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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에게서 온다” (시 121:1-8/20060730)2007-03-21 15:36
작성자 Level 10
2006년 7월 30일 주일예배 설교 - 서장원목사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에게서 온다”(시 121:1-8 / 20060730)

런던 어시장에 유명한 청어잡이 어부가 있었습니다. 이 어부가 유명한 이유는 항상 청어를 산 채로 어시장에 가지고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북대서양 청어 어장에서 런던까지 오는 데는 여러 날이 걸리기 때문에, 청어를 산 채로 싣고 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부만은 늘 산 청어를 한 배씩 가져와서 재미를 보곤 했습니다. 이 어부의 비결은 메기 몇 마리를 가진 것 뿐이었습니다. 그는 청어 배에 있는 고기 탱크에 산 메기를 한 마리씩 넣어둔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동료 어부들은 그 메기가 청어들을 잡아먹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청어를 잡아먹지요. 하지만 몇 마리만 먹으면 더 못 먹게 되지요. 하지만 그 메기가 설치는 바람에 다른 청어들은 잡히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피해다닙니다. 살겠다고 쫓기는 가운데 싱싱하게 살아있게 됩니다.”

여러분, 제가 퀴즈 하나를 내보겠습니다. 청어 고기탱크를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비유한다면, 과연 메기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 저는 고난, 고통, 아픔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인생에 때때로 찾아오는 고통으로 인해, 우리는 깨닫고 감사하기도 하면서, 청어처럼 싱싱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고통의 문제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몇 마리지만 메기에게 잡혀먹는 청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청어의 세계가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사건을 사람의 세계로 적용해보면, 그것은 같은 사람이 죽고, 동족이 죽고, 가족 중의 누군가가 죽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통의 문제는 신비스럽고,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려고 종교마다 갖가지 해결책을 추구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갈마리>라고 하는 교리를 사용하여 “전생의 좌값대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교리로 사람들을 비참하게 구속합니다.

불교에서는 <열반>의 교리를 가르칩니다. 열반은 “촛불을 끄듯이 꺼진다”는 뜻으로, 욕심을 완전히 없애면 인간의 모든 고통은 사라진다고 가르칩니다.

회교는 고통을 알라신이 정해준 철저한 <운명론>으로 가르칩니다. “한번 네가 고통을 당하면 빠져 나오지 못하므로 굴복하는 것만이 너의 의무이다. 신이 너를 그렇게 만들어 주셨으니 불평하지 말고 그대로 받으라”는 식이 숙명론입니다.

철학의 한 학파인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향락주의>로 고통의 문제를 처리합니다. “현재의 고통을 잊을 수만 있다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망각해버리자. 술을 마시든지, 쾌락에 빠지든지, 무엇을 하든지 잊어버리고 넘기면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칩니다.

머리가 아프지만, 제가 이것을 소개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고통의 문제를 풀려고 아무리 아우성치고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중요한 교훈은 고통의 정체를 찾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고통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통의 문제는 자세의 문제입니다. 바람과 돛의 관계를 생각하면 분명해집니다. 돛을 단 배는 바람이 있어야 빨리 갈 수 있습니다. 돛을 바로 올리면 배는 바람을 타고 안전하게 빨리 항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돛을 잘못 올리면 바람이 배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버립니다.

고통을 당할 때 믿음으로 그것을 잘 이용하면 더 전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잘못되면 고통이 우리를 원치 않는 방향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므로 고통 그 자체가 크고 작음에 따라서 문제 되지 않습니다.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은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죽으라고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깨닫고 회개하라고 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살라고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줄을 끊으시는 것은 하나님으로만 끈을 삼고 의지하라 하심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난과 고통 속으로 몰아 넣으심은 강한 자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당할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절망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두 가지를 믿어야 합니다. 첫째, 이 고통에는 내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생각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은 나에게 고통이 유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71절에서 시인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통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먼저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나를 이 고통 가운데서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시인이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

오늘 이 말씀은 한 편의 시입니다. 시인은 단호하게,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 과연 누가 나를 도울 것인가? 그래! 그렇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다! 맞다! 맞어!” “할렐루야!”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아니 이번 주간, 저의 안내를 따라 이 물음에 대해 깊이 묵상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왜 시인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떠올렸을까? 특별히, 왜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했을까?

제가 묵상한 바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이야말로, 나에게 필요한 세밀한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성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위력적인 이미지를 지닌 남성 이미지로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이미지 중 한 부분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라는 말입니다. Dei는 하나님, Imago는 이미지, 형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미지대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만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하나님을 남성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따라 남자와 여자를 함께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남자만의 형상이 아님을 뜻함과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여자의 형상만도 아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과는 달리 남자와 여자의 형상을 모두 지니고 계신 분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는 부성, 아버지의 속성과 모성, 어머니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셨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가로막힌 홍해를 단번에 가르시는가 하면, 이스라엘을 침공한 앗수르 산헤립의 18만 5천명의 대군을 하룻밤 사이에 전멸시키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부성이 지닌 위력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성의 특성은 강합니다. 하지만 섬세하지 못합니다. 강함은 섬세함 및 부드러움과 어우러질 때에만 참된 강함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부성뿐만 아니라 모성도 함께 갖고 계시는 이유입니다.

고열에 시달리는 어린 자식이 밤잠을 자기 못할 때, 어머니는 그 아이 앞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웁니다.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만 듣고서도, 그 표정만 보고서도,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차립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이처럼 부드럽고 포근하고 그윽하면서도 끝없이 깊기만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부성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모성만의 특징입니다.

그 흉내낼 수 없는 모성을 가지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도움을 주신다는 사실은,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된 우리 인간을 대하시는 태도에서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이 “지키시는 분”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버이의 본질적인 특성이 그 낳은 자식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처럼, 그렇게 피조물을 지키고, 보호하며, 양육하시는 분이시라는 고백입니다. 특별히, 시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 8절까지, 여섯 절에서, 무려 여섯 번이나 “지키신다”는 단어를 시인은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헛발을 디디지 않게 지켜 주신다. 나를 지키시느라 졸지도 않으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주님은 나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내 오른 쪽에 서서, 나를 보호하는 그늘이 되어 주시니, 낮의 햇빛도 너를 해치지 못하며, 밤의 달빛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모든 재난에서 지켜 주시며, 네 생명을 지켜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이제부터 영원까지 지켜 주실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이 위력적인 부성뿐만 아니라 모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시인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 기독교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관념적인 신, 문자 속에 갇혀 있는 신, 인간종교가 만들어 놓은 신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산은 물론이고 이 온 세계, 이 온 우주, 그리고 우리네 이 모든 인간을 모두 직접 잉태하시고, 출산하시고, 키우시고, 양육하시는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이신 하나님, 그러므로 우리를 손수 빚어 만드셔서 세상에 보내주신 그 어버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진정한 의미의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나의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 연약함을 딛고 굳세게 일어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섬세한 모성으로 끊임없이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어떤 고통의 자리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그 그윽한 모성으로 나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향한 최고의 선물은, 하나님의 모성,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머니의 마음으로 여러분과 저를 지키고 계십니다. 여러분, 절망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께서 지키십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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