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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내가 당한 현실의 의미” (빌 1:12-18 )2007-03-21 15:24
작성자 Level 10
“내가 당한 현실의 의미” (빌 1:12-18 )

사람은 누구든지 다음의 세 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없이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 해답이 없이 행복하다면, 그것은 거짓이요 위선입니다.
현대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그 첫 번째 문제는 죽음입니다.

현대 과학과 문명은 상당한 수준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이상, 그것도 별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바로 죽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없이는 그 누구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죄책감입니다.
윤리와 도덕을 알든 모르든 문제가 안됩니다. 각자 그 마음에 법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죄책감이 비롯됩니다. 때로 우리는 이 죄책을 심리적 현상으로 해석하고, 사회학적 필요라고 생각해보고, 필요악이라고 변명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었다고 정당화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로 변명해보아도 빠져 나갈 수 없는 것이 죄책감입니다. 이것은 누구 때문이고, 저것은 누구 때문이라고 아무리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해보아도 내 양심이 나로 더불어 증거합니다.

내 양심이 나를 향하여 “너는 죄인이다”라고 하는 이상, 나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기쁨도 참된 기쁨일 수 없습니다. 이 죄책의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삶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입니다.
목적을 잃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다가 내가 왜 공부했는지 모를 시간을 맞게 됩니다. 열심히 돈만 벌면 되는 줄 알고, 열심히 돈을 벌다가 이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부질없는 짓인지를 깨닫게 되는 결정적인 시간이 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목적을 잃었고, 가치를 상실했습니다.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허무합니다.

이 세 가지 문제는 중요합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가지지 않은 채 사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반면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가장 행복한 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의 불행은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당하는 현재의 처지에 담긴 미래적 의미, 소망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문제입니다.

제가 오늘까지 4번 해밀턴에 오면서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모르는 길은 멉니다. 아는 길은 가깝습니다. 처음에 오면서, 아 시간상으로는 한 2시간이면 넉넉하겠구나,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먼지요. 장로님께서 보내주신 지도를 보면서 오는데,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 와야 하는데,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단숨에 거뜬이 도착했는데, 신기하더라구요. 지난 주일에 여기를 제가 1시간 20분만에 도착했거든요. 이 얘기를 호식형제한테 하니까, 그러더라구요.
<목사님, 도대체 얼마를 밟으신거에요?>....
지도도 안 보고 왔거든요? 어떻게요? 이제는 알거든요.
교회 오는 길만. 길을 아니까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모르고 가는 길은 멉니다.
그러나 알고 가는 길은 가깝습니다. 똑같은 거리라도 우리는 다르게 느낍니다. 또, 모르고 가는 길은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끌려가는 듯이, 쫓겨가는 듯이 사는 생은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선택한, 알고 가는 길이라면 화창한 날의 발걸음처럼 가벼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현실 자체의 차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알고 가는 길, 자유의사로 선택적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힘이 있고 명랑하고 성공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은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자원적으로 사느냐, 피동적으로 사느냐, 억지로 사느냐, 선택적으로 사느냐 -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를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노예의 영과 아들의 영을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예의 생활은 언제나 억지로 사는 삶이요, 아들의 생활은 자유롭게 사는 삶입니다. 종의 생활과 주인의생활은 다릅니다. 주인의 아들은 당연히 주인입니다. 종과 아들을 같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르고 오는 길이 아니라 알고 오는 길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때로 이것을 율법과 은혜로 대조시켜서 사망의 법과 생명의 법, 혹은 불신과 믿음이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알고 길을 가야 합니다. 모른다고 하는 무지에 피곤이 있고, 절망이 있습니다. 현실의 문제는 의미의 문제요 깨달음의 문제요 존재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진정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충성된 일꾼이었습니다. 그에게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출세나 명예, 안일한 생활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대로 그리스도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복음은 반드시 전해야 하고,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하고, 나아가 선택받은 자라야 한다는 확실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종종 옥에 갇힐 때가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히면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껏 복음을 외쳐야 할 사람이 외치지 못하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전하지 못하고 쇠사슬에 묶여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의 감옥에서 재판도 없이 무려 2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이었겠습니까? 갖은 방법으로, 인간적인 지혜를 다 동원하여 이 위치에서 빠져 나가려고 애를 쓴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헛수고가 되어버렸고, 마지막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잘못하면 암살당할 위험에까지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카드를 사용합니다. 바울은 엄연히 히브리사람이지만, 그는 자신이 지닌 로마시민권을 이용하여 ‘나는 로마시민이오’하고 총독에게 상소합니다. 로마시민에 대한 재판은 로마에 가서 해야 된다는 규정으로, 결국 그는 로마로 압송됩니다.

그런데 바울과 276명이나 되는 선원을 태우고 로마로 향하던 그 배가 풍랑을 만나 파선하고 맙니다.
겨울에 파선하였으니 얼마나 큰 고생을 했겠습니까? 이러한 고생 끝에 간신히 로마에 닿습니다.

그런데 그 고생은 로마에서도 계속됩니다. 도대체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사도 바울은 답답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아마 그는 <하나님, 어째서 이렇게 하시는 겁니까?> 하고 부르짖기도 하고 한탄도했을 것입니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하는지, 내가 당하는 일, 투옥되어 고생하는 일이 왜 있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도 같고, 하나님께서 나를 내버리신 것도 같습니다. 여러 가지로 괴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불합리한 일을 통하여 귀한 진리를 깨닫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간증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복음이 막히고 하나님 사업이 침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바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도리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의 결과, 즉 의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달리 뜻밖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3절의 말씀 가운데 <온 시위대 안과>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당시의 이 시위대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옛날 왕들이 무엇을 믿고 누구를 의지하고 왕권을 행사했겠습니까? 왕들은 자신의 주위에 정예의 부대인 시위대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시위대>란 왕을 지켜주는 / 훈련이 잘된 충성의 군인의 무리를 뜻합니다.
이들 때문에 정치, 경제, 문화 등 나라의 전반적인 일을 해 나갈 수 있었던 겁니다.

로마에 가면, 사도 바울이 갇혀 있던 그 지하 감옥을 볼 수 있습니다. 궁전 옆에 있는 그 지하실 방에 가보면, 아직도 바울을 묶어놓았던 ‘할루시스’라고 하는 쇠사슬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쇠사슬은 사도 바울의 한쪽 팔목과 그를 감시하는 근위병의 한쪽 팔목을 묶는 데에 사용된 것입니다.

그렇게 매인 채로 꼬박 하루를 보냅니다. 하루가 지나면 다른 군인으로 교대가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도 바울에게 병사가 한 사람씩 꼼짝 못하고 24시간 붙들려 있는 셈 아닙니까? 그러니, 이건 전도하기에 딱인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기회를 놓칠새라 병사에게 대놓고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한 달이면 삼실 명입니다.
일년이면 삼백명이 넘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그 병사들이 자진해서 친구들과 상관에게 복음을 전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이렇듯 복음이 전파되어 오늘의 말씀을 보니,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그 믿음이 나타났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마지막 장에는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황제의 가족 가운데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겁니다. 비록 사도 바울이 부자유한 몸이었지만, 오히려 복음 전하는데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하나만 더 알았더라면 아마 춤을 추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서 300년 후에 대로마제국이 결국은 기독교 국가가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여파로 다시 복음이 온세계로 전해져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거 놀라운 일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복음을 전하다 죽어갔지만, 역사는 엄청나게 이루어졌습니다. 뿐만아니라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바울 대신 복음을 전할 마음으로, 그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우리가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느냐며 겁 없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바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바울과 경쟁을 하던 사람들은 바울이 갇힌 것을 알고 그를 괴롭힐 마음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오늘의 본문은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8절)”라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투옥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거기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놀라운 역사가 밖에서 이루어지고,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러므로>, <그렇기 때문에>가 아닙니다. <도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비록 나는 감옥에서 고생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생각으로는 답답하고 괴로워보이지만,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같이 여겨지지만, 도리어 하나님의 일은 더 크게 진척되고 효과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로써 기뻤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피동적인 현실을 능동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수동적인 현실에서 선택적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교인들이 핍박을 받아 사방에 흩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흩어질 때에는 왜 흩어져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모른 채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정처없이 고향을 떠나 피난민 생활을 했습니다. 이렇듯 강제로 흩어졌지만, 이제는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삶 속에 펼쳐지는 일들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헛된 시간이 아닙니다. 나 중심으로 생각할 때믄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할 때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실패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감옥에 갇히는 법이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질 뿐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의 <연말>이라는 기도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의 요구를 다 물리치시고,
나의 소원을 다 파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을 감사합니다.
만일 내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졌더라면
나는 거만해지고 밉살스러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무 소용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에게는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그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었을 것 같습니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 뜻은 다 끝났고, 내 욕망은 묵살되었습니다. 분명히 실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실패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를 겸손하게도 하시고, 진실하게도 하시고, 당신 앞에 나오게도 하시고, 당신 앞에 무릎꿇게도 하시고, 당신 앞에 기도드리게도 하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땅끝까지 전하는 데에 소중하게 쓰임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께서 내게 두신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선, 나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이나 자기 안일, 자기 명예를 싹 지워버려야 합니다. 자기부정을 할 때에 비로소 내 생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나 중심적인 생각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을 바꾸어보세요. 내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해보세요. 나아가 오늘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저 미래를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큰 뜻과 경륜을 알 때에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간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될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2절).”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하여 열한 번이나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일의 귀한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선교적 의미, 미래적 의미, 경륜적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했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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