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03㈜부활절 둘째 주일
본문
요 16: 31-33
제목
하나님 자녀들의 승리
지난
주일 말씀 혹시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지 죄 해결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은 시작이라 했습니다.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시작,
곧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되고,
승리한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나라의 복락을
누리는 복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시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나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믿고 죄에서 자유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에 이르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땅에
거하는 동안 우리는 더 이상 내 힘이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권세와 능력과 사랑으로
사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기도
중에 이 사실이 깊이 깨달아질 때 저는 전율을 하였습니다.
무한
감사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다니,
내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다니,
이
세상 그 어떤 왕과 대통령, 억만 장자라 해도 결코 따라 올 수 없고 비교 할래야 할 수 없는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니,
저는
감격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님들의 표정과 반응은 제가 생각 했던 것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이상적인 말만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좀 해보았습니다. 삶의 현실은 빡빡하고 기도해도 잘 안 되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과연 나와 함께 하고 계신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힘든 현실 한 가운데 있기도 한데 말입니다.
사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제는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로 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는 강단의 외침에,
성도들께서는 “아멘”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현실은 눈물
흘리고 한 숨 쉬지 않을 수 없는 아픔입니다. 그럴 때 아무리 귀한 성경 말씀이라도 공허한 소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하십니다.
13장부터 계속 되어 오는 교훈들을 주신 목적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님
묻겠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계십니까?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그 사랑으로 보호 받고 있는 강한 은혜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하신 약속대로 기도 할 때 받고 있습니까?
여기에 계신 분 어떤 분은 아멘 하고 자신 있게 대답 하시겠지만 대부분의 분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말씀의
약속과 우리 자신이 처한 현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어떤 마음이 솟아납니까? “내
기도를 듣고 계신가?
나와 함께 한다는 게 맞나? 과연 나를 인도하는 분인가?” 하는 의심이 솟아 오릅니다.
믿음의 효력이라 할까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이 별 것 아닌 것 같더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항상 사랑으로 인도하시고 함께 계시고 최선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지만 현실은 꼭 그런 것 같지 않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깊은 깨달음으로 감격하고 기뻐할 때 저에게 무거운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장로님께는 말씀드렸습니다만 성도님들께는 처음 말씀드립니다. 고난 주간이었던 지난 주 화요일 저의 아버지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금요일 오후에 들었습니다. 모든 의욕과 기력을 다 잃은 모습으로 겨우 겨우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장남으로서 너무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새벽 이런 질문을 가지고 계속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라고 부름을 받았는데, 왜 우리 아버지께서는 저 고통을 또 다시 격어야 하는가?
왜 그 암을 막아 주시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신데
뭐하고 계신 것일까?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목사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교우들은 과연 지금 도 살아계셔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과연 신뢰 하고 있을까?
우리는 이렇게 신앙의 이상적 가르침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땅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로 따지자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똑 같습니다.
믿는다고
하면 뭔가 더 나아야 하는데, 현실은 믿지 않는 자와 별반 다름 없고, 시련을 격으면 겪었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요, 통치자요, 예수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것일까요?
답은 “absolutely Yes!” “절대적으로 예”입니다.
한국 사촌 여 동생이 있습니다. 믿음이
좋습니다. 착한 신랑을 만났습니다. 결혼을 해서 첫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사의 실수로 아이가 뇌가 다쳤습니다. 몸은 자라는데도 눈도 몸도 가누질 못합니다.
오늘의
주제인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으로 능력으로 인도하고 보호하시는 가에 대한
주제로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왜 믿음 좋은 여동생에게 그런 시련을 겪도록
놔두셨을까? 여 동생도 어려서 병에 걸려 거의 죽어 가는 중에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다고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믿음 좋은 딸의 앞 길을 훤히 열어주시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아들이 머리 좋아서
천재 소리를 안 들어도 좋을 것입니다. 앞길이 분명치 않고, 천재가 아닌 첫 아들이라 한들 식물인간처럼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만큼이야 힘들고 아프겠습니까?
하여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천지를 만드신 권능의 하나님이 왜
막지 않았을까? 왜 믿음 좋은 딸에게 최악의 길을 허락하셨을까? 믿음이
약해서 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동생에게 허락하신 최선의 길입니다.
여기서
최선의 길이란,
하나님이 최선을 다해서 한다고 한 것이 그 정도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최선이란,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실 가장 좋은 길이라는 의미에서 최선의
길입니다. 비록 인간의 실수로 인해서 되었지만,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아픈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 하심으로써 그것을 통해 그 딸에게 주시려는 놀라운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이유는 실은, 우리의 기대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이 내 뜻대로 안 움직여 주기
때문이요, 내 생각과 다르게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그 대표적인 모습이 야곱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아내, 라헬로 부터 낳은 요셉을 잃은 것입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 형들에게 잡혀,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립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노예가 됩니다. 물건에 불과한 그런 비참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최악의 길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3년을 노예로 살아야 했습니다. 요셉이 기대했던 인생과 전현 다른 모습이 그에게 다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뜻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 그 아버지 야곱과 요셉의 형들과 그 가족을 기근의 죽음에서 면케하고 애굽의 보호하에 이스라엘이 번성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몰랐습니다. 이 뜻을 알게 된 것은 요셉이 총리가 되어 아버지와 형들을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말을 들어 보십시요.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창50:20)
못
된 형들은 요셉을 더 이상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팔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셨습니다. 막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억울한 일이 결국 무엇이었다는 것입니까?
“먼저 보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계획이었고,
악을 선으로 바꾸사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게 하되, 400년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만큼 번성하게 하였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된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기 위한
것이 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 큰 뜻을 위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이 가야 했던 하나님이 마련 하신 가장 좋은 길, 최선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입장에서나, 아들을 잃은
야곱의 입장에서는 그 현실이 어떠했겠습니까? 가장 최악의 수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볼 때 최악의 길처럼 보이는 것을 우리에게 놓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해주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는 우유도 주고,
이유식도 주고, 귀저기도 갈아주고 왜만 한 건 다 해줍니다. 그러나 크면 달라집니다. 늘 웃던 얼굴을 무서운 얼굴로서 혼내기도 합니다.
때에 맞는 모습을 가진 사람, 곧 철이 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녀들의 입장에서 그런 얼굴을 볼 때 놀랩니다. 무서워합니다. 그리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엄마는, 아빠를
나를 미워해” 아마 자녀의 입장에서는 화난 부모의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하도 이상해서 부모가 자녀를 해치기도 합니다만, 정상적인 부모의 경우
혼내는 모습이 있다 해도 그것이 다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이 나의 기대와 다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거나 함께 하시지 않는 구나 하고 원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일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최악의 수라고 보이는
것이 실은 그것이 가장 좋은 길, 곧 최선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때 그 숱한 핍박 속에서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사랑하시고 최선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는가”를 고뇌하는 성도들에게 히브리서는 이렇게 답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히12:7b-8)
우리가
하나님의 친 아들이기에 우리에게 그런 시련과 아픔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시련의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
여기에서
“징계로 연단 받은 자들”이란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로 연단 되었다라는 말은, 곧 피 땀 흘려 훈련 하듯 훈련 된 것을 말합니다. 어떤 선수가 나와도 그 선수를 방어하고 제압 할 수 있는 선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성도들은 시련을 통해 훈련됩니다. 믿음을 흔들고 의심하게 하는 시련을 맞서며 강건한 믿음, 정금 같은 순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에게 어떤 열매가 맺힙니까? 의와 평강의 열매입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거룩함과 마음에 깊은 평화가 임하는 평강이라는 열매입니다.
즉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녀가 되고,
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하나님 안에서만 얻는 영혼
깊은 곳에 임하는 평강으로 충만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이는 이러한 모습으로 순교의 길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높은 구원의 목적, 곧 부활과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와 성부와 성령 하나님과 함께
거할 영원하고도 완전한 의와 평강과 기쁨의 나라를 바라보며 죽음도 이기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승리를 우리에게 주시려 하고 그리고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모든 시련을 인하여 견디고 연단되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요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끝까지
순종하는 자녀가 되도록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아들을 주시기까지
한 그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붙드시는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사탄과 악한 영들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도 끊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를 죽음에 내어주기 까지 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크고 강하여 결코 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볼 때 최악의 상황이라고
여겨지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흘러 넘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최악의 상황이 내 앞에 놓여 있다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것이 하나님께서 놓으신 최선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사랑 안에서 허락되고 허용 되어 내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사랑 안에서 내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눈으로 볼 때 최악의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이 우리의 승리를 위한 최적의 수,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도 있고 능력과 권세도 무궁하신 분이라면 쉬운 길을 주시지 그렇게 최악의 수를 주시는가? 물론 하나님은 모든 권세와 능력으로 쉬운 길을 얼마든지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갓난 아기를
돕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애기가 잠 못 들어 칭얼거릴 땐 어머니가
잠 자라고 엎어주고 자장가까지 불러줍니다. 얘기는 잠자는 것 조차 스스로 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스스로 잠조차 못 자는 애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얼른 자라서 엄마가 옆에 누워있지 않고 자장가를 불러주지 않아도 엄마 아빠는 항상 같이 계시다는 생각에 혼자 자기 방에서
잘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떼어놓고 잠을 재우는 훈련을 합니다. 그러나 애기의 입장에서는 공포 그 자체입니다. 최악의 수입니다.
좀더
커서는 엄마 혹은 아버지 한 테 혼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도 부모의 마음의
진실한 사랑은 변함없음을 믿고 따르고 순종할 수 있는 자녀로 자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엄하게 혼내고 뒤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자녀의 입장에서 최악의 수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는 반듯한 사람이요, 어떤 어려움에도 바르게 서서 헤쳐 나갈
자녀가 되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아들, 딸을 향해
놓아 줄 부모의 최선의 길, 즉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훈련을
통해 연단을 통해 자랑스런 아들 딸들로 자라도록 하기 위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악의 수를 놓은 이유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 보기에 좋은 수를 놓을 때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릴 때 그런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 자라기 시작하면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대신 눈물이 쏙 빠지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을 놓으십니다. 그 시련을 통과 할 때 오직 하나님 만이 참 하나님이시요, 참으로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오직 하나님과 그 나라를 바라 보며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들을 주신 그 사랑의 변함없음 안에서 최악의 수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것이 내 눈에는 최악의 수이지만,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이 길은 최선의 길이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통치 하심 하에
있고 우리는 그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최악의 상황이라 여기고 울고 불고 난리를 칠 필요 없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인생을 포길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될
대로 되라지 하고 술 퍼먹고, 놀음하고, 색을
탐하는 타락의 길을 갈 필요가 없습니다. 부인이 안 이쁘다고, 남편이
못났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악의
수라고 보이는 그 수가 정신차리고 보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없는 사람들처럼 헛된 것에 돈과 정신과 몸과 마음을 잃고 방황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탁 나가 아버지께 나아가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볼
때 지금 상황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신 것을 볼 때 특별한 뜻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할 것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옵소서. 이 최악의 상황을 통해 나의 믿음을 타락하게 하려는 사탄의 계획을 깨트리고 승리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행해야 할 길을 보여주십니다. 깨우쳐 주십니다.
그러면
힘들기 하지만 성도는 그 길에 필요한 것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붙드사
결국에는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기에 사업이 어렵다, 자녀들이 잘 안 된다, 영주권이 안 나온다 할 때 그 괴로움 왜 없겠습니까마는 그것으로 인하여 타락하거나 낙심 하지 말 것은 그것 안에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고, 그것이 최선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부께서 성자 예수를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요단강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임하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 잘 자라나는 자녀들은 보기만 해도 기쁘고 사랑스럽습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 간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의 연합입니다. 그러니 성자 예수를 얼마나
사랑 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는 성자를 세상에 보내 놓은 것도 그렇지만,
이 땅에서 마지막 3년은 예수께 있어서 최악의 길이 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창조한 사람들, 그것도 자신이 택한 이스라엘, 그것도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다고 여기는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 수치와 치욕 속에 십자가에 처형을 받아 죽임 당하는
최악의 수였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 이었음에도 그 아들 앞에 놓인 수는 최악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힘든 길이었으면 예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낙심하여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구나 하고 겟네마네 동산에서 내려와 진탕 술 퍼 마시고 주정을 했습니까?
아니면 그런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났다고 하며 스스로 자신을 해쳤습니까? 아닙니다. 성부께 버림당해도 불구하고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과 사탄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자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뜻대로 되었다. 귀찮은 일이 사라졌다. 우리가
이겼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요, 자신이 죽음으로 모든 죄인을 살리기 위한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죄와 사탄과 죽음을 깨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최선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승리한 것입니다. 이 승리를 제자들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승리가 앞에 있기에 평안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현실이 어떻습니까? 원치 않는 현실 앞에서 아프고 힘들지요?
하나님이
때론 무심하다 십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을 주시는 사랑 안에서 우리를 위한 최선의 길을 놓아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도리어 승리를
주실 하나님을 바라고 조용히 하나님을 뜻을 찾아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을 주셨습니까"가 아니고, "이 때에 제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회개를 말씀하시거든 회개를, 내려 놓으라 하시면 내려
놓음의 길을, 십자가를 지라 하시면 십자가를 지는 길을, 버리라 하면
버리는 길을 가는 것이요, 참으라 할 때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서 그 순종을 통하여 우리를 이끌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이끄사 마침내 평안과 승리를 주시고, 영원한 나라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복을 다 받으시고 누리는 성도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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