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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그 어떤 처지에서도” (빌 4:10-13)2007-03-21 15:39
작성자 Level 10
2006년 8월 13일 주일설교 - 서장원목사

“그 어떤 처지에서도”(빌 4:10-13)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혹시 이런 갈등이 없습니까?
학창시절, 졸업식이 있을 때면 갔던 곳이 있습니다. 중국집입니다. 흔히 말하는 짱개집입니다.
자장면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짬뽕을 먹었는데, 그때부터 자장면과 짬뽕이 저를 갈등하게 만들더니,
지금까지도 짱개집에 가면 이 두 메뉴를 두고 잠시 갈등합니다.

자장면을 먹은 후에는 ‘짬뽕을 먹는 것이 좋았을텐데...’  
짬뽕을 먹고 난 후에는 ‘자장면을 먹었어야 하는데’하며 언제나 만족하지 못하고 중국음식점을 나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은 잘 알려진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한 단어가 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11절 끝에 있는 ‘자족’이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자족이란 무엇일까요?

자족이란,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의 상태을 말합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아우타르케이야>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함께 외웠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 따라해보실까요? <아우타르케이야>.
특별히 불평, 불만이 쌓일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뜻을 묵상하면 점점 마음의 평안을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자족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런데 그는 얼마나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던 사람입니까? 바울은 죄수였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 언제 풀려나올지 모르는 비참한 신세였습니다.
그는 결코 만족할만한 것이 없는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죄수의 입장에서 자족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정말 우리에게 굉장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더 힘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감옥에 앉아 있으면서도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다면, 우리도 이 비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특별히, 바울은 빌립보서 전체에서 <기쁨>이라는 단어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정말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바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볼 때, <기쁨>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울리지 않습니다. 날마다 원망하고 불평해도 시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은 보통 기쁨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의 지배도 받지 아니하고 항상 마음 속에 누릴 수 있는 이 기쁨!
바로 이 기쁨이 솟아나는 샘이 <아우타르케이야>입니다. 자족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감옥에 앉아서도 자족을 가지고 기뻐했는데,
여러 가지로 풍요롭고 자유로운 환경에 사는 우리가 왜 기쁨이 없고 원망스런 불평스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시간을 내가 유용하는 시간이 아니라, 무엇인가에게 빼앗긴 시간으로 느끼며 살아야 합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왕에 예수 믿고 살 바에는 바울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성경 11절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족은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족은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서 얻는 것이라고 바울이 우리에게 교훈해 줍니다.

그렇다면 배우기 전에는 전혀 몰랐다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본성으로 항상 자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우리의 성품을 보세요.
그것은 불평과 불만이지,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갈지 않은 땅과 같습니다.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거기에는 잡초가 납니다. 거기에는 가시덤불이 엉킵니다.
잡초씨앗을 가져다가 심을 필요가 없어요. 가사나무 묘종을 가져다가 심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잡초는 나고 가시는 뿌리를 내립니다. 인간의 마음도 꼭 같습니다.
불평을 가르쳐 줄 필요가 없어요. 가만히 있어도 인간의 마음에는 항상 불평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족은 천상의 꽃입니다.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우리의 본성에서 저절로 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재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아니하면 자족할 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물어보아야 합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 자족을 배웠을까?
12절 말씀을 가만히 음미해 보세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말은 이렇게 풀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부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나는 잘 먹을 때나 배고플 때나 넉넉할 때나 아쉬울 때나 어떤 형편에서든지
그리고 모든 형편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경험을 통해서 자족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배웠노라”라는 단어는 현재완료형입니다.
현재완료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이어진 행동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배워왔다는 의미입니다.

가난할 때, 부할 때, 배고플 때, 배부를 때, 천할 때, 또는 존귀할 때 갖가지 인생 경험을 거쳐오면서 배웠다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환경입니다. 경험입니다. 형편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현재 몸담고 있는 환경이 자족을 배울 수 있는 값진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가난합니까? 가난한 지금의 환경,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처럼 자족할 줄 아는 것을 배우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부합니까? 여유가 있습니까? 걱정이 없습니까? 이런 환경에서 자족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할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 자족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참 좋은 기회입니다.

가난할 때 자족하지 못하면 다음에 부자가 되어도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부하게 살면서도 자족하지 못하면 다음에 가난해질 때 자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족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바울의 말을 들어보세요. 바울은 자신이 배운 그 자족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려줍니다.
바울은 그것을 “능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다같이 읽어볼까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이 말을 바꾸면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그 때마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언제든지 자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비결을 이렇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주님이 주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능력을 받으면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비결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비결은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능력 주시는 자>라는 말은 <나를 강하게 하는자>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바울은 예수가 어떤 경우에서나 능력을 공급하는 원천이 되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자족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주시는 힘이다. 주님의 능력만 받으면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환경이 바뀔 때마다 주시는 능력이란 실제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감사의 조건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감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의 조건은 가까운 데 있습니다. 찾기만 하면 자족할 수 있습니다.
<아우타르케이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자신이 처함 환경에서 한 두 가지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는 데서 시작합니다.

환경이 아무리 뭐뭐해도, 가난해도, 답답해도, 고달파도, 불행해도, 우울해도, 불가능해도,
그 속에는 감사할 조건이 있습니다. 오직 주님의 능력을 받는 자만이 그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자족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이메일로 매일 배달되는 편지에서 이런 내용을 읽었습니다.
세익스피어가 쓴 <헨리6세>라는 희곡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의 왕관은 머리에 있지 앟고 나의 가슴 속에 있도다. 그것은 만족이라고 불리우는 왕관,
도대체 몇 명의 임금이 이 왕관을 써 보았을꼬.”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아 있어도 감사의 조건을 찾지 못하는 왕은 불행한 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 감사의 조건을 찾아서 감사하고
바울처럼 기뻐하고 자족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마음의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아 있는 행복한 왕입니다.

우리는 흔히 만족의 조건을 밖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남의 손에 있는 것이 더 아름답고 더 크게 보이기도 합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을 자꾸 비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얼마나 손해가 큽니까?
행복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기가 감사의 조건을 찾느냐 못찾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당신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그 환경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래성에서 한 알의 다이아몬드를 찾아낼 수 있는 눈을 허락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만 있으면 지금 몸담고 있는 환경에서 다이아몬드를 찾는 눈이 열립니다.
그 속에 자족이 있지 않습니까? 그 속에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바울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비결은 경험에서 얻는 확신이었습니다.
그 능력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감사의 조건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받읍시다.
이 능력으로 자족한다면 우리를 따라올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 자족의 능력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수녀 시인 이해인의 시 한 편을 읽어드립니다.

어쩌면 아름다운 것들을
바로 곁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눈뜬 장님으로 살아온 날들이
더 많은 듯하다.
음악을 듣다가, 그림을 보다가,
책을 읽다가, 사람을 만나다가,
항상 새롭게 감동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아름다움을 향한
그리움을 키워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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