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2(주)주일예배 본문 눅 24:44-48 제목 새로운 창 3 지난 주 말씀을 들으시면서 혹 의하게 여기신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 잠시 부연하여 말씀을 조금 드리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지난 주 말씀 중에 빛의 속도로 140억 광년이 걸리는 이 광대한 우주 어느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느냐? 없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지금 천국은 없고, 죽은 자들도 그냐 죽음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기는 제가 ‘이 우주 어디에 천국이 있겠느냐 없다’라는 는 표현은 ‘현재 천국이 없다’는 표현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이 우주 어느 곳에 존재하는 그런 형태의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하늘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씁니다. 주기도문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듯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이 ‘하늘이“ 바로 천국입니다.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늘‘은 3주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보는 이 하늘, 이 우주 어느 공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 예수님이 부활하사 승천하여 계신 곳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바로 “하나님 차원의 세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1차, 2차, 3차, 4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존재는 하지만 우리가 보고 느끼고 경험하기에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이해가 안된다고 해서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 나의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차원의 세계를 말합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계시록에 의하면 24장로가 있고, 하나님의 속성을 대표하는 네 생물이 있고,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있고, 새예루살렘이라 부르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날마다 하나님과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사 승천 하신 어린 양 예수를 찬양하고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예배와 찬양과 하나님의 영광이 늘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예를 들면 네 생물들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4:8) 이렇게 우리가 보지 못하나 실재하는 하나님 차원의 세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계시고 24장로와 네 가지 생물 같은 존재와 천사들이 있습니다. 2차원의 세계, 3차원의 세계, 4차원의 세계에 갇혀 있는 보통의 사람들, 특히 실증주의와 합리주의자들의 후손들은 알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계를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3:43절에서 회개하는 강도에게 “내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에서 낙원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2:7절에서도 예수께서 요한에게 하신 말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먹게 하리라”는 말씀에서 낙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곳에 우리 보다 앞서간 성도들이 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파라다이스, 낙원인 곳이요, 천국입니다. 육신의 모든 고통을 벗고 영으로 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무한한 평화와 복락은 누리는 곳입니다. 이곳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와 사탄을 깨끗이 정리하고 이루어 주시려는 구원의 큰 비전은 이 천국으로 우리를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천국은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완전히 새롭게 갱신되고, 보이지 않으나 실재하는 하나님 차원의 세계가 이 갱신된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함께 임하시고 영으로 하늘에 있던 앞서간 성도들도 함께 와 육신을 가진 몸으로 새롭게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새롭게 된 몸으로 살아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낙원 패러다이스의 삶을 여기에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누구나 그토록 원했던 그 나라가 여기에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교독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이 완성된 나라 위해 메시야가 올 것이고, 그가 고난을 받을 것이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미리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44절에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 된 모든 것”이라는 말씀에서 율법은 모세 오경, 선지자들의 글은 이사야 에레미야와 같은 선지서, 시편은 욥기, 시편 잠언 같은 시가서”를 말합니다. 이는 당시 구약성서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구약성경을 “구약성경”이라고 안했습니다. 율법서(토라), 선지서(네비임), 시가서(케투빔)의 첫글자를 따서 “타나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토라, 네비임, 케투빔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란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타나카라는 구약성경은 “다 메시야, 곧 예수를 가리켜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 이신 예수에 대해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라는 말씀처럼 그 예언이 모두 완성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경은 어떤 위력이 있을까요? 히브리서 4:12-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나타니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 것 벗은 것 같이 드러나니라”
이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모든 죄가 낱낱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이차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을 밝힐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낙심과 절망과 질병과 상처와 미움 권세를 깨트리고 나를 살리는 권세가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모세의 지팡이를 부러워합니다. 내 손에서 바로를 꼼짝 못하게 그 지팡이가 있다면, 절망의 홍해를 가른 그 권능의 지팡이가 내게 도 있으면... 나도 이러고 있지는 않을텐데 하고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기뻐하시고 춤을 추십시오. 우리겐 모세가 가지고 있던 그 지팡이 보다 더 권세 있고, 더 능력 있는 말씀의 지팡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손에, 우리 가슴에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할레루야!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이 임하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세속과 욕망과 죄와 낙심과 우울과 고통과 상처와 실패와 두려움의 권세가 깨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부활의 의심을 깨트리고 확신에 이르는 권세로 나타났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떻게 이 권능의 말씀을 대하여야 할까요? 45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은 우리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해주셔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는 간절한 사도함과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내게도 오셔서 눈과 마음과 귀와 가슴과 영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를 고쳐 거룩한 군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약하나 하나님의 권능으로 채움을 입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상처가 싸매어 지고 자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울과 절망에서 벗어나 소망의 춤을 추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질병의 권세를 능히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기에 이 경험을 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고잔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119:50)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 들을 때, 묵상할 때 찬양의 가사를 고백 할 때 제게 말씀의 권능으로 임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겐 내에 있는 모든 사탄과 죄와 세속과 우울과 낙심과 상처를 깨트릴 권능의 말씀의 지팡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46-47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에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깨우쳐 주셨는지가 나옵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는 다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시편 22:1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죽으시기 전 이 말씀을 그대로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나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로써 시편 22:1절과 그 이하의 내용에 표현 된 고통이 예수님의 고난을 예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메시야의 고난이 보다 구체적으로 예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생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이렇게 구약성경은 메시야의 고난을 이렇게 예표했고, 예수님은 그 것이 바로 자기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둘째,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다는 부활입니다. 시편 16편 1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안으실 것임이니이다.” 또 이사야 49:15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여기에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신다”라는 표현,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라는 표현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25-28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가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의 부활이 이미 구약에 예표 되어 있었고 그대로 되었다고 증거를 합니다. 나아가 예수를 극 혐오하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바울이 고전 15:4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처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자신이 죽었고 부활해야 할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셋째,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 된다는 세계비전에 대한 말씀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것도 이미 구약성경에 예표 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 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리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 이처럼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땅 끝까지 전파 되어야 할 구원의 소식이라고 제자들에게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하시며 세계 비전을 주십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죄사 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증거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왜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이 예수로 말미암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증거하라 했을까요? 아담과 하와의 죄 이후 그 모든 후손과 인류에게 죄와 죽음이 지배하고 자연도 피조물도 신음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그 죄가 만들어 내는 죽음의 문화로 인해 모든 인생이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시편56:8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잘 못이 없음에도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피해 도망 다녀야 하는 고통과 아픔을 이렇게 표현 한 것입니다. 왜 우리는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싸울까요? 왜 우리는 한 쪽 눈만 가진 사람처럼 편협할까요? 우리는 교묘하게 서로를 속여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 안에 죄가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만이 주시는 거룩하고 자비로운 은혜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에 갈 때 식사를 든든히 하고 가면 제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면 세상의 모든 시련, 유혹, 고통, 눈물을 다 이길 수 있고, 더 나아가 아프게 하는 사람마저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있는 것 같은 아무 것도 없는 우리는 서로 가시처럼 찌르데는 박사 학위 급 수준이고, 품고 안아주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화목하는데는 유치원급 수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안에서 나의 모든 죄가 용서 받고 새롭게 되는 자아 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깊은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은혜를 덧입을 때 우리는 강도만난 자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인처럼, 이 땅에 영혼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고, 이 땅의 눈물을 닦아주며 용서와 화해와 화목의 길을 갑니다. 우리 영혼이 그토록 바라던 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회개와 용서의 은혜가 모든 영혼에게 깊이 임할 때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그 나라를 함께 세우는 것입니다. 세상이 진정한 나라가 되는 길이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비전을 제자들에게 지금 심어주고 계십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렇기에 이 시대 이 도시를 향하여 우리가 찾는 그 나라가, 그 삶이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뜨겁게 외쳐야 할 이유가 있고 외쳐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제 새 창, 새 눈을 가졌습니다. 예수 안에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그 나라의 길이 있음을 본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바로 이꿈, 이 세계비전을 위한 부름입니다. 우리의 삶과 의미가 가장 존귀한 것이 되게 하는 바로 그 비전입니다. 여러분이 일하는 곳, 가정에서 이꿈을 품고, 이 비전을 위해서 기도하고 일하십시오. 우리는 이꿈을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