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40일 금식 후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는 장면입니다.
첫째 시험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시험입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라’. 40일 금식을 했으니 얼마나 배고프겠습니까? 먹고 싶은 음식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하니 얼마나 강렬하고 자극적인 유혹입니까?
한 끼만 안 먹어도 옆에서 누가 뭘 먹고 있는 것을 보면 참기가 어려운 것이 식욕입니다. 그런데 40일 물도 마시지 않고 단식을 한 예수님의 처지야 더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분이신데 돌로 빵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닐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만들어 허기를 달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하고 사단의 유혹을 멋지게 이깁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예수님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의 구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마귀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이 유혹은 언뜻 보기에는 별 유혹이 아닌 것 같고, 또 만들어 먹는 다 한들 그것이 죄가 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듭니다. 하지만 이 마귀의 유혹에 엄청난 음모가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음모를 간파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그래, 40일 금식한 것도 어딘데, 떡 한 조각쯤이야’하고 만들어 먹었다면, 오늘 성경에 기록된
두 번째 세 번째 시험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이 유혹 속에 숨겨진 마귀의 음모는 무엇일까요?
‘네 능력을 너의 육체적 필요를 채우는데 사용하라’ 마귀는 바로 이것을 노린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메시아적 권능을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자신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하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이 음모가 무서운 것은 ‘예수님이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난을 받으며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도록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만약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었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극도의 고통을 당할 때 마귀는 다시 한 번 과거의 행동을 부추기며 유혹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이 힘든 십자가에 굳이 못 밖혀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어갈 필요가 뭐있겠는가? 당신의 그 권능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가 참 메시야임을 보여주라. 그러면 저들이 너를 믿을 것이다. 예전에 돌로 떡을 만들어 먹었던 것처럼.’
만약 마귀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이 것을 수용했더라면, 십자가의 극한 고통 중에 속삭이는 마귀의 유혹을 예수님이 이겨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음모를 아셨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떡도 필요하지만 더 중한 것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다’라고 증거하며 사단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는 이와 동일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간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입니다. 이들은 뱀으로 등장하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그리고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대신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맙니다.
마귀의 시험에 그만 쏙 넘어 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길을 갑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분명히 물질이 필요합니다. 주님도 그것을 인정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이는 떡도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떡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 물질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먹어야 한다’라고 말씀합니다.
학생들에겐 ‘실력을 쌓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먹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돼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짐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도 있지만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문제는 먹는 것, 입는 것, 소유하는 것, 실력을 가지는 것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이러한 것은 육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통계적으로 잘 모르지만 어떤 분에게 이 나라에 대한 특별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회학을 공부하시는 분인데, 이 상하게도 이 나라에 정신병, 우울증 환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왜 그럴까? 먹고 입는 것은 해결되었지만, 정작 내가 왜 여기서 먹고 입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장 중요한 질문이 해결이 안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고 있나? 나는 어디로 가는가? 죽음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떡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먹어라’
만약 여러분이 이 길을 등한히 하고 있다면 그 길은 분명히 재미있을 것입니다. 달콤한 매력이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멀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담과 하와가 사단에게 넘어간 그 길을 반복하는 길이 아닌지 냉철하게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길이 다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라 하십니다.
둘째 시험은 정신적이고 명예적인 시험입니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하나님이 너를 다치지 않게 해주실 것이다.’
이것이 명예적이고 정신적 시험이 되는 이유는, 사단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을 때 발생하는 결과를 예상하고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성전에 뛰어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귀의 유혹하는 말대로 하나님께서 다치지 않게 해주시던가, 아니면 예수님 스스로 안전하게 땅에 내려 오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성전의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않그래도 기적적인 메시야를 기다리던 때 였기에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가만 둘 리가 없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린 예수님은 일약 스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환대 속에 영웅적인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단은 이것을 이용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시험하게 만듭니다. 명예욕을 부추켜 하나님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죄를 짓게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을 어기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수없는 유혹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명예를 세우고 이름 내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이런 유혹이 다가 올 때, 우리 마음은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립니다. 유혹이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명예와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에 합당한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낮추는 길이었습니다. 도리어 불명예와 치욕의 길인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명예와 명성을 부추기는 사단의 유혹을 세밀하게 살피십시오. 아무도 모르게 그 유혹에 혹 여러분의 마음이 빼앗기지 않았는지 주님 앞에서 냉철하게 분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본 받으십시오. 낮추고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길이 생명이 길이요, 성숙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셋째 시험은 영적인 시험입니다. 마귀가 천한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하고 유혹을 합니다. 이 유혹은 너무나 달콤한 유혹입니다. 이 유혹의 핵심은 ‘하나님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을 주어 다스릴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일거에 모든 것을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제안입니다. 마귀의 입장에서는 이 마지막 시험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너무나 달콤합니다. 만약 이 제안이 이루어진다면 예수님은 하루아침에 세상의 통치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그대로 넘어갑니다. ‘한 번이면 되’라는 속삼임에 그만 넘어갑니다. 하나님을 버립니다.
예수님이 잡혀 심문을 당할 때 대제사장의 뜰에 있던 베드로가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고자 그토록 따랐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와 같은 모습이 우리 삶 뼈 속 깊은 곳 까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렇게 쉽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는 가 봅니다.
말은 없지만 마음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길을 쉽게 선택합니다.
사단은 여러분이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그것으로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다 더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거기에 인생을 걸라고 합니다. 그 유혹을 잘 분별하고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그 유혹을 물리칩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주의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서 빠질 수 있는 권세욕, 권력욕 보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한 분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없어질 것이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고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여러분 인생의 제일 우선순위요, 그것이 내 인생의 목적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을 잊는 순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같이 되라고 유혹했던 그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 되는 길을 다시 반복하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멀어진 모든 마음을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해드리는 길을 즐거이 걸어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삶을 본 받으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빵도 필요하지만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명예보다 낮아지는 길, 빠른 길이 아니라 돌아가는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세상의 모든 소유를 얻고 하나님을 잃느니, 차라리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예배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40일 금식 후의 그 고통과 유혹 속에서도 자신의 육신과 명예와 소유를 위한 길이 아니라 그 반대의 길을 간 것입니다.
큰 양조장을 경영하는 분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남을 죄짓게 하는 이 사업을 그만둬야 겠다 생각하고, 그 수입이 많은 양조장을 그만 두는 것도 보통이 아닌데, 그는 은혜 받은 그 길로 집에 돌아와서 도끼로 술이 들어 있는 큰항아리를 다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그 동네 도랑에 그날은 술이 콸콸 흘러내렸다. 동네 사람들은 아깝다고 했으나 그는 과감히 끊을 것을 끊었던 것이다.
후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운명하는 날 밤 동네 사람들이 보니까 그 집 지붕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더라는 것이다.
실제로 타지는 않았으나 물통을 들고 뛰어갈 정도로 불타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가 열심 있게 신앙생활을 하였던지 성령의 불이 크게 그 집에 임하였던 것이다.
사순절 기간 동안 40일 금식이라는 고뇌의 여정, 그리고 금식 후의 육신의 갈망, 그리고 사단의 계속되는 달콤한 유혹이라는 시험 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좁은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깊이 바라봅시다.
양조장 주인처럼 옛 모습을 딱 던저버리고 주님을 갈망합시다.
다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새롭게 되고, 하나님을 찬미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큰 고통과 유혹이 있다하여도 말씀으로 살고, 하나님을 신뢰함을 낮은 길을 택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십시오. 말씀대로 살아가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