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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주님이 가르쳐 주신 먼저 된자의 길2016-03-2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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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3() 수요예배

본문 요 13: 1-17

제목 주님이 가르쳐 주신 먼저 된 자의 길

 

한국에서 뉴질랜드에 와서 느낀 뚜렷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따뜻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맑은 웃음과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주는 것이 매우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동물들도 이 나라 사람들을 닮아서 귀여운 개나 무섭게 생긴 개나 한 결 같이 헤헤거리고 안깁니다. 무섭게 이빨을 드러내고 사납게 달려드는 개는 거의 보질 못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사는 사회가 험하다 보니 주인들이 교육을 시킬 때 물어, 물어하고 교육을 시킵니다. 주인을 지키는 충성스런 개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뉴질랜드는 안 그렇습니다. 서로를 존중해주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미덕인 사회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단 사람을 존중해줍니다. 인종 직업 성별에 관계 없이 그렇게 대합니다. 그런 점에서 뉴질랜드는 이 세상에 태어나 선천적, 후천적으로 얻어진 것들이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국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 자체를 존중하는 정신풍토가 형성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유교적 정신 세계에서 오랫 동안 형성 된 가치체계가 잔존하고 있습니다. 비록 계급은 없어졌지만 성별, 직업, 인종에 따라 많은 차별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남녀간의 임금 격차가 심합니다. 직업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봅니다. 피부 색깔에 따라 대하는 자세와 마음 가짐이 다릅니다. 또 유교의 질서 의식에 의해 깊게 뿌리 박힌 상하관계, 갑과 을의 관계가 인격적입니다. 직무에 의한 상하관계가 인격의 존엄한 가치보다 위에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래서 직무상 위에 있다는 한 가지 이유로 직무상 아래에 있는 사람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셀 수도 없이 많이 발생합니다. 대한항공 부사장 조윤아씨가 직무상의 힘으로 항공기 승무원들을 무릎 꿇리며 비인격적으로 대한 사건은 실은 극히 일부분이 드러난 것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모습에는 무엇이 결여 되어 있습니까? 한 사람에 대한 존중, 한 인격에 대한 예의가 깊이 결여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의 수단 혹은 자기 목적에 이용되어야 할 물건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화가 바탕이 되고 있는 조직, 기업, 사회에 산다는 가지고 힘있는 자들에는 부려먹고 으스대는 재미가 있는 천국이 될지 모르지만, 가진 게 없고 힘 없는 자들에게는 바로 거기가 죽을 맛인 지옥이 됩니다. 죄가 양산한 악한 가치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가 양산한 악의 가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 왔습니다. 죄가 낳은 악의 가치를 깨트리고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지배하는 새 삶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를 세워 새 삶을 주시고자 하신 목적을 위해 마지막 사명을 남겨 놓고 제자들에게 한 가지를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 식사 중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세족 목요일의 사건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향한 사랑으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줍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후 발을 씻겨주신 의미를 깨우쳐 주십니다

그 의미의 핵심은 이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3:14-17)

 

예수님께서 주이시며 선생임에도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것 같이 제자들도 그렇게 낮아져 서로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께서 먼저 본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손님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주인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천한 일에 속하였기에 노예들만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와 선생이신 예수께서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낮아져 노예의 일을 자취하여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가 놀라 주여 주께서 어떻게 제 발을 씻으십니까?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황송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다른 얘기지만 노예의 신분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 었나를 알게 해주는 고대시대의 모습이 있습니다. 옛날 이집트의 왕실에는 많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왕실이니 일을 위한 노예들이 많이 필요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 중에는 왕 옆에서 모기를 대신 뜯겨주는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모기약이 없었을 그 때 이집트 왕도 모기가 매우 귀찮을 것입니다. 하여 노예들의 몸에 모기가 좋아할 만한 것을 바르고 맨 몸으로 왕 옆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기들이 왕이 아니라 냄새 사는 노예들을 실컷 물어 뜯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이 것이 노예의 신분이요, 노예의 일을 주인이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 노예의 자리에 내려 간 것입니다. 그리곤 그 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곤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

 

이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 이 교훈을 그 마지막 순간에 주신 것일까? 그럴 때 이런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겸양의 미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본성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실 때 7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이 말씀은 베드로가 놀래 아니 어떻게 제 발을 주께서 씻어주십니까?하고 황송해 할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관점으로 예수님이 하는 일을 이해 했습니다. 그래서 그저 놀래고 당황하고 황송하여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깊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듯이 장차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죄를 씻어주실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 주인 죄를 대신 담당하는 노예가 있다면 아무 죄 없이 주인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할 노예처럼, 죄인이 아님에도 죄인처럼 낮아져 죽임을 당하고 그 피로 모든 죄를 씻는 길을 가게 될 것임을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시고는 너희도 이와 같이 서로를 씻어주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장차 주가 죄인처럼 낮아져 죄를 담당하는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간 것 같이, 그렇게 제자들이 낮아져 서로를 사랑하는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교훈의 결론이 13:34-35절로 나타납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듯이, 내가 죄인이 되어 모든 죄인의  죄 짐을 지고 죽음에 이르도록 사랑함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단순히 겸양의 미덕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신앙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본성, 곧 하나님의 본성을 본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주께서 노예가 되고 죄인이 되기까지, 심지어 죽임 당함에 이르기까지 낮아져 생명을 존중하여 섬기는 하나님의 본성을 본 받는 것이 신앙이요, 제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본성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낮아져 섬기는 사랑의 길이 최고의 길임을 알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한 다고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본성은 외면하는 길을 가더란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당시 예수님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던, 서기관들이요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매우 원했습니다. 그래서 경문이 들어간 함을 머리에 되도록 잘 보이게 달았습니다. 게다가 마땅히 자신들이 존경 받아야 할 존재도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가면 으레히 높은 자리를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서 있는 곳에서 긴 옷을 입고 인사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들은 사회 지도층에 있었기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곳에 서서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했습니다. 말은 경건한 척 하고 경을 가르치나 가르친 대로 하지 않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들을 책망하십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저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서기과들과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잘합니까? 하나님 앞에 경건한 척 하는 율법은 잘 지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주 적은 소출이어서 십일조를 떼고 말고 할 것도 없는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까지 떼어 드렸습니다.

 

우리도 어쩌도 푼돈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경우엔 거기까지 십일조를 계산하여 드리고 말고 할 여지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차마 십일조를 거기에서 떼어 따로 둔다는 행동이 자체가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일일 자자른 것을 계산한다는 것이 애매하게 여져질 때가 있기 때문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런 경우에도 철저히 계산해서 아주 적은 양이라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랑을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법을 잘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하나님의 하나님의 법, 세상을 하나님의 가치가 지배하도록 명령하신 정의와 공의와 긍휼의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중하게 명령하신 정의와 공의와 긍휼을 어겼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소중한 인격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신앙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에 관한 일이라면 타인을 속이고 부정한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긍휼이 여기지 않고 자기 유익에 반하면 가차 없이 차버리는 사람들이 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그 속은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다 하며 경건한 자들이라 여김 받던 그들의 모습이 이처럼 기괴한 괴물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왜요? 율법과 관습을 지킨다고 지켰는지 모르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의 본뜻을 헤아리는 하나님의 백성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거짓 된 신앙을 깨트리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잘 못된 신앙을 따르는 자들은 어떤 사람이 됩니까? 23: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신앙으로 악하고 죄로 물든 사람으로 선하고 의로운 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듯 한데 속은 짐승처럼 사람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며 그 중에서도 가장 경건한 자들이라 하는 자들의 모습이었기에, 이런 왜곡된 풍토에 자란 그 제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합니다.

내가 주와 선생일지라도 노예와 같이 낮아져 너희 발을 씻어줌 같이,

 죄인의 자리까지 낮아져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기까지 그 죄를 씻음       같이 너희도 그렇게 낮아져 서로를 섬기라. 너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주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본성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13:35)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입니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서로 사랑 할 때만 주의 제자임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표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본성을 닮은 제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태초에 세우려 하신 하나님 성품을 닮은 그 사람들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목적이 어디 있느냐 라는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의 답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는 답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라는 것이 단순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행하였던 경건, 즉 하나님 앞에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중한 것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임을 깊이 마음에 각인 해야 하겠습니다.

 

이로서 주님이 친히 수건을 두르시고 노예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보여주는 말씀을 통해 사랑하는 제자들이 어떤 제자들이 되어야 할 지를 우리에게 깊이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주님도 낮아져 한 생명 한 생명을 소중히 여겨 높이고 존중하여 섬긴 것 같이, 우리도 나 보다 더 형편 없어 보이고 그렇게 대접 받아 마땅한 사람같이 보이는 하찮은 사람이라도 그 인간됨과 인격을 존중하여 높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섬김을 통해서 인정을 받고 높아지는 이기적 탐욕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주님처럼 한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그 자체에 목적을 둔 모습으로

낮아지고 섬김의 길, 곧 사랑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낮아지기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목적은 없는 것입니다.

 

한때 성공회의 감독이 되기를 꿈꾸었던 사무엘 브랭글이라는 청년이 구세군에 지원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러나 부스 장군은 그의 지원을 마지못해 허락하면서 그에게 겸손한 마음을 키워 주기 위해 다른 훈련생들의 군화를 닦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낙심한 브랭글은 속으로 ‘내가 군화나 닦으려고 내 꿈을 좇아 대서양을 건너왔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어느 날 환상 중에 예수님께서 무식한 어부들의 발 위로 허리를 굽히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저는 그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

 

콜롬비아 신학교 스티븐 올포드 박사에게 학생들이 물었습니다.

“저희들에게 크리스천 리더십의 비결이 무엇인지 좀 말씀해 주십시오! ” 올포드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비결이요? 무릎을 꿇으십시오.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십시오. 그리고 심장이 깨어져도 참으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우리에게 주님의 마음을 전해줍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보는 눈이 주님의 마음이 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자신을 비워 종이 되었고 죄인으로 죽기까지 자기를 타인을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낮아져 발을 씻기심은 바로 그런 눈을 가지고 사람을 높이고 존중하여 섬기는 낮은 길을 가는 사랑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갈 때 앞서 가신 주님이 끝까지 함께 하사 그 길을 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된 제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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