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 27일 주일예배 설교 - 서장원목사
“마음을 알아주시는 분”(눅 19:1-10)
한국의 전래동화 중에 “호랑이와 곶감”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아주 짧은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늦은 밤에 아이가 계속 울자 어머니는 자신의 초가집문 밖에 호랑이가 자신들을 헤치러온 줄도 모르고 우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울면 호랑이가 잡아 간다.”
그러나 아이의 울음이 그칠 줄 모르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곶감 줄까”라고 하자 울던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호랑이는 깜짝 놀랍니다. 나보다 더 무서운 곶감이 방안에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 모자를 잡아먹지 못하고 도망하고 맙니다.
이 동화 속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저는 이 동화 속에서 어머니가 우는 아이에게 던진 한마디의 말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곶감 줄까?”라는 말은 바로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말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아이는 울음을 멈췄고 그 무서운 호랑이도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을 알아준다. 이것은 아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타인의 상황과 마음을 이해하고 아는 것을 말합니다. 목사는 성도들의 마음을 알아줘야 합니다. 성도들은 목사의 마음을 알아줘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의 마음을 알아줘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마음을 알아줘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마음을 알아드려야 합니다.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은 고객의 마음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마음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삭개오라는 이름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리 중의 세리인 세리의 장입니다. 로마 사람이 유대나라만 아니라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을 잘 이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요새말로 실세입니다. 그리고 부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리장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자신들보다 더 높은 권력자들과 친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세리입니다.
그런데 이 세리에게 고민이 있습니다. 종교적 고민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것 같은,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은 그런 고민입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반 민족주의자라고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까요. 또 로마 사람의 힘을 빌어서 자기 권력과 자기 부를 취하고 있으니까, 그 마음 속에 갈등이 있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시야 대망의식입니다. 메시야, 구원자를 기다립니다. 왜요? 이대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서 속히 메시야가 와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평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그런 의식, Messianic Expectation, 메시야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가 삭개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큰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또, 병 고치려고 예수를 만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려하는 생각은 독특합니다. 왜요? 그는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좋지 못한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마태입니다 마태도 역시 세리입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데, 현장에서 부르셔서 제자를 삼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분이길래 많은 사람들이 다 천대하고 온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죄인의 대명사로 부르고 있는 세리를 불러서 제자를 삼았단 말인가? 세리를 제자삼은 그 분은 누굴까? 그래서 예수님은 보고 싶었습니다. 자기도 세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둘러싸고 있어서 밀어닥치는데, 도저히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그는 체면이고 스타일이고 뭐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뽕나무로 기어올라갑니다. 그는 이 은총적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요. 이 중요한 시간을 놓칠 수가 없어요.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상황입니다.
자, 여러분,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보실까요?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나 보세요. 오늘 성경은 “우러러보시고” 그렇게 말씀합니다. 쳐다보았어요. 오히려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우러러 본 게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부분을 예수님이 개별적으로, 특별하게 보셨다고 해석합니다. 여러분, 지금 얼마나 숨막히게 중요한 시간입니까? 얼굴과 얼굴, 눈과 눈, 마음과 마음이 마주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보듯이 그렇게 보는 게 아니에요. 지명하여 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보신 거에요. 삭개오를 보신 거에요. 즉, 나를 보셨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삭개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주고 받는 말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왜 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갔는지, 왜 나를 보려고 하는지, 왜 저렇게 간정한 마음으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마음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그의 고민, 그의 깊은 관심, 그의 궁극적 관심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무슨 긴 말이 필요합니까?
그에게 주님이 다가가셔서 친히 내려오라 하시며 하루를 자신의 집에서 보내야겠다는 말씀에 삭개오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간 집에서 예수께서 삭개오를 책망하지도, 무엇인가를 가르치지도 않으셨는데 자신이 스스로 말하길 “소유의 절반을 나누고,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결코 세리장이었던 삭개오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집에 유하시는 것으로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삭개오의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외롭고, 힘든 자신의 삶, 그리고 마음에 가진 죄의식, 그로인해 구원받을 자격도 없다는 상실감, 이것이 삭개오의 가슴 가운데 인이 박힌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삭개오를 알기에 사람들의 눈을 뒤로한 채 그를 찾아 주셨고 그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이 삭개오에게 하신 한마디 말씀은 삭개오가 그토록 바라던 것, 즉 구원이었습니다. 깊은 산골 한없이 우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곶감으로 달랜 어머니처럼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을 이해하시고 그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어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세요. 내 마음을 알아주시는 분이세요. 옆에 계신 분에게 다시 한 번 알려주실까요?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을 알아주십니다>. 다른 사람 다 몰라줘도, 예수님은 내 마음을 완전하게 알아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