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27(주)부활주일
본문 고전 15: 19-26
제목 영원한 삶의 위대한 증거-부활의 예수
오늘은 2천년 전 예수께서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을 생생히 목격했습니다.
동시에 다시 부활하신 예수 또한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그 목격한 내용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극렬하게 반대했던 바울도 예수를 만난 후
부활을 그의 서신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역사서인 사도행전, 수석제자인 베드로가 쓴 베드로서신, 기자를 알 수 없는 히브리서 또한 예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히13:20).
신약성경의 맨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도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계1:5,18)
이처럼 신약성경의 대부분의 책들은 다 예수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거나, 그것을 전제로 하여 쓰여졌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실재였기에 사도들은 가는 곳마다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생명을 걸고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부활하신 예수가 참 구세주 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증거를 듣고 예수를 믿을 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참 구주요 하나님이심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아시아, 로마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아시아에 까지 세워졌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새 이 천년 전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그 옛날에
그런 일이 일어났나 하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도 그 증거를 들이대어 설명하기가 어려우니 한
쪽 마음 구석에서는 왠지 찜찜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아예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가 아내가 있었다는 고대 문서를 증거로 제시하며 예수는 신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2012년 하버드 신학대학원 캐런 킹 교수가 가로 7.6cm, 세로
3.8cm 크기의 파피루스 조각을 공개합니다.
그 조각 앞 뒤에는 각각 8줄, 6줄로 콥트어가 기록 되어있습니다. 콥트어는 이집트어로 AD8세기경까지 쓰여진 언어입니다. 킹 교수는 이 것을 공개하면 원래 AD2세기에 쓰인 그리스어 문서를 곱트어로 번역한 4세기 문서로 추정 된다고 논문에 발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글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아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당시 다빈치 코드에서 예수가 마리아와 결혼 해서 후손을 남겼다는 말과 어울려져서 예수 믿는 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 캠브리지 대가 발행하는 성서학 권위지 “신약학(New
Taetament Studies)은 제61권 제2호에서 '예수 아내의 복음서'라고 통칭돼 온 파피루스 조각이 현대에 위조됐다는 내용을 포함한 논문 6편과 논란을 설명하는
사설 1편을 실었습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위조 된 증거를 제시 하는데
결정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그 파피루스에
적힌 콥트어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2002년 콥트어 로 된 “도마복음”을 어떤 홈페이지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 파피루스에 적힌 글이 그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것과 똑 같았습니다. 심지어 인터넷에
올리면서 실수한 부분까지 그 파피루스의 글이 정확하게 일치하였습니다. 이는
위조자가 잘못된 인터넷 자료를 보고 이를 그대로 베꼈다는 얘기입니다.
또 한가지 결정적 위조
증거가 있습니다. 하버드대에 이 문서가 전달 된 그 자료에 한스-울리히 라우캄프라는 사람이 이 문서를 1963년 동독 포츠담에서 구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확인 해보니
당시 서독에 살았던 라우캄프는 일생 동안 단 한번도 동독을 찾은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본인도 모르게 조작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웃지 못할 어처구니 없는 위조사실들로 인하여 고대문서
전문가들은 합리적 의심 없이 이 파피루스가 위조문서임을 판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저명한 하버드, 우리는 하버드 하면 껌뻑 죽는데, 그런 저명한 대학의 신약학 전문가인 킹교수가 그것이 위조 된지를 모르고 발표 했을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이에 대해 학계에선 그가 초기 기독교의 전문가 이긴 하지만, 콥트어 고문서 고증에는 전문가가 아니어 속았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위조 문서를 만들었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반대자들에 의해 그 역사적 실재성에 대해 공격 당해 왔습니다.
로마사의 저자이며 옥스퍼드대학의 역사학과 주임교수로 봉직했던 토마스 아놀드 교수는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증거를 내 보일 수 있다.
나는 역사학자로서 여러 해 동안 다른 시대에 대해서 연구하고 저자와 기록들의 증거를 고찰해 보았다. 그 모든 것들 가운데서 예수께서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보다 더 완전히 증명될 수 있는 사실들이 인류역사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경의 증거하는 부활의 증거는 가장 완전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학자들도 인정하는 이 성경에서 뭐라 말하는 지 오늘 본문 말씀을 볼까요?
우선 바울이 누구인지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정통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요 율법에 정통하였으며 예수 믿는 자들을 가장 앞장서서 핍박했던 사람이요 죽이는 데도 앞장 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똑 같은 일을 하러 가다가 현재 다마스커스라 불리는 “다메섹”의 한 곧은 도로 상에서 갑자기 빛에 둘러 싸이며 예수를 만납니다.
그 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 하는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 그리곤 3일 간 눈이 멀고 식음전폐하고 지낼 때 예수께서 아나니야를 보내 눈을 뜨게 합니다. 그리고 즉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곤 그 이후 인생은 180도 달라져 오직 예수를 위한 인생의 길을 갑니다.
십자가의 예수가 사이비가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부활하신 구원의 주와 하나님이심”을 생명 다해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자기에 일어난 일들을 다른 걸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생생한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쓴 서신 중 13편의 서신이 성서로 남아서 오늘 우리의 손에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 돌아가신 후 겨우 30년 도 채 안되어 기록한 서신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의 서신임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이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뢰할 만한 생생한 경험에 의해, 그리고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울의 기록이라는 이 서신들
중,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증언합니다.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난 첫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얘기를 합니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자 이 두 구절에서 어떤 점이 우리와 중요한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의 죽음과 삶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인간의 영적 육체적 죽음은 한 사람 아담에 의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의 대표인 한 사람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한 죄로 인하여 모든 그 이후의 인간이 다 죄인이 되었고 죽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어떤 죄인입니까? 아담을 닮아 “마음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즉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죄를 가진 인간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을 버린 존재로 태어납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얼마나 예쁘고 순수해 보입니까? 그러나 그런 순수한 아이 조차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마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라면서 그 본 성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냥 놔두면 놔둘수록 점점 더 하나님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살아갑니다. 하나님 아무 상관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죽은 것이라 합니다. 죄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그 어떤 합당한 반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모두는 다 죄로 죽어서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어떻습니까? 불교식으로 하자면 “태어나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일구어 논 세상이 자체가 불합리하고 불공평하고 부정의하며 시기와
싸움과 배반과 탐욕이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뉴질랜드가 전 세계에서 가장 공정한 나라라고 합니다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고약한 자동차 정비소에 들어가면 동양인이라고 엄청 바가지를 씌웁니다. 동양인이요 말 끼 제대로 못 알아 듣는다고 속으로 왠 떡이냐 속여 먹습니다.
심지어 같은 한국인들이 서로를 속여 먼 타향 땅에서 한 맺힌 눈물을 흘리게 하는 악한 짓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요? 마음이 죄에 물들어 자기 탐욕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또 선한 길을 간다
하지만 그 마음에 소망이 없습니다. 왜요?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 가는 길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나마 양심적인 사람들이 종교를 구하고 도를 닥지 않습니까?
선한 행위를 통해서 죄를 보상하려고 덕을 쌓지 않습니까?
얼마 전 자이나교에 대한 영상을 관심 있게 본적이 있습니다. 알몸으로 수련하는 종파였는데, 자이나교의 최고 높은 수련에 도달한 분이 걸어서 맨몸과 맨발로
인도의 그 뜨거운 도로를 걸어서 제자들과 함께 수행을 합니다. 그럴 때 지역마다 자이나교를 따르는 신자들이
나와 열열히 환영을 합니다. 맨몸이지만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반 갚게 맞이합니다. 신도들은 틈이 나는 대로 축복을 받으려고 갖은 애를 써서 그 앞에 나가 머리를 숙이고 복을 구합니다.
그럴 때 그 최고 높은 분이 널직한 솔을 들고 한 마디를 합니다. “다음에는 다시 태어나지 말라” 모름지기 최고의 축복인 것 같습니다. 다시는 “이 고통 하는 인생 사에 발을 들여놓지 말고 해탈하라는
축복” 입니다. 이들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영이 있다고 보고
모든 공기 물 음식에서 살아 있는 그 어떤 보이지 않는 미생물일지라도 실수로 먹지 안기 위해 온 힘을 쏟았습니다. 먹었다가는 다시 고난의 인생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 물을 마실 때에도 우물에서
깃는 물에 살아 있는 어떤 생물이 있을지 모른다고 물을 따를 때 천에다 물을 거르고 난 물 만 마시고, 천에는
혹시 생물이 있을지 모른다고 다시 우물에 털어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정성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지역마다 사람들이 손에 음식을 주면 서서 먹습니다. 앉아서 먹으면 나태해진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그 음식에 혹시 작은 벌레 미생물이라도 있을까 바 일일이 음식을 헤쳐가며 먹었습니다. 제가 인도에 가서 본 바로는 이들은 잎에 마스크 같은 것을 쓰고 다닙니다. 혹시 숨쉬다가 영이
있는 생물을 들이키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 문명 사회에서 벌거벗고 다니며 그 정성을 쏟는
이 열심을 누가 따라 갈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그 어떤 종교도 따라 할 수 없는 지극한 정성의 모습을 가지고 그렇게 한들 이들이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요? 인생의 번뇌는 죄의 문제요, 죄의 본질은 자신의 창조자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그 죄가 진정한 해탈에 이르는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고통이요 번뇌요 아픔이요 외로움이요 슬픔과 한이요 무의미요 불행인 것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이르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대표인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죽음이 인생을 덮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태어나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무의미입니다.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은혜와 단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뭐라 말했습니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듯이,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인하여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즉 예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첫 사람이요, 이 한 사람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부활을 얻게 될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원리가 성립하는 것일까요? 아담이 인류의 대표였듯이, 예수 또한 인류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죄를 지어 그 영향력이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한 대표요, 예수는 죽음으로 죄를 다 해결하고 부활하심으로서 살려주는 대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으면, 즉 예수가 정말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의 주와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는 예수님처럼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울은 지금 인간의 죽음의 문제가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완전히
해결 되었다라고 엄청난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으로 인하여 영적 육적 죽음에 이르게 된 인간이, 예수 안에서
죄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더 큰 중요한 문제, 즉 죽음이란 절망이
해결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는 사람에 관한 사건이 나옵니다.
그가 병이 들어 그만 죽습니다.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었던 마리아,
예수님이 오시면 맛있는 만들어 대접하던 마르다의 오빠가 죽은 것입니다. 두 자매에게
큰 슬픔과 아픔이 들이 닥쳤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아시고 베다니 나사로의 집으로 향하여 가시다가 마을 어귀에서 마르다를 만나고, 마리아를 오라하여 만납니다. 그 때 마리아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슬프게 울었습니다.
얼마나 그 울음이 슬프고 처량했던지 그와 함께 나왔던 다른 사람들도 다 슬프게 웁니다.
죽음이란 아픈 것입니다. 인생의 사연이 많은 중에 그 삶이 피어보지 못하고 죽을
때 그 죽음처럼 아프고 슬픈 죽음은 없습니다. 설령 이 땅에서 복을 누리고 살았다 해도 죽음은 슬픔이요 어둠입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싫고 두려운 일입니다.
카톨릭대 생명대학원
구은회 교수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관찰한 죽음의 겉모습과 죽음이 남기는 상실감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남들의
죽음을 통해 죽음은 아픔이요 슬픔이요 모든 것을 잃음이요 절망임을 경험합니다. 더구나 많은 죄가 있음에도
그 죄가 해결 되지 못했을 때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더욱 크고 깊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인간에겐 깊은 슬픔과 아픔과 절망과 공포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뭐라 선포하고 있습니까? 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는 부활이 예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첫 열매가 된 것 같이,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 다시 사는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한 번 사는 것도 힘든데 두 번 살아서 또 고생해, 나는 안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몰라서 그렇지 알고 나면 달라질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 다시 사는 부활을 얻는 다는 것은 현재와 똑 같은 이 세상에 이 모습대로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덧입을 부활은 믿음으로 승리한 자들에게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저는 이번 고난 주간을 기도하며 묵상하며 지날 때 그 어느 때 보다 “부활의 영광"이 제게 주어진다는 사실에 깊은 깨달음과 감동에 사로잡혔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 할 때 주 예수께서 죽으신 이유가 단지 죄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주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설교 중 주로 죄에서의 자유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깊이 깨달은 것은 예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것은 죄를 씻음을 통해 정말 우리에게
주시려 하는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과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단절 된데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죄를 해결하여 의롭게 될 때 거룩하신 하나님과 연결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죽음은 죄를 해결하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더 높은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목적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단절 되어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은혜와 사랑이신 하나님과 연결 되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인도하심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인생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감사와 기쁨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어,
아버지의 그 무한한 사랑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은혜를 누리는 복을 주시려는 것이 십자가를 진 더 높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요한복음에서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했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권능과 성자 예수까지 내어 주시는 그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모든 은택을 누릴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두 딸이 대통령을 아버지로 둔 복으로 인하여 대통령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대통령인 아버지가 사용 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가지고 사랑으로 돌봄을 받습니다. 우리 평생 가보기도 힘들고 대면하기도 어려운 백악관에서 날마다 세계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대통령을 매일 만나고 그 사랑과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대통령의 딸이요, 대통령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 조차 지혜와 도움을 구하며 무릎꿇는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요, 우린 그의 아들, 딸이라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 성자 예수를 주시기까지 하는 너무나 깊고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아버지요,
우리를 그 권능과 사랑의 하나님을 매일 만나 모든 것을
요청하고 도움 받고 사랑 받는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아픔이 있고 어려운 일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 권능으로 이 사랑으로 아들이요 딸인 나를
변함없이 최선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고 따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힘입어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우야!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앞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부활의 영광입니다.
이 땅에서 믿음으로 승리한다 하지만 불완전합니다. 우리 자체가 불완전하고, 이를 틈타 늘 사람과 사탄의 시험이 다가오는 영적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결국에는 믿음의 성도가 이긴다 하나 거기에는 언제나 아픔과 눈물이 동반 됩니다.
싸움을 항상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라면 인생은 싸우다
마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 부활이 그것이 다가 아님을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은 죄를 씻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승리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 피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승리한 자녀들에게 영원한 승리의 나라를 주시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계시록에 의하면 승리한 자들에게 부활과 함께 주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땅에서의 싸움으로 피흘리며 눈물 흘리며 멸시와 조롱을 받던 성도의 삶이 그치고,
하나님이 친히 계셔서 성도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심으로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새 삶을 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위로와 사랑을 받으며 우리 모든 아픈 것이 떠나고 오직 완전한 감사와 기쁨과 영광으로 충만한 무한한
복락을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상상을 해봅니다. 제가 이렇게 다시 부활하여 새하늘과 새 땅을 밟고 하나님과
함께 거할 때를 생각해봅니다. 저는 날마다 저를 위해 그 모진 수고를 아끼지 않고 생명까지 주신 예수님과
그 사랑의 은혜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으로 인하여 감격하고 감격할 것입니다. 또 성부 하나님의 그 무한한 사랑과
권능의 영광으로 인하여 저는 완전한 기쁨과 완전한 만족과 영광으로 충만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와 싸움과 눈물을 보상하고도 남을 천배 만배 억만배의 기쁨과 만족과 영광에 싸여 저는 무한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날마다 돌리고
또 돌리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바로 이 궁극적 복락을 주시려 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씻어 자유한 영혼의 감격을
경험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곧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가지고 승리하는 감사와 인생이
되는 것이요, 더 나아가 믿음의 자녀들에게 예비된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복락의 만복을 누리는 영생의 삶이라는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울이 지금 예수 부활
안에서 이 복이 믿는 자들에 열려 있음을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이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그러나 죽음을 넘어 깨트리고 부활하사 이 삶이 믿는 자들에 열려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위대한 증거입니다.
그러니 이 복을 예수
안에서 누리십시요.
이 복을 믿지 않는
가족들, 이웃들에게 반드시 나누어 알려 주십시요.
영원한 나라가 있음을
믿고 영적 싸움의 길을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가십시요.
주께서 부활하신 그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반드시 주실 것이요.
그날이 반드시 다가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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