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 23일 주일예배 설교 - 서장원목사
“말씀하시니 좇으니라”(마 4:18-22)
우리나라에서 유명했던 분 중에 자기 자신을 늘 대한민국의 국보라고 자처했던 분이 계십니다. 바로 양주동 박사라는 분입니다. 천재로 알려진 분입니다. 이 분이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는 바다 건너 일본 땅에 있었으면서도, 실은 서울의 기독교계통 어느 학교의 여학생을 열렬히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탁월한 문학재능이 있었고, 그리고 시적인 문장력이 대단했습니다. 실력을 발휘해서 연애편지를 여러 번 썼습니다. 여학생의 마음을 빼앗을 만큼 좋은 문장을 골라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회답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유는 이 기독교학교의 기숙사에 독수리 같은 사감선생님이 이 편지를 전부 읽어보고 본인에게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양주동 박사님이 아무리 출중한 문장을 쓴다 해도 본인에게 전달되지 않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점점 더 마음 아파하다가 지혜로운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제 성경구절을 많이 써서 보내야겠다. 성경말씀 속에 사랑을 담아서 전달하면, 이 성경구절이야 사감선생이 전하지 않을 수 없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편지를 보냈는데 성공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성경말씀을 썼을까요? 요한일서 4장 7절, 로마서 12장 9절, 요한일서 4장 18절, 마가복음 10장 7-8절. 대충 짐작이 가십니까? 궁금하시죠?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 번째 구절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여기서 감동이 됩니다.
두 번째는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세 번째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이제 마지막 성경은 이렇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랑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아멘.” 이렇게 해서 연애가 성공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그 자체만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특징이란 다른 것들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도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스스로가 증거하는 특징 중의 하나는 능력입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9장 20절에 보면, “주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퍼져 나가고, 점점 힘을 떨쳤다”고 증거합니다. 또,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다”고 증거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의 능력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은 그 분을 통해 말씀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은 주님께서 동시에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한 쪽에서는 고기잡이가 한창입니다. 바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라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던지던 그물을 놓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걸으셨습니다. 조금 가시다가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부르셨다”고만 증거합니다. 뭐라고 부르셨을까요? 처음 만나셨을테니 이름을 못 부르셨을 것이니, “어이, 이보게” 정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그 형제가 배와 아버지를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여러분, 혹시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물과 배를 왜 버려?” “아버지를 버려? 불효자식이구만!”. 한 걸음 더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거기가 초점이 아닙니다. 초점은 “At once they went with Jesus", “곧 즉시 예수를 좇으니라”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그들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서 움직였습니다. 이제는 곁에 그물과 배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도대체 어쩌자고 이들이 이렇게 움직이는 걸까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돈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높은 지위를 약속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이 대단한 결단력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아니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능력일까요? 부르시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부르시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보면, 사울이라는 청년이 나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죽이던 유대인 청년입니다. 사람을 죽일 정도면 얼마나 자아가 강한 청년이었겠습니까? 그런 사울이, 자기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단 한 번의 음성을 듣고 그냥 주님을 따라나서고 말았습니다. 말씀의 ‘부르시는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부르시는 능력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지혜로워 그 분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부르시는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을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그 분의 부르심에 겸손히 귀기울일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깊은 부르심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부르시는 능력으로 어부 베드로를 부르셨던 주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베드로를 사도 베드로로 다시 부르셨습니다. 부르시는 능력으로 살인자 사울을 부르셨던 주님께서는 바로 그 능력으로 사울을, 세계의 역사를 변화시키는 바울로 다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인정하고 고백하고 감사해야 할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부르신 것에 대한 인정이요 고백입니다. 많은 사연과 상황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기에 내가 여기에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부르시는 능력 가운데 있는 것은 행복이고, 그 행복은 어느 한 순간에 끝나지 않고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95장의 가사로 표현하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는 쪽으로 우리를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살다 보니까 여기까지, 해밀턴까지 온 인생들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뜻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뜻을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살 수 있을까 막막해서 답답할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나를 부르실 것입니다. 그 부르시는 능력 가운데만 있으면 나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이 말씀의 부르시는 능력 가운데 있을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에 힌트가 있습니다. “말씀하시니, 좇으니라.” 여러분,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어떻게 이 말씀의 부르시는 능력 가운데서 움직일 수 있었고,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을까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도대체 말씀과 좇음, 그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들음입니다. 듣는 일, 들려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 예수님의 말씀을,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을 때, 그들은 부르시는 능력 가운데서 자기들이 진정 붙잡고 좇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이것만 확실하다면, 어떤 일이 내 계획과는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될지라도 그것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실족하지 않습니다. 왜요? 나는 여전히 말씀의 부르시는 능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의 인생 말년에 죽음을 앞두고 이런 고백을 했나봅니다. 베드로후서 10장 10절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 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굳게 한다는 말은, 영어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be all the more eager.” 더 강하게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고, 부르시며, 부르실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날마다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들으십니까? 들리십니까? 귀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몸과 영혼으로 들려지는 사건이 있습니까? 읽음을 말씀을 듣고, 봄으로 말씀을 듣고, 들음으로 말씀을 듣는 사건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Word of God waits for us in the Bible.”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성경 안에서 기다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납니다.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가집니다.
사도행전 18장 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살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성경이 나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약속이 있고, 사랑의 증거가 있고, 사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그 능력 안에 사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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