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자의 믿음, 그 새로운 미래”(로마서 8:31-39)
베트남 전쟁 때 있었던 실화입니다. 전투상황이 아주 불리해져서 후퇴를 하는 중에 한 병사가 뒤에서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안전지대로 대피한 중대 대원 중에 한 사람이 “저 총에 맞은 저 병사는 내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구출하러 가야겠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듯 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이 친구는 총에 맞은 자신의 친구를 구출하기 위하여 그 무서운 장소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중대장은 말렸습니다. 안된다고. “그렇게 하다가는 자네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어. 위험하다. 그리고 망원경으로 보니 자네 친구는 죽었어. 그러니까 무모한 짓은 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는 자신이 반드시 가야 된다고 중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그 전쟁터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친구를 등에 업고 부대로 돌아왔지만, 생각대로 친구는 죽었습니다. 업혀 오는 동안에 죽었습니다. 그 때, 중대장이 말합니다. 그것보라고 왜 고집스럽게 쓸데없는 일을 했냐고 했습니다. 그 때, 이 수고를 아까지 않은 병사는 말합니다.
“아닙니다. 내 친구는 내가 등에 업어서 이리로 데려올 때에 내 등에 업혀서 말했습니다. ‘네가 올 줄 알았다. 네가 반드시 올 줄 알았다. 나는 너와 같은 친구가 있으니 참으로 행복했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해 본 일이 있습니까? 누구의 사랑을 받아 본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바로 그 같은 친구를 가졌기에 그 사랑을 경험했기에 그 사랑에 감격했기에 죽어가는 이 친구는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살고 죽는 일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살고 죽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물질이다 성공이다 번영이다 자유다 하며 말과 문제가 많지만,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도 살고 죽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해갑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본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세 가지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은혜의 승리, 둘째는 의의 승리, 셋째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오늘의 메시지를 받겠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은혜의 승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은사로 모든 것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은사로 주신다. 그럼 우리 편에서는 은사로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은 깨닫고 감격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있습니까? 은혜를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압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라는 분은 심지어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내 마음대로 안된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나는 망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잘 되는 일이건 안되는 일이건 때로는 우리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 은사로 주신 것입니다. 생각하면 기적과 같은 은혜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까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왜요? 아들은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독생자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다면 모든 것이 어찌 주신 바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은혜를 아는 순간, 은혜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의의 승리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죄의 대가를 그가 치르시고 우리를 의로 싸서 의로 옷입혀서 당신의 자녀로 맞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탕자가 돌아옵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돌아오는 이야기를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저는 그 성경을 볼 때마다 내가 아버지 입장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떠오릅니다. “그러기에 내가 집을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니? 네 잘못을 이제 알겠니? 종아리 걷어.” 그러나 성경에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 아들은 수치심, 죄책감, 자괴감 등 때문에 조용히 집을 나가서 자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탕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로지 아들로. 그래서 “잃었다 얻었노라. 죽었다 살았노라. 내 아들이 돌아왔다”하며 환영한 겁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의를 줘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죄인으로 맞이하는 게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의인으로 맞이하고 사랑으로 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롭다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그 모든 부족함은 내가 대신 지불하고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자로, 가장 깨끗한 자로, 가장 의로운 자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얻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것이 의롭게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의의 승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종일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이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 사랑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순교하게 됩니다. 아무리 비참하게 죽어도 사랑이 있고, 아무리 어렵게 고생을 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의 승리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러분, 진짜로 사랑하면 병도 이깁니다. 원수도 이깁니다. 의심도 이깁니다. 죄를 이깁니다. 위대한 역사를 이룹니다. 우리가 약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끊으리요. 그가 나를 의롭다 여기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당당하게 그리고 그 사랑을 깊이 간직하고 충만한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여러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감행했을 때, 여러 가지 적이 많고, 비난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루터를 힘들게 했던 것은 루터의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자꾸 마음 속에서 메아리치는 거에요. <너는 죄인이다. 죄인이 어떻게 종교개혁을 하느냐? 너는 더러운 존재다.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이냐? 너는 허물이 많다>.
그는 자기와 더불어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승리했습니다. 그 승리의 비결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는 <너는 죄인이다>라는 메아리를 들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통해 역사하신다>.
이렇게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절대적인 은혜에 대하여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대항했을 때 그는 자기 마음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이 믿음으로 자기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 여겨주신 의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여러분, 이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큽니까? 그래서 그는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사건에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대한 믿음, 나를 의롭다 여겨주신 것에 대한 믿음, 독생자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에 대한 믿음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교인들만 의인이고 세상 사람들은 다 죄인이라고 말하는 줄 압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깨끗한 줄 알고 잘난척 한다고 말합니다. 이건 잘 모르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인이란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알고 신앙생활하면 그 때부터 삐뚤어진 신앙생활을 하고 맙니다. 교만이 싹틉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의인이란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입니다. 흠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흠들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옷으로 덮여져서 흠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걸 알면 겸손해져야 합니다.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옷이 손가락질 당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여러분,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종교개혁은 엄청난 일입니다. 1500년대, 그 때가 어느 때입니까? 온 세계가 로마 카톨릭의 손 안에 있을 때입니다. 이걸 대항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가능케 할 수 있었던 것은 루터의 자기개혁 때문이었습니다.
개혁이란 운동이 아닙니다. 제도로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자기개혁을 이룰 때, 거기서 그 감동이 번지고 퍼지고 그래서 개혁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개혁은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신앙개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생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을 깨닫고, 그 힘이 내 안에 들어올 때 내 인격을 변화시키고, 내 생각을 변화시키고 마침내 개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해밀턴한인교회를 생각합니다. <행복한 삶, 건강한 교회>. 저는 이렇게 바꿔보고 싶어요. <개혁하는 삶, 개혁하는 교회>. 거저주어지는 것입니까? 아니요. 개혁 없이 어떻게 행복한 삶이 가능합니까? 개혁 없이 어떻게 건강한 교회를 세워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 개혁되었습니다. 개혁하고 있습니다. 개혁해야 합니다. 개혁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사로잡았던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엄청난 진리를 깨달으면서 그 진리가 루터를 사로 잡았고, 그 생명력이 폭발할 때, 그가 수도원을 뛰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격이 변화될 때 그 감화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성원하고 협력하고 마침내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제가 겉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를 아직 안 믿으십니까? 예수 그 이름이 은혜입니다. 예수 그 이름이 의의 옷입니다. 예수 그 이름이 사랑, 그 자체입니다.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대한 믿음, 나를 의롭다 여겨주셔서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대하신 것에 대한 믿음, 독생자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에 대한 믿음 위에 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개혁자들입니다. 오늘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이해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신 말씀을 붙들고 살아, 이 믿음을 가지고 내 삶 속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지역사회에서 시대의 개혁자들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은혜, 오직 의, 오직 사랑에 대한 믿음. 새로운 미래가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생은 소중합니다. 이 믿음을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