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사랑의 메아리입니다”(로마서 5:6-11 / 20061105)
지난 주간, 한국의 한 일간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3남1녀를 둔 86세의 할머니는 그중 의사가 된 60세의 차남 민씨를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아들이 불미스러운 일로 구속된 후에, 돈이 없어 한동안 병원개업을 못하자, 할머니는 1991년 자신이 소유한 건물 1·2층을 아들에게 임대해주었습니다. 아들이 임대료 한푼 내지 않았지만 아들의 병원이 번창한다는 사실만으로 할머니는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태도는 서서히 바뀌었습니다. 어머니를 방에 가둬 밖으로 못나가게 하는가 하면 밥도 혼자 먹게 하고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하는 등 학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아들 민씨는 2004년 10월 사망한 부친 땅을 상속하겠다면서 어머니에게서 인감도장을 받은 뒤, 할머니가 소유한 건물을 몰래 자기명의로 등기이전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치매증상이 있다며 인천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민씨의 동생들이 이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와 어머니를 퇴원시켰습니다. 정신병은 없었습니다. 할머니를 진찰한 정신과의사는 “환자에게서 치매 등 정신질환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소견을 밝혔습니다.
할머니는 이후 막내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억울함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을 배신한 아들이 괘씸했습니다. 결국 할머니는 지난 6월 한국으로 돌아와 빼앗긴 건물을 돌려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니 건물을 반으로 나누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아들 민씨는 “단 한푼도 줄 수 없다”며 항소를 했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아들을 고소까지 해가며 건물을 찾겠느냐”며 “돈 문제로 부모를 버린 자식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고 합니다. 한숨을 크게 내쉬며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의사가 돼서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던 아들인데 돈 때문에 이렇게 되다니….”
여러분, 사랑 없이 생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나 안 믿거나, 사랑은 있습니다. 원초적으로 사람은 사랑이 있어서 세상에 태어났고 성장하고 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 안에 창조적 능력이 있고, 생명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사랑의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깨달음과 함께 오는 감격, 사랑에 대한 깊은 이해, 이것이 문제입니다.
물리적 사랑을 받고 육체가 삽니다. 정신적 사랑을 받고 인격이 삽니다. 영적 사랑을 받고 영혼이 삽니다. 사랑, 그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믿지 않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어떻게 확실히 보여주셨는지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확증하신 방법,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언제 그러셨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니까 그 상황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6).” 다르게 말하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 내가 모를 때 그가 나를 먼저 사랑하시고 주도적으로 의롭다 하심으로 사랑하시고, 그의 의로 덮어서 의의 옷을 주시면서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나를 먼저 사랑하시고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가며 키워 가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여러분, 나는 언제 깨달았습니까? 사랑은 확실한데 사랑이 언제 확증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하고 깨달은 게 언제입니까? 그 순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차피 나는 모르고 사랑받았어요. 연약할 때 사랑받았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중에 사랑받았어요.
여러분, 심리학자들이나 교육학자들에 따르면, 진짜 사랑은 우리가 모를 때 받은 거랍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젖 먹던 시절입니다. 어머니 젖 먹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봐도 생각이 안 납니다.
어머니가 기저귀 갈아 주시던 때, 목욕시켜주시던 때, 여러분, 이게 얼마나 귀한 사랑입니까? 이 귀한 사랑을 다 받았는데, 이상하게 그 때 기억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사랑 안 받은 겁니까? 사랑이 없었습니까? 아니오. 사랑받았습니다. 사랑받아서 내가 지금 있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아이가 하도 말썽을 부리니까 형이 동생을 때렸습니다. 동생이 대들어요. 그러니까 형이 말합니다. “야, 네가 그렇게 말썽부리면 아버지가 너 사랑하지 않는다.” 그랬어요.
이 말을 듣고 동생이 주춤합니다. 아버지가 그 얘길 다 들었거든요. 아버지가 말합니다. “아니다, 아니다. 형이 그런 말하면 안되지. 나는 말이야. 너희들이 말썽을 부리면 아픈 마음으로 사랑하고, 착하게 살면 좋은 마음으로 사랑을 한다. 사랑은 사랑이야. 사랑하지 않으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마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받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8).” 애당초 내가 죄인 되었을 때부터 사랑받은 거에요. 내가 그럴만 해서, 의로워서 사랑받은 게 아니에요. 죄인으로 덮임받은 거에요. 또 지금도 의인으로 받을 사랑이 아니에요.
여러분, 내 의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선하면 얼마나 선하고 착하면 얼마나 착합니까? 내세우면 어리석은 거죠. 이것 때문에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겁니다. 어차피 죄인인데, 죄인의 모습으로 사랑받았는데, 그야말로 도토리 키재기 아닙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겸손할 수 있는 겁니다.
또, 오늘 말씀은 “내가 원수 되었을 때(10)”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언제요?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예수 믿으시라고 말씀드리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날 때가 있어요. <저같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 믿습니까? 너무 부족해서. 너무 잘못한 게 많아서. 조금 있다가 준비가 되면 믿겠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하나님과 반대되는 쪽에 있어 왔기 때문에, 그 간격을 좁히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죠. 스스로 자신의 잘못은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죄책감일 수도 있고, 자기포기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사도 바울을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락바락 악하게 행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어떻게 원수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 때 길을 막고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음성으로 확증해주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네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줄 사람을 만날 것이다.”
여러분, 이 음성에는 간절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사울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싫어하느냐. 너 그렇게 살면 안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네가 살 방법을 알려줄테니, 성으로 들어가서 사람을 만나라>. 바울은 이 사랑을 알아차린 거에요. 받아들인 거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계속 다메섹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응답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실감나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로마서를 누가 썼습니까? 바울입니다. 이런 고백이 상상 속에서 나올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와 감사, 감격, 그것이 바로 마땅한 반응이요 응답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요새 말을 다 알아들을 정도로 컸기 때문에,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이 평화롭다가 간혹 시끄럽고 걷잡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 학교 보내는 시간입니다. 잘 하는데, 가끔 실랑이를 벌이다가 속을 뒤집을 때가 있습니다.
그날이었습니다. 하라는 거 안 하고 딴짓합니다. 시간이 흘러 급해집니다. 그러다 보니, 목소리가 커지고 마음에 있는 말, 없는 말 다 나오고 말았습니다.
아빠는 아이를 차에 태우고 학교에 데리고 가면서 말합니다. “괜찮니? 엄마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많이 속상하셔서 그랬나봐. 그거 알지?” “예” “다음부터 잘 할 수 있지?” “예” 아이는 금방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집에 돌아와보니, 아내는 누워 있습니다. 마음도 안 좋고, 가슴이 아프니 속도 쓰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아이는 학교에 잘 갔어요?” “응, 잘 갔지. 기분 좋게” “다행이다.” 조금 후에 엄마의 얼굴도 조금씩 밝아졌습니다.
여러분,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 반응으로 얼굴이 밝아졌어요. 더 나아가서, 이 소식을 들은 엄마도 마음이 놓였어요. 왜요? 자식이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였거든요.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이 사랑을 확증해야 합니다. 다시 확증해야 합니다. 이제는 알아야겠습니다. 내가 연약할 때, 내가 기억하지 못한 때, 나의 옳음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사랑 받았다는 걸 잊지 마십시다. 그는 나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로 그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찬예식을 대합니다. 찢기신 몸, 흘리신 피를 빵과 잔으로 받습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고 확증하는 시간입니다. 귀중합니다. 빵 한 조각, 포도주 한 잔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이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 다시 십자가를 쳐다보십시다. 그 속에서 내가 얼마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십시다. 그럴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새로운 존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생각하며, 믿음이란 사랑의 메아리입니다, 라고 지었습니다. 메아리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을 보면, 메아리란 <울려 퍼져 가던 소리가 산이나 절벽 같은 데에 부딪쳐 되울려오는 소리>입니다. 다시 말해, 메아리는 내 소리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메아리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메아리 없는 산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메아리를 울리는 산이 되십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메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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