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꿈은 모든 영혼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로 모셔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와 치유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이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십자가의 꿈을 위해서 세움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헤밀턴을 맡기셨습니다. 실로 가슴벅찬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때와 시는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지난 주 말씀과 같이 헤밀턴을 우리에게 주었노라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깨어 기도하며, 그 약속을 이루시기까지 우리와 함께 계서서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도전하되, 말씀 안에서 벗어나지 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바른 길을 갈 때 그 언약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에 우리 성도님들께서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인교회는 이민자의 애환을 위로하는 사명을 넘어, 이 헤밀턴의 영혼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꼭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깨어 있으라 함은 성공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신실함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이는 세상의 수단과 하나님의 방법 사이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언제나 숫자나 효과 혹은 결과로 성공을 판단하는 세상적인 기준과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한 믿음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과 싸움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효과와 결과를 놓고 세상적인 방법을 택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신실함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방법을 택할 것인가?
사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주제를 봐라. 너희가 몇 명이나 된다고 까부냐.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뭘 한다고 그래! ’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에게 희망이 더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약할 때가 더 강한 하나님의 역사가 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세를 과시함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약함에도 불구하고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그것을 우리게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자 하나님께서 이방의 나라들을 통해 징계를 합니다. 미디안 이라는 요단강 동편 지역에 사는 족속이 아말렉 사람과 아랍사람들과 더불어 가나안 땅을 침입해 들어옵니다. 이로 인해 가나안 땅이 짓밟히고 이스라엘 민족은 산으로 도망하여 몰래 몰래 숨어서 지낼 정도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예 가나안 땅 이스라엘 민족을 멸하려 합니다. 이에 백성이 부르짖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기드온 이라는 신실한 사람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막내요 겸손했던 기드온은 거절합니다. 하지만 이 명령을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아버지가 섬기는 바알의 단을 깨트려 버립니다. 대신 하나님의 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실 것을 두 번이나 표징을 구하여 확신 한 후에 드디어 이스라엘 각지에서 온 백성들과 함께 출정을 합니다. 이때 출정한 군사의 수가 32,000명입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7장 2-3절입니다.
‘너를 좆은 백성이 너무 많은 즉 내가 그들의 손에서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 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32,000명이란 숫자는 어찌 보면 많은 큰 군대입니다. 그러나 미디안 연합군과 비교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8장 10절에 보면 이 전쟁에 참가한 미디안 연합군은 총 135,000명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미디안은 4배하고도 8천명이 더 많은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군대의 32,000명은 많은 것이 아니라, 적은 숫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정도 군사로는 이길 수 있다는 확신보다는 질 위험성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숫자가 너무 많으니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때에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합니다. 지금도 턱없이 부족한데 돌려보내다니요. 원군을 더 주셔야 합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고 신실한 믿음의 지도자 기드온은 ‘네, 하나님,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두려워 떠는 자 2만 2천명을 돌려보냅니다. 2/3 이상이 돌아간 것입니다. 이제 남은 군사는 만 명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백성이 아직도 많다. 물가에 내려가서 개처럼 물을 혀로 핧는 자나, 무릎 꿇고 엎드려 마시는 자는 집으로 돌려 보내라.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마시는 자 300명으로 미디안 사람의 손에서 너희를 구원하리라’(4-7)
32,000명 중에 다 집으로 돌아가고 남은 자들은 300명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300명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걱정과 두려움이 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께서는 내려가서 적을 치라 말씀하십니다. 미디안은 숨이 멎을 것 같습니다. 300명으로 135,000명의 군사를 치러간다니!
그러자 하나님께서 부하로 있는 부라를 데리고 미디안 진으로 갔다 오라 하십니다. 이에 미디안 진으로 잠입을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두병사가 말하는 꿈 얘기를 듣게 됩니다. 한 병사가 ‘보리떡 한 덩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을 쳐서 무너뜨리는 꿈’을 꾸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른 병사가 그 꿈을 해석합니다. ‘그 보리떡은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암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다’
이 꿈 얘기를 가만히 엿들은 미디안은 가슴이 뛰고 마음이 힘을 얻고 눈이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이 꿈 얘기는 기드온의 300명의 군사가 미디안을 쳐 이길 것을 확증하는 하나님의 싸인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님께 경배하고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15절) 그리고 300명을 3개조로 나누어 나팔과 빈 항아리를 준비하고, 햇불을 항아리 안에 감추고 미디안 진을 둘러쌉니다. 그리고 일제히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나팔을 불며 외치고, 항아리를 깨트립니다. 거대한 숫자를 믿고 잠을 자던 미디안 군대는 한 밤에 사면에서 외치는 소리와 나팔소리와 항리 깨치는 소리와 횃불에 놀란 나머지 도망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미디안 군대를 어지럽게 하여 같은 편끼리 싸우게 합니다. 서로가 적이 된 것입니다. 이에 혼비백산하여 도망하며 오합지졸로 전락한 미디안 군대는 결국 패주하다가 다 전멸 당합니다.(8:12)
135,000명을 300명으로 나누니 450배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450명하고 1명이 싸우는 격입니다. 그런데 그 한 명이 450명을 이겼다는 오늘의 말씀은 세상의 방법과 계산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 세상의 논리를 여지 없이 깨트려 버립니다. 세상의 상식을 무식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논리와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은 능치못하심이 없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약한 것 같고 적은 수에 불과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약함이 우리의 가장 강한 장점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지할 것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붙들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를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교인도 얼마 안 되는데 전도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맞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딱한 처지를 벗어나 보려고 하는, 다시 말해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전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는 전도 대상자를 우리 생존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이요,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불러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고 하는 것은 이제 갈 때 까지 갔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는 것은 소수밖에 안 되는 우리의 현실을 보고 ‘교회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여기에 이렇게 모이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되물어 볼 수 있다는 것이며, 이 물음을 통해서 우리가 교회됨의 진정함과 진실함을 회복 할 기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예배하고 교회됨을 지켜가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숫자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이요 신념 때문입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사명, 곳 십자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주님께서 세우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이 교회는 주님의 교회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귀한 희생의 피, 사랑의 피 때문이요, 주님의 기대와 소망이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이 세운 이 숭고함과 교회됨의 순수함을 잃지 않기 위해 죄와 싸우고 우리의 부패성과 싸우고 있고, 우리를 허물려는 사탄과 세상의 권세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적은 숫자로 뭘 하겠나 하는 세속적인 생각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힘을 보태줄 수 있는 새 성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보고 빛을 발하는 살아있는 눈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사로잡혀 기도하는 뜨거운 가슴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뭍 영혼을 대신하여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는 중보입니다.
우리를 위한 욕심을 다 내려놓을 기회가 왔습니다. 오직 주의 임재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할 때, 아니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성도가 될 때를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한 영혼이라도 더 건져내시고자 하신 주님의 그 뜻을 이루는 교회로 일어설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욕심을 버리고 오직 주의 교회가 이 땅에서 부흥하기를 위해 깨어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헤밀턴의 모든 교회들이 새롭게 각성되기를 위해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깨어 기도해야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깨어 기도한다면 아마도 사탄은 ‘고작 해야 50명도 안 되는 교회가 헤밀턴의 교회의 각성과 부흥을 위해 기도해! 참으로 가소롭다’ 비웃을 것입니다. 허황된 꿈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과 같이 450 대 1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다니엘과 같이 깨어 기도하는 자를 주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더 소중함을 알고 깨어 그 사명을 다하고자 하였던 사도 바울 같은 영혼을 하나님은 주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붙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저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땅에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과 그 은혜에 사로잡혀 높이 주를 찬양하기를 마지아니하는 영혼의 부흥이 일어나게 하소서.’/‘주의 놀라운 사랑과 거룩하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찬양하며, 의의 길을 걷는 영혼들을 이 땅에 일으켜주옵소서’/‘주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 땅 곳곳 마다 말씀의 능력이 임하고 회개와 믿음의 부흥이 일게 하소서’/‘이 땅이 하나님의 그 광영에 사로잡히는 날을 이루어주소서.’/‘우리 교회가 이를 위해 깨어 있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단 순히 우리교회 만의 부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우리 자신과, 이 땅의 교회들과, 저 영혼들 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대하게 사용 하실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부흥의 불을 일으키는 도구가 될까요?
20세기에 들어서서 강력한 첫번째 부흥 운동은 1904년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났습니다. 웨일즈 서부 글레모건의 이반 로버츠가 있습니다. 전형적인 웨일즈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경건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웨일즈의 기독교가 신앙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것을 가슴 아파하며 10년 이상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큰 슬픔에 빠져 기도를 한 후 잠이 들었는데, 새벽 1시경 잠에서 일어나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 속에 전능하신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거의 4시간 동안 친구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한편 4년 동안 하나님께 전 웨일즈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온 세쓰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광산이나 들에서 일하는 평범한 청년들을 주님께서 높이 들어 사용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이 때 이반 로버츠가 세쓰목사의 집회에 갔습니다. 세쓰 목사의 기도 응답은 이반 로버츠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타났습니다. 세쓰 목사가 성령이 인도하여 온전히 자신을 굴복시켜 달라고 기도하자, 그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이반 로버츠에게 성령은 '이것이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응답하셨고, 이반은 하나님의 강권적 사랑 앞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굴복했습니다. 그는 한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평화로 넘쳐났습니다.
이반 로버츠는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한 후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날 이후로 이반은 죽어있는 영혼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도록 하는 데 온 열정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웅변가의 어떤 기술도 없었고, 박학다식하지도 못했다. 오직 성경과 말씀에 대한 거룩한 정열만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과거에 잘못한 것이 있다면 철저하게 회개하고, 모든 의심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으로 성령 앞에 온전히 순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부흥 운동은 순식간에 다른 교회로 퍼져나가면서 온 웨일즈 땅으로 확산되었습니다. 30일 만에 3만 7천명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으며, 단 5개월 만에 10만명의 웨일즈인들이 그리스도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교회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고, 기도모임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탄광이나 철공소에서도 열렸고, 술 매상은 급감했으며, 사람들의 생활 태도는 크게 변했습니다. 일터에서 욕설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이 고운 말씨를 쓰기 시작하자 석탄을 운반하던 조랑말들이 광부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고, 축구 선수들도 기도모임에 참석하느라 경기가 열리지 않는 일도 있었습니다.
13살 이반 로버츠의 심령에서 시작된 부흥 운동은 그의 간구대로 온 세계에 퍼져나갔다. 웨일즈 대 각성 소식은 인도, 아프리카, 아시아에까지 전해져 세계 부흥 운동을 촉발시켰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 앞에 굴복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깨어 있는 자, 이반 로버츠를 주목하시고 위대한 부흥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 같이, 지금도 주님은 깨어 있는 자를 주목하십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실한 모습으로 깨어 주의 임재와 부흥을 사모할 때 헤밀턴의 견고한 사탄의 진이 깨어지고, 성령의 강한 역사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작은 이 교회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지 말고, 깨어 하나님의 위대하신 뜻에 우리 자신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숫자를 보지 말고 믿음으로 큰 뜻을 붙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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