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1(주) 주일예배 본문 빌립보서 3:20-21 제목 하나님 나라를 예견하는 교회 1 목적 하나님 나라를 예견하는 교회가 믿는 바를 분명히 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는 흔히 4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는 아니지만 마지막 4절은 흔히 천국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천국이란 단어가 들어간 곡을 부를 때 마다 죽음 이후 우리 영혼이 저 높은 어딘가에 있는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자주 부르고 또 좋아하는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세계”곡의 4절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내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올 때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리” 이 곡의 경우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나를 불러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오시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장례예배에서 부르는 찬송가 중에 “천국에서 만나보자”라는 480장도 1-3절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1절 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거기서 순례자여 예배하라” 이처럼 “천국에서 만나보자, 천국 문에 이를 때, 기다리던 성도들과 그 문에서 만날 때“라는 가사들은 한 결 같이 죽으면 몸 없는 영혼이 들어가는 천국으로 묘사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찬송가를 부르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천국은 죽으면 영혼이 들어가는 곳으로 이해하고, 이 땅의 삶은 어떻게 해서든지 믿음을 지키다 떠나야 할 땅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찬송가사들의 묘사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정확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역사의식, 즉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펼쳐나가시는 History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는 성도와 교회를 양산하였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결혼, 성공 등 세속적인 복을 얻는 길이라며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나의 성공, 우리 집의 성공, 내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 믿어야 할 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개인의 세속적 욕구를 채워주는 신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생사화복이 주권자 이신 하나님께 있기에 이런 복을 위해 비는 것이 꼭 잘 못 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개인의 세속적 욕구를 채워주는 정도의 저급한 신으로 전락하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실하게 믿음 생활하는데도 직장도 안 잡히고, 결혼도 잘 안되고, 생기지 말아야 할 엄청난 고통을 경험할 때 자칫 믿음이 어린 사람들은 쉽게 하나님을 버립니다. 이것이 거짓 복음이 갖고 있는 함정입니다.
우리는 이 더러운 때를 벗어야합니다. 어떻게 벋길 수 있을까요? 한 가지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것입니다 즉 성경속 하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정확이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관점에서 초대 교회가 믿는 바가 무엇이었는가를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그에 대한 교회의 기다림과 다시 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많은 한국 크리스찬들, 또 서양을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을 이용하여 말씀을 증거 한다 해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속하였다는 점만을 강조하여 말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초대교회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했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이 본문에 대해 이름을 붙이자면 마지막 때, 곧 종말론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살기에도 바쁜데 종말론이 대수냐 하는 관점이 한국 교회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말론적 신앙이 무엇이냐에 따라 이 세상의 삶이 달라집니다. 인생의 종말, 역사의 종말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가 현재 생애를 결정하는 기준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쉬운 예가 일기예보입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해밀턴 가든에서 야외예배를 기쁘고 즐겁게 가졌습니다. 맑은 날씨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야외예배 전날인 토요일엔 바람 불고 비가왔습니다. 해서 다음날 야외예배 가는 것이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날 2시경 과감하게 카톡을 날렸습니다. “내일 8시 이후에는 비올 확률이 없습니다. 내일 해밀턴 가든에서 뵙겠습니다.” 토요일의 상황을 봤을 때 모든 것이 불확실한데도 저는 무엇을 믿고 그렇게 과감하게 했을까요? 바로 일기예보입니다. 일기예보가 내일은 오전 8시 이후에 비올 확률이 0%라고 분명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가 믿지 못했거나, 알지 못했다면 아마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오늘 일기로 미루어보아 내일 맑은 날씨를 장담 할 수 없으니 교회당에서 예배드리겠습니다.” 이처럼 앞으로 있을 일이 오늘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죽음 이후에 대한 믿음이 오늘을 결정하는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이 오늘의 삶을 결정합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삶이 전부인 줄 알고 이 세상이 가치있게 여기는 것 곧 썩어질 것을 쟁취하는데 목숨을 걸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예 안중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와 예수께서 전해주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깨달은 교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늘이란 저 공중을 말하지 않습니다. 죄가 지배하는 이 땅과 대비된, 하나님께서 의로 다스리는 거룩한 나라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소속이 하나님 나라요, 그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당연이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시민으로서의 삶, 즉 이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죄와 불의와 부도덕과 탐욕과 분당과 미움과 싸움의 길을 버리고, 의의 길, 화평의 길, 거룩한 길을 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새로운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 어떤 성도들은 옛 삶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고 바울이 오늘 본문 앞서 18-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예수님의 그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그 뜻을 버린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이 서신을 통해 교회인 우리들이 속한 나라가 어디인가를 다시금 상기하여 눈물 흘리며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이 특별하다 하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교회인 우리의 소속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와 함께 오늘 본문의 중요성은 두 번 째 주제인 교회가 기다리는 대상이 무엇인가에서 드러납니다.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는 대상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구원하는 자”라고 씁니다. 즉 성도들인 우리를 구원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가진 의미는 이미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구원이 임했지만, 그 구원이 완성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되었지만 하나님 나라 시민다운 완전한 모습에 아직 미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듯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에도 그에 걸맞지 못한 연약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시민,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완전함에 이르도록 하는 마지막 구원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도 연결 되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현되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우리도 완전함에 이르는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피조물도 완전한 구원, 즉 회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과 모든 불의가 깨트려지고 하나님의 의와 평화가 지배하고, 만물이 새롭게 된 하나님의 두 번 째 창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우리에게 이 땅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이룰 자가 누구라는 것입니까? “하늘로부터 구원하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이 구원자를 기다린다는 표현입니다. 이 의미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를 정말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고 있나?” 아마 자신 있게 답을 못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간단한 질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쉬운 질문이 아닌 차원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교회 가르침의 영향이 더 클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류교회는 사도신경을 따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고 고백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정말로 믿고 있지는 않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에 쓰여 있으니 따라서 하는 고백이지 정말 그걸 믿고 고백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설령 믿는 자 할지라도 그 다시 오심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역사적으로 이루어질 실재임을 믿고 고백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A.D. 150년 이후 물질을 저급하고 악한 것으로 보는 영지주의 영향으로 인하여 교회는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기 보다는 ”더러운 육신을 벗고 어서 저 천국에 들어가야지 하는 소망”을 붙잡게 되었기 때문입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성취 될 21절에 묘사 된 완전한 구원에 대한 꿈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진정하고도 완전한 구원에 대한 꿈은 사라지고 “육체 없는 영혼이 들어가는 듯한 저 천국을 그리는 찬송가”가 우리 찬송가의 4절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초대 교회의 믿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초대 교회는 “승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완전한 구원을 성도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게 이루어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기다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데려갈 자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완전한 몸으로 변화시켜 완전한 새 삶을 살게 하실 그리스도, 구원자, 주 예수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 말씀과 더불어 보아야 할 말씀이 요한계시록 21장 말씀입니다.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많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처음 하늘과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표현을 “우리가 보는 이 현실의 땅과 우주가 다 멸절 될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현실 세계, 즉 죄와 악으로 오염되고 상하고 깨진 이 세계”가 완전히 새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계21: 5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는 이 말씀에서 이 우주를 날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깨지고 상한 이 우주를 새롭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가 선했던 그것대로 다시 회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 번 째 창조라고 합니다. 그런데 2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하늘에서 뭐가 내려온다고 했습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새 예루살렘이란 구약시대의 예루살렘과 연결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도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특히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생각하게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새 예루살렘이란 어떤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이 땅에서 부름 받은 성도들인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물리적으로 새롭게 된 예루살렘, 혹은 교회라고 보던 간에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차원의 나라에서 이 땅에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실 완전한 구원은 우리를 하늘로 올려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땅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초대 교회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오셔서 얼른 데려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찢기고 상한 이 땅을 회복시킬 예수, 앞서 죽었거나, 아니면 오시는 그날에 살아 있거나 하는 성도들을 완전하게 회복하실 예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오시면 이 땅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완전히 새롭게 된 세상이 됩니다. 모든 피조물이 신음에서 벗어나 창조된 영광을 누리며 사는 땅이 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실현 된 땅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와 평화와 영광으로으로 충만한 파라다이스, 에덴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 세상이 존귀하게 여기는 갑질, 거들먹거리는 사람, 돈과 힘이 있다고 똥 폼 잡는 사람, 배웠다고 뭣 좀 안다고 고개를 빳빳이 드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병들어 고생하는 것, 애통하게는 것, 죽음의 절망도 없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종말을 맞습니다. 다 제거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하나님 나라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죄와 그 죄가 낳은 인간의 탐욕과 그 탐욕이 낳은 모든 불의와 악은 완전히 멸망되고, 상처는 치유 된 하나님의 완전한 의와 평화와 기쁨이 충만한 세계가 여기, 이 땅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바로 이런 나라를 주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고, 그 이루어질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예견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 복음이 가진 힘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의 다시 오심으로 이 땅이 새롭게 되어 완전케 될 이 구원을 예견하는 자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다가올 새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에 맞게 사는 공동체 인 것 것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로 물들기 전초대교회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다시 오실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 같은 경우 예수를 모를 때 쌓았던 모든 세상의 스펙을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추구하는 세속적 욕망의 삶을 다 버린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 세상이 중하게 여기는 소유의 가치를 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더 중한 것은 소유의 가치가 아니라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것을 주는 것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아프게 하고 욕되게 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고 품는 사랑의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새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를 거부하고 의의 길을 간 것입니다. 나아가 십자가의 예수, 부활하신 예수, 다시 오실 예수와 그 예수로 시작 된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짐에서 고통에서 죽음에서 자유케 되는 하나님 나라가 믿는 자에게 임하는 천지를 뒤 흔드는 이 놀라운 소식, 복음을 들고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산 것입니다. 왜요? 예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 되었고, 이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며, 그 때 하나님이 완전한 통치로 임할 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을 믿었고 예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변함없이 주를 따라 걸어갈 때 거기에 성령의 함께 계심의 역사가 임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길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진리위에 서서 다가올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예견하며, 세상에 오염 된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붙들고 사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교회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신을 주심 같이, 우리도 이 뜻에 우리를 드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