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인생을 바꿉니다” (대상 4:9-10, 041010)
오늘 본문이 포함된 역대상 1~9장은 읽기에 대단히 지루한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의 족보가 나오는데, 무려 500명 이상의 이름이 나열되기 때문에, 내 인내력이 어느 정도인가 시험한다고 할 때, 이 부분을 읽어보면 그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중간에 4장을 읽다보면, 불쑥 야베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이 곳에 한 번 등장했다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야베스에게서 3가지 독특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이름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을 때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들의 이름을 ‘고통’이라는 의미에서 <야베스>라고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야베스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를 많이 했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3가지가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고통이라고 지은 것을 보면, 거기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출산할 때 난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야베스의 첫 시작이 그리 순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한 것처럼 풍성한 은혜가 있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시작은 고통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렇게 좋아진 이유가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오늘 본문을 보면,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이렇게 굉장히 점잖은 표현을 썼지만 원뜻은 '부르짖는다. 소리를 지른다'는 뜻입니다. 야베스는 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을까요? 야베스의 기도를 보면, 그 심정이 얼마나 절박한 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군대생활할 때, 이름 때문에 웃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름이 ‘정 신’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성이 정씨이고, 이름이 신이었습니다. 부른다면, 신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고참들이 이걸 놓치지 않고, <정신아! 정신이 들어왔냐? 정신이 나갔냐?>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웃는데, 당사자는 별로 기분이 안 좋아보였습니다.
아마 야베스도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야베스!>하고 부를 때마다 그는 <고통>이라는 단어를 자꾸 떠올렸을 것입니다. 성장하면서 <혹시 내가 이름처럼 인생을 고통스럽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불안함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고통을 물려주었지만,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바꾸어 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야베스에게는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야베스의 자세를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고통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다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여기저기 고통으로 얼룩져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시대에 태어나든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통이라는 인생의 장애물을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베스의 기도, 야베스를 형제보다 존귀한 사람으로 후대에 기억되게 한 야베스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고통에 대한 사람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은 체념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 여기에서 무엇이 더 좋아지겠냐? 되는대로 살지 뭐.' 이렇게 말하고, 모든 원인을 환경이나 조상이나 자신의 무능함에 돌리면서 좌절하는 것이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면 긍정적인 반응은 무엇입니까? '나는 이대로 살고 싶지 않아. 나는 도전할거야. 나는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복을 받는 사람이 되고 말거야.' 하고 야베스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가는 자세를 갖는다면, 그것은 고통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야베스에게서 우리는 이러한 긍정적인 반응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고통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긍정적인 반응입니까? 부정적인 반응입니까? 스스로가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면, 야베스는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첫째, 야베스는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저에게 정말로 복을 주세요. 저에게는 정말 복이 필요합니다.”라는 간구입니다. 자신의 환경이나 이름이 이야기해주는 삶을 볼 때,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주시지 않으면 복된 인생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절박한 절규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고 우려할 때 “기독교의 기복종교화”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자신의 고통과 가난 그리고 연약함에서 벗어나 부요하고 권세를 얻고 풍요롭게 사는 것을 위해서만 매달린다는 것이죠. 현실에서 도피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자세가 아니냐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비판과 우려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그럴 소지가 있습니다. 복을 위한 복을 구하고, 이기적인 목적에서 복을 구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요 또 경계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너무 경계하고 조심한 나머지 기독교에 담긴 복의 원리를 한꺼번에 잘못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신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민수기 6:24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지키시기를 원하며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평강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잠언 10:22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또, 요한계시록 22장 7절에 보면,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복>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복을 받고 풍성하게 누리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성경은 부자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으나, 부함 자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관해서 말할 뿐입니다. 부자이십니까?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정결하고 깨끗한 부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무엇에 쓰느냐에 더 진지한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평생 고생만 하다가 천국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복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이 복을 어떻게 받습니까? 마태복음 7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설명이 필요없는 말씀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찾는 자에게, 두드리는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이 현실적인 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베스의 기도를 인간적인 기도라고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염치 없는 기도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야베스처럼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현실에서 복 받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중요합니다. 우리 편에서 볼 때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도 중요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자녀가 잘 되야 하나님이 높여지시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복을 구할 자격이 있습니다.
어제는 오클랜드한인교회 청년회의 총동원잔치가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주 중에 대학 도서관으로 가서 청년들을 심방했습니다. 심방 중에 한 청년을 만났는데, 내가 <공부는 잘 되냐>고 <힘든 일을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공부가 안돼요. 집중이 안돼요.>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너, 기도하면서 공부하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목사님, 그런 걸로 기도해도 돼요?>라고 되묻는 거에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무지할 수 있는가? 그래도 대학생인데...>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하나님한테 미안해서 그런 기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염치 없이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하느냐는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는 염치없는 기도란 없어. 오히려 하나님은 기도 안하는 것을 싫어하셔. 그러니 책상 앞에 앉자마자, 공부부터 하지 말고, 기도부터 먼저 해라. 지혜 달라고, 집중력 달라고>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염치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베스처럼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분의 자녀답게 이 세상에서 복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구하십시오(!) 하늘의 예비된 복을 위해 기도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야베스는 자기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 <지경>이란 말은, ‘땅의 경계’라는 뜻입니다. 야베스 당시는 각 지파에게 그 땅을 분배해주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자신이 관리하고 지배할 수 있는 땅을 더 넓혀 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지배하고 관리할 수 있는 땅을 더 넓게 해달라는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어떤 말이 좋을가요?........ 그것은 영향력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 더 많아지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비전과 욕망의 차이 때문입니다. 비전이 선한 영향력이라면, 욕망은 악한 영향력입니다. 비전이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면, 욕망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것입니다.
비전이 사랑을 동반한 것이라면, 욕망은 지배욕에 근거한 것입니다. 비전이 사명이라면, 욕망은 자기만족입니다. 문제는 그 영향력이 비전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욕망을 위한 것이냐 입니다. 우리는 비전과 욕망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를 오늘 우리 상황에서 생각한다면 이렇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공부하는 시기입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는 학생입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지혜를 주시고, 집중력을 주옵소서. 그래서 미래를 알차게 준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도구로서 세계 속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결혼 적령기에 있습니까? “하나님, 나에게 예정하신 배우자를 주시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그렇지 못한 가정을 섬길 수 있는 영향력을 허락해주옵소서.”
사업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나의 사업을 더욱 번성하게 하셔서 제 인생의 영향력과 영역을 더 넓혀주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옵소서”
어떤 조직사회에 있습니까? “하나님, 저로 하여금 더 높은 자리, 책임감 있는 자리로 옮겨주셔서 저의 영향력을 더 확장시켜주시고, 그 영향력을 가지고 전도할 수 있게 하옵소서.”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입니까? “하나님, 더 큰 믿음 주셔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굳게 서게 해주옵소서. 감사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세상 속에서 무능력한 그래서 세상과 동화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여러분, 이 기도제목은 해밀턴 한인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것으로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의 지경을 넓혀주옵소서. 부흥시켜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해밀턴 한인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교회, 영혼구원의 방주역할을 할 수 있는 교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지경이 넓어야 합니다. 보는 만큼 알고, 가는 만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 동기가 욕망이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서 우리의 지경, 영향력이 넓어지도록 간구하여 응답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야베스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무슨 은혜, 무슨 은혜 그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이 나와 함께 한다는 확신, 고백,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게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다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신앙생활은 신비입니다. 참, 오묘합니다. 여러분, 보이는 부분이 많습니까? 안 보이는 부분이 많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래서 우리는 기적을 기다립니다. 기적이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보아야 우리의 신앙생활이 유지될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 손 안에서 인도함 받고 보호함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가장 소박하고 가장 정직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부분을 붙들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자기가 간구하는 복과 자기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지 않고는 자기의 인생을 바꿀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은 아무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야베스가 고백한 하나님의 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요단강 속에 있던 열두 돌을 취하여 기념탑을 세우라, 이것은 홍해와 요단강을 여호와의 손이 도우심으로 가능하게 되었음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은 말씀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입니까? 해답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손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에든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포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런 가사의 복음성가를 아실 것입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아멘)
마지막으로 그는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야베스는 참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어떻게 해야 아름답게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서 환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영어성경 중 가장 권위가 있다고 하는 KJV은 이 구절의 환란이라는 말을 이 아닌 로 번역했습니다. 즉, 나에게 닥쳐오는 ‘악한 영의 시험’에서 건져달라는 의미입니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중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건져주옵소서’라는 기도와 일맥 상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물질의 복을 받은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권세와 명예의 복을 받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았던 복이 오히려 저주와 파멸의 시작이 되었던 일들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셨는데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민한 신뢰를 어둡게 만들고 무례하게 만드는 경우가 일어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야베스는 그 유혹과 넘어짐의 환란을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강영우 박사라는 분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한국 장애우 중 최초의 유학생이자 첫 박사학위 취득자입니다. 그가 쓴 저서로는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등 다수가 있습니다.
그는 중학교 재학 시절 축구공에 맞아 실명을 했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의 실명에 절망한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3명의 동생과 생계를 꾸리고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밤낮없이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누나마저 18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 믿는 집안에 무슨 저주라도 내린 것처럼 끔찍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그는 눈을 다시 보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병원에서 피눈물을 쏟으며 기도하고, 몇 차례 수술도 받긴 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결국 암흑이 그의 눈을 덮었고, 그의 인생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목사님이 그에게 사도 바울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평생 몸에 가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도 극심한 고통때문에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가시로 인한 고통이 그에게 능력이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강영우 군도 사도 바울처럼 될 수 있어요."
이 말씀을 들은 그는 바울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불행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긍정적으로 자기 불행을 극복하기로 마음 먹고는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섬기게 하옵소서. 나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적극적인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던지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가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철학박사가 되어 특인교수가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천사와 같은 아내를 주셨고, 두 아들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이 얼마나 총명한지 다 하버드대학에 들어가서 한 아들은 안과전문의가 되었고, 나머지 아들은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강박사의 이야기를 들은 유명한 빈센트 필(N. Vincent Peale) 목사님이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생애를 알고 나서 아무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산 증인입니다." 그는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에게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안 들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실망하지 마십시오. 긍정적으로 도전하십시오. 일이 잘 안 된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긍정적으로 야베스처럼 도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목사님은 <가능성을 회복하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생은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기도는 인생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합니다.
우리가 야베스처럼 기도할 때 야베스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서,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인생이 바뀌는 놀라운 역사가 가득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