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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성령을 따르는 삶(롬8장 1-8절)2010-06-28 14:13
작성자 Level 10

지난 6월 10일 한 위탁모에게 맡겨졌던 4개월 된 영아가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아이를 위탁을 받아 기르던 위탁모의 잘 못된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이 위탁모는 아이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입양되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도 좋은 집에 입양되어 훌륭하게 자라게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이 현실이 되게 하려고 자기 신념에 따라 이 아이를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신념이 문제 였습니다. 이 위탁모의 신념은  ’2일 동안 금식하면 평생 건강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위탁모는 이 신념에 따라 겨우 4개월 된 영아를 이틀간 물만 먹이고 아무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위탁모의 소망과는 정 반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불행스럽게도 2틀 뒤에 이 아이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어지간하지 않고는 보통 자기 삶에 대해 진지합니다. 잘 못된 인생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비록 남들 보다 뛰어나지 못할지라도 성실하게 살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위탁모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위탁모들은 대개가 아이들에 대한 정과 사랑이 많은 분들입니다. 그렇기에 때문에 그 힘든 일을 맡아서 하는 것입니다. 말 못하는 어린 것이 기운이 하나도 없고 먹지도 못하고, 먹으면 토하고, 설사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게다가 열이 40도 가까이 올라갈 때 부모의 마음은 너무나 힘들고 아픕니다. 모든 신경이 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이 되고, 집안은 깊은 두려움과 침묵에 빠집니다. 아이가 웃지 않고 생기를 잃는 모습에 모든 일이 기쁘지 않습니다. 위탁모가 된다는 것은 이 짐을 지는 것입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 없이 못합니다. 희생이 없이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귀한 마음을 가진 이 위탁모가 그만 아이를 위한 다는 것이 그만 아이를 죽게 하는 결과를 빚었습니다. 잘 못된 신념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잘 못된 생각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잘 하고 싶습니다. 훌륭한 인생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을 소망찬 인생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위탁모가 자신에게 맡겨진 이 아이를 평생 건강하게 잘 자라는 아이로 만들고 싶은 것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을 그렇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소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인생으로 끝마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잘 못된 신념과 가치를 마치 옳은 것인 양 따랐기 때문입니다.


잘 못된 신념을 버리지 않고 따를 때 개인은 물론이요 한 집안이, 한 나라가, 아니 온 세계가 거대한 절망과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히틀러의 잘 못된 신념에 독일의 국민들이 열광하였습니다. 독일 민족은 순수한 피를 가진 우수한 민족이요 모든 민족들 위에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하자 1차 대전의 패배의식과 경제적 문제의 고통에서 시달리던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를 마치 구세주와 같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를 진심으로 그들은 따랐고 존경하며 마지않으며 ‘하일 히틀러’ ‘우리의 구원자 히틀러’하면서 그들의 운명과 모든 권한을 히틀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게르만민족의 순수 혈통과 우수성을 드러내고 지킨다는 명분으로 세계 2차 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자신들의 유일한 대적 세력이 될  수 도 있는 유대인들을 없애기 위해 말살 정책을 펼쳐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집단학살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올해는 6 25전쟁이 일어 난지 60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잘 못된 신념을 가지고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을 침공했습니다. 김일성의 신념은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면 이 땅에 지상낙원이 건설 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사회를 이루어 모두가 함께 생산하고 함께 나누어 똑 같이 평등하게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보면 그럴듯한 철학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철학에 충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철학의 문제는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제도적으로 평등한 구조를 만들면 그렇게 될 것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심각한 오류는 이러한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여 지상낙원을 세우려 할 때 반대하는 자들과 세력들이 있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격려가 아니라 거짓과 위협과 협박으로 나중에는 생명을 빼앗는 것 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을 무시한 공산주의 지상낙원 건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수립해야 한다는 중대한 오류의 신념을  가진 김일성과 그의 추종세력들이 통일이라는 그럴 듯한 구호 하에 남한 침공하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남과 북의 산하는 초토화 되었고, 남한 군인과 유엔군 중 77만명이 죽거나 부상, 북한과 중공군 중 2백만명 사상자 발생했고,  250만의 민간인이 죽었습니다. 320만명에 달한 피난민이 발생했고, 30만명의 미망인이 발생했고, 10만 명의 고아가 생겨났습니다.


성령을 따른 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잘 못된 신념, 가치, 철학을 버리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를, 이 사회를,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길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 하나님과 그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긴 역사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어디쯤 서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우주와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저버린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이후 죄로 물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조차도 하나님을 저버리게 되자 하나님께선 마지막으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당신이 바로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구원자요 메시야임을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제자들에게 맡기시고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약속과 같이 성령께서 임하시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구원의 사명을 감당할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세속적인 역사가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들 예수를 주기까지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너희가 다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어야 할 것이로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막13:26-7)


여기서 ‘그 때’ 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마지막 심판이 있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가 올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택하신 성도들을 온 땅에서 부르실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류의 역사에 마지막 때가 있을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는 마지막 때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느 지점에 있습니다. 그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부탁하신 사명을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왜 교회가 되어 존재하는 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줍니다. 그것은 지금 이 곳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하기 위해서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일원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고 충만하여 교회에게 부탁하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먹이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한 교회를 이루고, 이웃에게 은혜 안의 새 삶에 대한 소망을 주며, 생명의 복음을 주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오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감당하기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 곧 헤밀턴 한인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그 때가 이르기 전, 남은 주님의 구원의 사명을 마져 감당하기 위해 우리가 교회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처럼 위대한 사명이 있습니다. 멀리 이국땅에 와서 뜻 없이 고생하고, 뜻 없이 공부 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을 따르지 않고 잘 못된 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죽음의 길을 따름으로 자기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게 만드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외로움과 눈물 나는 뼈아픈 일도 참는 것이요, 듣는 것도 안 되고 말하는 것도 잘 안되지만 나에게 부여하신 이 세상을 바꾸라는 위대한 꿈을 감당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 꿈이 있기에 성도는, 교회인 우리는 내 기분대로 몸을 함부로 아무데나 방치 않고, 헛되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헛된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함부로 유린하지 못하도록 거룩히 지킵니다.


거짓되고 잘 못된 신념과 육신의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생각이 나를 지배하도록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구합니다.


왜곡되고 비뚤어진 감정과 정서가 나의 본분과 사명을 망각하게 하고 방탕한 사망의 길로 끌고 가려고 할 때도 단호히 ‘안돼, 노!’라고 말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특히 교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성령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어 행동합니다.

말을 한 마디를 할 때도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이 아니면 삼갑니다.

어떤 작은 행동 하나도 세심하게 상대방을 배려합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에 충실 되게 순종합니다.


직장에서의 일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하루 하루의 일이 무의미한 시간의 지나감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부탁하신 사명을 이루는 의미 있는 사역이 됩니다. 누가 보던 보지 않던 간에 하나님 앞에 있는 것 같이 행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표정과 말과 행실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공부에도 목표가 주어집니다. 이유가 생깁니다. 단순히 내 목표가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공부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공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학과와 대학을 결정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성령을 따르는 삶이 주는 열매들입니다. 이 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잘 못된 신념과 철학을 하나님의 생각과 뜻으로 바꾸사 새로운 삶의 열매가 맺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생명의 길을 가기를 원하십니다. 나아가 이 세상을 성령의 생각으로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길을 갈 수 있을까요?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길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 게세마네 동산에 오를 때 깊은 고뇌와 슬픔에 젖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죽음 앞에서 깊은 고독과 슬픔과 고뇌에 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주님은 겸손히 하나님 아버지를 찾습니다. 기도합니다. 그리고 간구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이렇게 세 차례 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헤아려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자신의 두려운 욕심에 당신을 내어주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놓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셨고, 이 숭고한 순종의 죽음이 우리를 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뜻을 물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성령의 생각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길은 하나님께 나아가 묻는 것입니다. ‘나의 이 신념과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인지요?’ 하고 묻고 기도 할 때 성령께서 그 답을 깨우쳐 주십니다. 성령의 생각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누구라도 이와 같이 성령의 생각을 좆는 삶이 가능합니다. 찾는 자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 길은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성령님 말씀을 대할 때 저를 깨우쳐 주소서’하고 기도하고 읽기 시작할 때 성령께서 필요한 말씀을 마음에 깨우쳐 주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의지하게 하고 우리의 길의 등불이 되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말씀에 그 마음을 두고 새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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