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전문가인 존 맥스웰은 리더를 위한 매일의 약속에서 ‘이기주의의 해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누구를 섬겨야 하는지를 잃을 때, 당신은 즉각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본능으로 되돌아 간다. 리더도 예외는 아니다.’
시간이 더하여 가면 갈 수록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그것은 단순히 ‘주여, 믿습니다’하는 것으로는 결코 다 표현 할 수 없는 더 높고 깊은 뜻이 있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것은 진실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그 섬김에 합당한 모습이 점 점 원숙하게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 하자면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즉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행동 그리고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깊고 바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 사람을 감동시키는 진정성을 소유한 사람’.
곧 성도로서 진정성입니다. 이는 이기심에 바탕을 두지 않은, 한 영혼을 진심으로 대하고 아끼는 애정 깊은 마음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보고, 말하고, 행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가 아니라 속에서부터 품어져 나오는 진정함입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된 모습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교회가 때때로 비난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진정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의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신앙의 모습과 삶의 모습에 괴리가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앙에 진정성이 없는 것입니다. 초신자나 오래 믿은 사람이나 않믿는 사람이나 별 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의미있는 삶보다는 당장의 생존과 성공에 더 큰 가치를 부여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는 진정함이란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다시 우리의 모습으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헤밀턴에 있는 교회, 특히 모든 한인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이끌고, 한인사회에서 진정한 영적인 리더쉽을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국 땅에서 정말 찾고 싶고 의지하고 싶고 맡기고 싶은 교회로서 정신적, 영적 지주 역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답은 ‘신앙의 진정성을 회복’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진정성을 회복하고, 성도의 진정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삶 사이에 간격이 없는 존재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안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진정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진짜와 가짜로 나뉘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얼마큼 알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비록 한 절을 알고 있다하여도 그 한절로 자신의 마음과 감정과 행동을 다스리는 진리로 삼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자신을 희생함으로 박애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나타나야 할 합당한 모습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우리들의 모습은 단지 우리 교회를 선택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결정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헤밀턴 전체 교회의 부흥의 여부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바램과 달리 우리는 헤밀턴 한인교회뿐 아니라 헤밀턴 전체교회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진정성을 회복하는 문제는 너무나 너무나 중요한 사항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 진정함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 한 이후부터 사울이 왕이되기전까지 약 350여년간(1390-1055년 bc) 지속된 시대에 나오미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남편을 따라 모압땅으로 들어갔는데, 두 아들 말룐과 기룐도 함께 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10년을 지내면서 남편도 죽고, 그만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마침 두 아들이 죽기 전에 결혼을 하여, 두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시 어머니로서 젊은 두 며느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고향에 돌아가 새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아무 재산도 소망도 없는 나오미의 입장에서는 두 며느리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습니다.
이에 셋이 처지를 한탄하며 실컷 울고는 첫째 며느리 오르바가 인사를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를 놓아주지 않고 끝까지 간하여 함께 유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 때 룻이 나오미게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 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사실 룻은 그 형님이 되는 오르바 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도 아무도 욕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남편이 자식도 없이 죽었는데, 젊은 아내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그것도 다른 나라의 백성이 사는 땅에 들어가서 산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 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룻이 시어머니께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하고 말해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룻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홀로 남은 불쌍한 시어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창창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홀로 남겨진 불쌍한 어머니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서 어디로 가든지 같이가고, 어떤 위험한 상황에 처하여도 함께 하고, 심지어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될 것이라 합니다. 더 나아가 어머니께서 죽은 곳에서 나도 죽을 것이고, 내가 죽는 일 외의 것으로는 어머니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 다짐을 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시어머니를 진정으로 따르고 섬길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고백 이후에 펼쳐지는 내용입니다. 10년간 고향을 떠났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의 모습은 이내 베들레헴에 소문이 났습니다. ‘나오미가 망해서 돌아왔대요,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다 잃었다지 뭐요.’ 불쌍한 나오미의 얘기는 금세 탑토픽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주제는 ‘룻’이라는 며느리, 더군다나 모압 여인이 어머니를 그렇게 지극으로 섬기고 모신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그래서 이 소문은 삽시간에 베드레헴을 감통케 했습니다. 이방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정성이 받아 들여진 것입니다.
2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네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
나중에 룻이 다시 결혼을 하게 되는데, 지금 이 말은 장차 그 남편이 될 사람인 보아스가 롯을 처음 보았을 때 한 말입니다. 우리는 보아스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 이말을 통해서 룻이 시어머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그 진정함이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음을 알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도 그 것을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다시말해서 룻의 그 진정한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는 룻의 그 사람됨을 알아봅니다. 그리하여 그의 딱한 처지를 의심없이 도울 준비가 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의 밭에 가서 보리를 벨 때 떨어지는 그 이삭을 마음껏 줍게 합니다.
당시에는 고엘 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자녀가 없이 남편이 죽은 여인을 형제, 혹은 가까운 친척이 아내로 맞이하여 죽은 남편의 가문을 잊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나오미의 집과 가까운 친척이 보아스 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치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룻도 사실은 평생 혼자 살아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고엘제도를 친척이 거부하면 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왜그랬을까요? 룻이 젊고 예뻐서 그랬을까요? 물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룻을 이해하고 그렇게 해야 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룻의 진정함이 보아스의 마음을 감동케 한 것입니다.
3장 10절에 보아스의 다음 말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여기에서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라는 말은 돈 많은 자를 따르거나, 혹은 젊은 남자를 찾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어머니 나라의 제도에 따라 가문을 잇기 위해서 나이 많은, 자기 시아버지 뻘 되는 보아스를 의지하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즉, 자신의 이익을 좇아 행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해야 할 도리 앞에서 정직하게 진심으로 자기의 도리를 다한 것입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들어와 사는 것도 대단한 정성인데, 낮선 나라에 들어와서도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모실뿐 아니라, 가문을 잇고자 원칙에 따라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정도를 행하는 모습이 보아스의 마음을 감동케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신의 도리를 다합니다.
그리고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이 룻을 통하여 다윗의 가문이 나오게 하고, 후에는 예수님의 혈통이 되게 하십니다. 초라한 이방 여인 이었던 이 한 사람을 하나님은 위대한 구원의 역사의 큰 주촛 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진정함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감통케 합니다.
사사시대는 어지러운 시대입니다. 믿음과 사회의 기강이 흔들리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모압 여인이 오직 여호와 앞에서 진정한 섬김의 길, 곧 자신을 버리고 연약한 시어머니와 가문의 뜻을 위한 길을 갔다는 것과 그러한 룻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위대한 구속 역사의 주촛 돌로 사용했다는 이 말씀은 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장 34-35)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 하십니다. 자기의 이기적 마음을 내려놓으라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곧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를 따를 수 있는 마음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룻은 자기를 버렸습니니다.
대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붙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부르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댓가를 짊어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난과 오해와 수고와 때론 생명까지도 감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룻은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에 들어가 당할 차별과 혹은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또 남의 집 밭에 가서 이삭을 주어 시어머니를 섬기는 수고를 감당해야했고, 평생을 홀로 살아야 할 상황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 예수님의 말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말씀같이, 룻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고 위대한 구원역사의 주인공 중 한 사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무 재산도 없이 홀어머니를 모시던 초라한 이방 여인이 당시 그 어떤 여인보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알려지고 지금 이순간 그의 이름이 높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은 성도의 도리를 진정으로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주목하신다는 것이요, 그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정함이란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이 져야 할 성도의 삶을 붙잡는 것이요, 성도의 길에 다가오는 십자가의 짐을 달게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의 작은 이익 때문에 쉽게 믿음의 지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큰 이득이 따른다 할 지라도 자신을 버리고, 성도의 길,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합당한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생명과 같이 따라는 것입니다.
마치 룻이 자신을 버리고 그 어머니와 사명을 감당한 것 같이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피하고 십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순종하는 예수님의 길을 좇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길이 진정 내가 살뿐 아니라 다른 영혼을 살리고 소망을 주는 길이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이 진정함을 회복하는 길이 우리 교회뿐 아니라, 헤밀턴의 모든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들의 참된 피난처가 되고, 의지하고 싶은 영혼의 고향이 되게 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정성이 없이는 교회의 부흥과 잃어버린 영혼들이 우리와 함께 예배드리기를 바라는 것은 꿈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점에서 지난 번 수련회 때 성도 여러분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모습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랫만에 열리는 수련회요 모든 것이 원만치 않았는데도 수련회가 잘 이루어 진 것은 모든 성도들의 기도요 희생의 섬김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러한 모습이 교회 밖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진정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란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삶, 즉 믿음과 삶이 일치하는 길을 가야합니다. 우리 교회에 데려오기 위해서 더 잘하고, 우리 교회 올 사람이 아니니 대충하고 하는 그런 모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 번을 만나도 잊을 수 없는 진정함으로 대해야합니다. 어디에 가던지 성도의 본, 곧 자기를 버리고 져야 할 십자가의 댓가를 달게 지기까지 성도된 도리를 다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신뢰하게 될 것이요, 교회를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즉 성도의 진정함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존 맥스웰이 이렇게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뢰성이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말과 일치되어 다른 사람에게 그 가치를 더하게 될 때 우리는 신뢰성을 얻게 된다.’
그러면서 신뢰성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 다섯가지 질문에 정직한 평가를 하고 수정하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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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성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와 함께 있는 가에 상관없이 늘 변함없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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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입니다. 당신은 의사 결정을 할 때 당신에게 유익한 것에 따르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에 따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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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인정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이 성공했을 때 당신은 그를 위한 다른 사람들의 공로를 즉시 인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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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에 대한 것입니다. 당신의 이미지에 비추어 보다 열심히 일하는가, 아니면 당신의 순전함을 그 기준으로 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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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에 대한 것입니다. 신뢰는 주어지는 선물이 아닌, 구축해야 할 승리의 문제임을 알고 있는가? 신뢰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이 누구를 만나던 진실하였고 진리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위한 길만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타인을 섬기는 종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심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말과 삶이 일치함으로 우리를 맡기고도 남을 주가 되셨습니다.
성도는 이 예수님을 진정함으로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진정함으로 우리가 주를 좇을 때 우리 개인의 인격과 신용은 물론이요, 헤밀턴에 있는 모든 교회가 신뢰를 받는 참 교회가 될 것이요, 이를 통해 십자가의 꿈이 이루어지는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를 진정함으로 따르는 성도의 진정성이 희귀한 이 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진정으로 주를 따라 행하는 길을 가십시요.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십자가의 꿈을 이룰자로 세우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