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4(주) 주일예배 본문 행 3:1-10 제목 예수의 능력과 영광에 사로잡힌 교회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했기를 바라며 몰래 교회당 안으로 들어온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교회의 예배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였습니다. 성가대에 있는 한 여자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면 그녀를 만날 수 도 있고 끝날 때 데이드 신청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사람들이 들어가서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따라 했습니다. 예배가 막 시작 되는데 자리를 안내하는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실례합니다. 오늘 성경봉독을 해야 하는데 할 사람이 안 왔어요. 대신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젊은이는 깜짝 놀라 잠시 멍했지만 재빨리 머리를 굴렸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저기 성가대에 있다. 예배 시간에 자신이 성경을 봉독하면 그 여자가 깊은 인상을 받지 않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그는 성경을 받아들고 안내인이 가리키는 부분을 눈으로 훑어보았습니다. 이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단으로 올라가 성경을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의 본문이었는데, 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문으로 양 우리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길로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다” 그는 소르라치게 놀랐습니다. 자신이 바로 그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단에 서서 성경을 봉독하는 사람 행세를 하고 있지만, 실은 그는 여자를 만나러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하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계속해서 읽어내려갔습니다. 자신이 거짓으로 꾸미고 들어온 강도라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양의 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은 그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러 온다. 나는 그들이 생명을 얻고 하려고, 풍성하게 얻게 하려고 왔다” 갑자기 이 젊은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에 대해서도, 회중에 대해서도 자신이 이제 막 터무니 없고 위선적인 일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는 적잖이 놀랄 회중을 의식하지 못한 채,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를 향해 물었습니다. “이게 사실입니까” 정말로 우리가 진짜 생명, 풍성한 생명을 하려고 그분이 오셨습니까?“ 목사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는 예배 시간의 이 돌발 행동에 당황하지 않은 기색이었습니다. “물론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 찬송가를 부르면서 그 노래가 진실로 느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봅시다.” 그 젊은이는 예수님의 임재와 사랑에 휩싸여버렸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채우고 변화시키는 것을 느꼈고, 낮에는 푸른 초장으로 밤에는 안전한 쉼터로 이끌어 주는 목자를 감사히 따르는 양처럼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교회 예배에서 자신이 바라던 이상을 얻었습니다.](톰 라이트, 에브리원주석, 마태복음, p79-81) 오늘 본문에도 이와 같이 자기가 구하던 이상을 얻은 비슷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입구에 놓여져 구걸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걸을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이 데려다 놓고, 저녁이 되면 다시 데려가야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지는 아니지만 걸을 수 없어 평생을 동냥으로 빌어먹고 사는 딱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모습을 봅니다. 첫째,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다. 그는 늘 보아 왔던 거지였기 때문이다. 즉 주목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세상에서 주목 받지 못하는 사람, 곧 세상적으로 볼 때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약하고, 무능하고, 경제적 효용성이 없는 사람을 대변한다. 이 사람을 주목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이 사람의 처지를 개선 해 줄 어떤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체념 속에 살아가는 자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여 마지못해 사는 사람이다. 당시에는 그 어떤 의술로도 이 사람을 일으킬 수 없다. 그것은 사회도 알고 본인은 더 잘 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처지에 주저앉아 있다. 그래서 희망이란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 중에 특별한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만나 그나마 후한 동냥을 얻는 것이다. 더 낳은 삶에 대한 동경은 있을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며 산다. 마지못해 사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 주저앉아 더 낳은 꿈을 꾸지 못하는 사람을 대변한다. 자신 안에 숨겨진 놀라운 이상을 보지 못하고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속 안에는 응어리진 한이 있습니다. 자기를 가두고 있는 그 절망에서 벗어나기를 그 누구보다 염원하고 염원하는 울부짖음이 그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도, 그 부모도, 그 어느 누고도 그 한 맺힌 울부짖음에서 구해줄 수 없습니다. 그는 체념하고 있었지만 실은 그 시대에 가장 메시야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이날도 그는 이 한 맺힌 마음으로 앉아 동냥을 합니다. 자신의 무가치한 모습과 수치스런 처지로 인해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애써 피하며 발치만을 보고 동정을 구합니다. 베드로가 또 요한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동냥을 구합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과 달이 베드로가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보라” 말하였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 걷지 못하는 자는 그저 무엇을 주려고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베드로는 주님의 마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겠다. 나사렛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리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의 발과 발목이 즉시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곤 놀랍게도 선채로 뛰었고 걸었습니다. 평생을 앉아 무가치함과 체념 속에 앉아 있던 뛰고 걷게 된 것입니다. 그는 기뻐 놀라 어쩔줄을 몰라 뛰면 성전에 함께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무가치함과 체념의 한 속에 평생을 동냥하며 살아야 할 이 사람에 예수 이름의 능력이 임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목 받지 못하던 인생이 모든 사람의 눈을 주목하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걸을 수 없어 평생을 성전 입구에 앉아 동냥하던 사람이 일어나 걸으며 뛰니 다들 놀라 그를 주목한 것입니다. 얼마나 그들이 놀랐으면 성경은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하고 표현을 할 정도입니다. 이로인하여 놀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일을 한 것으로 보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갑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런 일은 우리 자신의 경건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말합니다. 그리곤 “너희가 죽인 예수가 부활했고 그 일에 우리가 증인이다.”라고 증거합니다. 아울러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 같이 낮게 하였다”라고 증거합니다. 결국 이들은 이 같은 베드로의 증언, 예수의 복음을 듣습니다. 그리곤 이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 수많은 자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4:4절에서 그 숫자가 무려 5천이나 되었다고 기록할 정도입니다. 평생 앉아 구걸이나 해야 했던 사람에게 예수 이름의 능력이 임하자 그 얽어맨 불구의 사슬, 체념의 사슬, 무가치 함의 사슬 눈물로 가득한 한의 사슬이 벗겨졌습니다. 나아가 수천의 무리로 하여금 복음을 향하게 하는 놀라운 인생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 가지 이유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가 메시야,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얽어맨 모든 것을 자유케 하는 능력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거기에 전지전능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모든 얽매인 것에서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임합니다. 여러분을 가두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경제문제입니까? 진로입니까? 미움입니까? 상처입니까? 의심입니까? 두려움입니까? 낙심된 마음입니까? 드러날까 두려운 죄입니까? 어떤 눈물이 아픔이 마음속에 있습니까? 요즘 점심을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점심을 먹지 않고 그 시간에 기도를 합니다. 어제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주님, 우리 교회가 주의 능력과 영광에 사로잡히는 교회가”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지금 옆에서 저를 보고 계시고, 다 듣고 계시는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하면서 기도를 시작 하였습니다. 그러자 곧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제게 뜨거운 기도를 불러일으키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을 찬양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의 권능과 존귀하심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높여 찬양케 하셨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었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사로잡혀 온몸이 춤을 추듯 퉁퉁 튀며 찬양을 했습니다. 제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완전한 감사와 찬양으로 기뻐 찬양했습니다. 모든 것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 모든 존재하는 것의 이유와 목적이 되신 하나님,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권능의 하나님, 모든 만물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셔야 할 유일하신 하나님, 모든 존재의 숭고함과 위대함을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는 거룩심과 존귀하신 하나님 모든 존재와 자격 없는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를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 나아가 우리 모든 믿는 자의 올음과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또 돌리고 또 돌렸습니다. 이렇게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계속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제게 마음으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은혜와 영광 안에 거하게 하려고 예수를 주었다. 이 은혜와 영광 안에 거하게 하려고 너를 불렀다. 이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자가 내게 이르기를 원하노라. 내가 저의 모든 얽매인 것을 풀어 자유케 하리라“ 할렐루야! 오늘 본문에 일어난 걷지 못하는 자는 예수의 능력으로 살지 못하는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나 율법주의에 얽매여 형식과 위선으로 살아가는 무기력한 이 시대의 교회들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너희를 자유케 할 능력이 있다. 너희를 일으킬 능력이 있다. 너희 모든 상처와 아픔을 싸매어 낳게 할 능력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씁니다.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거하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2018년 예수 이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 안에 있는 능력, 나를 얽매고 있는 모든 것에서 자유케 하는 능력을 경험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그 자유케 하는 능력에 날마다 사로잡혀 사는 성도,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특히 주일 예배 때 이 은혜가 임하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오늘 예배와 말씀 가운데 주의 이 은혜를 부어주소서” 짦더라도 온 마음을 다해 이 기도를 드릴 때 주께서 그 중심을 보시고 역사 하실 것입니다. 주 예수 앞에 나아가 이를 놓고 기도하여 간구 할 때 함께 나아갈 때 이 놀라운 능력, 곧 자유케 하는 능력에 우리가 교회가 사로잡히는 역사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전혀 새로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