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감히 상것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높디높은 지체라는 것입니다. 결국 로마 황제 자신은 신의 아들과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비유로 하여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십니다. 로마식의 억압과 굴복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미움과 갈등과 다툼이 있는 곳에 진정한 평화의 다리는 놓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때는 별 얘기 아닌 것 같습니다. 2천년 전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는 자는 로마 황제 밖에 없습니다. 만약이 일반 사람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다면 황제를 모욕한 죄로 심한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반인은 그 칭호란 감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 칭호를 “평화의 다리는 놓은 모든 자에게 붙이는 것”입니다. 평화의 다리를 놓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평화의 다리를 놓은 그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실제적 아들이라는 신분적 관계를 표현 하려는 차원보다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인 황제에게나 쓰는 극 존칭을 진정한 평화를 놓은 사람들에게 붙임을 통해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땅에서 위대하다 할 수 있는 진정한 존재는 권력과 높은 학력과 엄청난 부의 파워를 가진 자가 아니라, 아무도 몰라주지만 평화를 심는 화평케 하는 자가 위대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개인의 구원과 이 땅에서의 안정과 죽은 후의 천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우리의 구원의 관을 새롭게 조명하게 합니다. 우리의 구원관이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 어느 곳에 미움과 갈등과 다툼이 있는 곳, 자연이 파괴되어 생물이 신음하는 곳에 평화를 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피스메이커로의 부름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평케 하는 삶, 평화의 다리는 놓은 삶, 즉 평화를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행하는 일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평화의 다리는 놓은 피스메이커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말 그대로 평화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갈등과 미움속에 들어가 화해를 가져오고, 괴로움과 싸움 속에 들어가 그 싸움을 끝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줏대 없이 다 받아주는 나약한 모습의 평화가 아니라,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날이 올 것을 믿으며 찢기고 상한 길을 걸어갈 준비를 갖추고,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여 나가는 길인 것입니다. 문제를 풀어나가고 평화를 유지시키는 길입니다. 이 일을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죄를 담당함으로 시작 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뢰를 심으셨습니다. 하늘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어느 부부가 오랫동안 서로 싸우다가 결국은 이혼을 결정하고 물건을 나누게 됩니다. 살림을 다 나누는데 마지막에 남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몇 년 전 불행하게 죽은 아들의 유품이었습니다. 다 없앤 줄 알았는데 이것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 아들의 일기장이었습니다. 부부는 이것을 서로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다투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일기장을 열어 보았습니다.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아빠 엄마 싸우지 마세요' 부부는 목이 메어 마주 보다가 무심결에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아이의 소원을 이루어 줍시다"하며 다시 화해를 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내려놓은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 화해와 평화의 길이 있습니다. 일본의 동지사 대학의 초대 총장인 '니이지마죠'의 이야기입니다. 한때 그 대학에 분규가 일어났습니다. 교직원과 학생들이 완전히 두 파로 나누어졌습니다. 어느 날 총장님은 교직원들과 전교생을 모았습니다. 총장님은 이번 분규의 총책임자를 엄하게 처벌하겠다고 엄숙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진영은 잘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총장께서 단단히 바로 잡아 주실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총장은 두 진영의 문제자들을 주목하여 엄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팔을 걷어 올렸습니다. 그리곤 굵은 벚꽃 나무 막대기로 자신의 팔을 사정없이 세게 내려쳤습니다. 사정없이 계속해서 내려치는 가운데 막대기는 꺾어지고 팔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모두 총장이 피를 흘리고 있는 앞자리로 나와 엎드렸습니다. 모두 자기들이 잘못했다면서 눈물을 흘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곤 적대관계에 있던 두 진영이 화해를 했고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미움과 다툼과 분열과 상처가 있는 곳에 평화를 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승리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루어지는 평화의 길입니다. 주님이 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평화를 심는 피스메이커의 삶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