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18(주) 주일예배 본문 히브리서 4:12-16 제목 예수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나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최대 관심사는 미국의 칼루이스와 캐나다 벤 존슨의 100m 대결이었습니다. 6만 관중이 운집한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100m 출발 총성이 울렸습니다. 폭발적인 스퍼트로 초반부터 치고 나간 벤 존슨은 한 번도 선두를 빼앗기지 않았고 9초 79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지구역사 이래 가장 빠른 올림픽 영웅으로 등극했습니다. 하지만 벤 존슨의 화려한 무대는 ‘3일 천하’로 끝났습니다. 사흘 뒤에 시행한 도핑 검사에서 금지약물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금메달을 박탈당했고, 2년간 국제대회 출전을 금지 당했습니다. 또 캐나다의 명예를 더럽혔다 하여 하루아침에 영웅에서도 파렴치한 인간으로 전락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죄를 도핑테스트 한다면 죄가 걸릴까요? 안걸립니다. 도핑 테스트가 제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 해도 사람의 마음과 죄를 인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도핑테스트 해서 걸리지 않으면 누구나 다 하나님 나라를 받고,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누구나 다 가능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과 그 죄를 테스트하는 하나님의 도구는 도핑 테스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을 비롯해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모든 말씀들이 판단의 도구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렸을 땐 아버지, 어머니의 말씀이 잘잘 못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 말씀에 맞으면 거리낌이 없지만, 말씀을 어기면 여지없이 혼날 무서움을 느낍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말씀이 우리 속을 살피고 파고들어 잘못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피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말씀은 형체가 없지만 귀에 들려 뇌에 전달됩니다. 뇌에 전달 된 말씀은 우리의 양심과 마음의 내면을 파고듭니다. 심지어 잊혔던 옛 내면의 모습까지 예리하게 드러나게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숨겨둔 마음의 동기와 생각까지 테스트합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 영,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선수들이 도핑 테스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듯이, 모든 인간은 이 말씀의 테스트에서 피할 길이 없습니다. 결국 12-13절의 논점은 “너는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7:20-23) 이 말씀이 우리를, 이 시대를 고발 합니다. “네 안에 이 모습이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이 예리한 판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 진노의 자녀로서 심판을 받아야만 할 죄인입니다. 우리는 빠져 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그리고 우리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죄를 예리하게 심판하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 곧 외아들 예수를 왜 주셨다고 말씀합니까?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멸망이란 하나님과 단절 된 채, 자신이 되어 질 모습을 영원히 잃어버린 고통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창조 시에 의도 된 본래의 나의 모습, 즉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과 형상을 회복하여,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창조하사 우리에게 주시려는 진정한 삶입니다. 2. 바로 이러한 진정한 삶을 주시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말씀의 테스트에서 벗어날 존재가 아무도 없기에 하나님과 같으신 예수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는 속죄의 제물이 되어 우리 모두의 죄 값을 치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삼일 째 되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다가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성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14절에 기록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는 말씀입니다. 승천에 대해서는 다른 날에 보다 자세히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기에 오늘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승천이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뜻입니다. 이 기록은 사도행전 1:9-10절에 있습니다. “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그리고 이 말씀 다음 구절에서는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하늘로 올려지셨다는 뜻은 예수님이 갑자기 우주인 되어서 궤도 밖으로 나간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달 너머, 화성 너머든 그 어디를 향해 가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간’, 하나님의 차원으로 들어가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태초 이전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즉 이땅에 오시기전에 계셨던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에브리원주석, 행, p33) 성부 하나님과 함께 가지고 계셨던 영광의 자리와 세계로 복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에서의 “하늘”, 사도행전의 “하늘”, 그리고 오늘본문 14절의 “승천”에서의 하늘은 바로 성부와 성자가 계시는 하나님의 공간, 하나님의 차원을 말합니다. 우주 어느 구석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승천하셨다는 말은 단지 어떤 장소, 공간상의 이동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서의 권위와 권세와 영광을 다시 취하셨음을 말합니다. 그러한 표현이 에베소서 1:20-22절의 표현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으니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그 험악한 십자가에 못 박혀 초라하고 비참하게 죽임 당했으나, 그는 부활했고, 성부 하나님이 계신 영광의 자리, 곧 하나님의 아들 되는 영광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즉 만유의 창조자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함께 계심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표현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은 “모든 만물 보다 높은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공간, 하나님 차원의 세계에 계십니다. 3. 그러면 이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같은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하나님의 차원의 세계에서 무엇을 하실까요? Great High Priest, 즉 대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1년 한 번 이스라엘 달력으로 7월 10일, 대속죄일에 성전의 안쪽 방인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때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죄인 된 백성 사이에 서서 지성소에 들어가 거룩한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 속죄를 구합니다. 이로서 자신과 가족과 백성의 모든 죄를 용서 받게 됩니다. 그 일을 죄인을 위해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서서 중재역할을 한 것이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4. 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 할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 서서 죄를 중재하는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대제사장과 예수님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죄 있는 사람으로 짐승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매년 이 제사를 반복해서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는 자신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로서 단번에 인간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단번에!(히10:23-28) 그렇기에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을 견고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이 믿음만이 죄를 씻고 내가 되어져야 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진정한 인생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자녀들이 되어져야 할 진정한 사람이 되는 구원의 길도 예수께만 있기에 예수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5.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대제사장 역할 만을 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하늘, 곧 하나님 공간, 성경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의 역할 수행하십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우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보증하는 역할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법정을 생각해보십시오. 재판관이 있고, 그 앞에 판결을 받아야 할 죄인이 서 있습니다. 그 재판관은 좌우에 치우치지 않고 정확하게 죄에 대한 판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죄인으로 서 있는 피고는 자신의 무죄를 스스로 입증할 힘이 없습니다. 또 실제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니 감히 재판관 앞에서 고개를 들 여력이 없습니다. 지은 죄를 깨달으며 그져 지난 자신의 모습 아파하며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그러나 비록 죄를 지었지만 이 딱한 피고인의 처지와 그 마음을 잘 알고 깊이 헤아려 주는 변호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변호를 합니다. 모두 다 이 피고를 욕하지만 이 변호인만은 피고의 그 마음 깊은 곳의 진실함을 알고 피고와 재판관 사이에 서서 이 사람을 긍휼이 여겨주기를 눈물 흘려 생명을 다해 변호를 합니다. 마치 이처럼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과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는 우리 사이에 주님이 계십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의 변호인, 중보자,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의 피로 씻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증하시고, 우리를 긍휼이 여겨주시기를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목숨까지 주신 그 사랑으로! 6.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15절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 말씀에서 동정하다(sσυμρσΘεο)라는 단어는 다른 사람과 같이 똑 같이 느끼고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우리와 똑 같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피곤함과 배고픔과 육체의 아픔과 유혹과 영혼의 고뇌를 그대로 다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유혹 당하고, 실패하고, 배신당하고, 눈물 흘릴 때의 그 처지와 깊은 고뇌가 무엇인지를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그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긍휼이 여겨주십니다. 우리의 처지에서 성부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십니다. 뉴질랜드에 살다보니 싱싱한 꽃게와 해물이 가득한 얼큰한 해물탕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어디 음식뿐이겠습니까? 못 배웠어도 손주들을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더 위해주시려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그 깊은 손길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어렸을 때 맡았던 어머니의 푸근한 가슴과 향기가 그리울 때가 있고, 아버지의 말없는 깊은 사랑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뉴질랜드의 맑은 가을을 문득 문득 바라 볼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코끝이 달아오르며 “이제 나는 고아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나이 먹은 어른이 왠 고아 타령일까 하시겠지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이 이젠 아무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들 때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제 마음을 주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한 없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저를 바라보시고 맞아주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저를 사랑하시는 무한한 자비의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와 성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흘러나와 넘치는 위로를 덧입습니다. 저의 처지를 헤아려 주시는 예수님의 그 깊은 사랑, 예수 안에서 나를 품어주시는 성부 하나님의 그 깊은 은혜가 제 마음과 영혼을 소생케 하십니다. 때마다 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주 예수께서 승천하여, 하나님의 공간, 하나님 차원의 세계에 계시다고 말씀드렸지만, 그것이 어디 저 먼 심연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계신 곳은 우리가 있는 이 현실세계와 하나로 연결 되어 있어서 눈을 감으면 바로 거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 됩니다. 7. 저는 우리 교우 분들께서 이 놀라운 신비를 알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니 저보다 하나님이더 간절히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 말씀대로 날마다 하나님과 예수께서 계신 성소에 들어갈 특권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보좌 앞에 서는 것입니다. 나의 때에 맞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흘러나오는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 잠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고민 하는 문제가 풀립니다. 예수님을 믿고, 눈을 감고 하나님을 부르면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깊이 헤아려 품어주시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 은혜로 사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서기 위해서 가져야 할 중요한 습관이 있습니다.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위하여 은혜가 항상 흐르는 예수님과 하나님에 나아가는 거룩한 습관, 즉 기도의 습관입니다. 골프의 맛을 아는 사람은 늘 골프 칠 기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맛을 아는 사람은 늘 기도할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나를 살리고, 아내와 자녀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알고 누리며 사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신앙의 길을 가려는 자는 기도하는 습관을 호흡하듯이 가져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기도하지 않는 다는 것은 때에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해나가겠다는 것인데, 이는 오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8. 예수님께도 기회를 만들어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마가복음 1:35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셨던 예수님께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벽에 자신을 쳐 깨워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D.L. Moody는 “매일 아침 사람의 얼굴을 보기 전에 하나님의 얼굴을 봐야 합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뜻하신 것보다 일에 더 치중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마틴 루터는 “제단사의 일을 옷을 만드는 것이고, 구두 수선공의 일을 구두를 고치는 것이듯이 그리스도인의 일은 기도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 남자 성도님들, 기도하는 아버지, 기도하는 남편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어깨는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질 때만 바르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가장이 됩니다. 여자 성도님들, 기도하는 어머니, 기도하는 아내가 되십시오. 그 기도가 남편을 살리고, 자식을 살립니다. 새벽에 혹은 가능한 시간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의 습관을 기르십시오. 이것이 가장 큰 재산이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한복음 1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