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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수, 온 세상의 구원자(요3:1-17, 사순절 둘째 주일 말씀)2011-03-21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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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6.3의 강진이 크라이스트처치를 강타했습니다. 이로인해 수많은 건물과 집이 무너지고 도로가 파괴되었습니다. 부상은 말할 것도 없고 23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고 또 실종되었습니다.

 

두 차례의 지진에 크라이스트처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으로 팽배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처 이 충격이 가시기전 3119.0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강도의 지진이 일본에서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몰려온 쓰나미로 인해 손 쓸 겨를 도 없이 일본 동북부 해안 지대의 많은 지역들이 휩쓸렸습니다. 최소 23m 높이의 쓰나미가 육지를 덮친 이 재앙으로 인해 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아직도 수많은 실종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살았다 해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음식과 치료의 부족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많 있습니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면서 상상 하기 어려운 공포가 일본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리비아에서는 독재정권에 궐기하여 시민혁명이 진행 중인데 군대와 힘을 가진 가다피 정권이 자국민을 향해 무차별 폭격과 살상을 가했습니다. 거기에서도 수천의 사람들이 의의 길을 외치다 죽어갔습니다.

 

이것이 최근 우리가 이 시대 한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 시대의 이러한 모습은 유난히 특별난 것이 아닙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후로 계속 있어 왔고 앞으로 계속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알 수 없는 인생의 고통이요 슬픔입니다. 사실 자연 재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목숨을 잃을 때 우리는 매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한국에서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사람들이 한해 9300명 이 넘습니다. 이들은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럽기에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리비아의 상황을 잠깐 말씀드렸지만,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인간의 존엄성이란 것은 실은 사치스러운 얘기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힘듭니다. 그저 살아있다면 다행 인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2차 대전 중에 수천만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2차 대전이 이후 한반도에서의 전쟁으로, 아프리카, 동남아시의 내전으로 수 백 만 명이 죽었습니다. 인생은 이처럼 눈물과 고통과 슬픔의 길이요, 두려움의 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상에 흩어져 모든 부족들, 나라들은 각기 신을 만들었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두려울수록 인간의 나약함은 신을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도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김태곤에 의하면 가정에서 숭상하는 신으로는 성주신, 조왕신, 문신, 측신, 지신, 업신, 삼신, 제석신, 조상신, 왕신(王神), 정신(井神) 11종이 있으며, 마을신에는 136종이 있고, 무신으로는 114종이 있다고 한다. 이밖에 잡신들 까지 모두 합치면 민간신앙에서 숭상되는 신은 모두 273종이나 된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신들이 섬겨지고 있는 이 조선 땅에 2-3세기 경에 불교가 들어옵니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에서 시작되었는데, 싯달타라는 한 젊은 왕자가 인간의 고통의 문제가지고 고뇌하며 도를 닦다가 득도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은 자아에의 집착에 있음을 깨닫고 자기를 버리게 될 때 그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설파하였습니다.

이 불교가 들어와서 고려시대까지 약1200년간 한 반도의 주된 정신세계를 형성합니다. 불교를 통해서 인생의 고통과 괴로움을 이겨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잘못된 모습으로 고려가 기울게 되자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유교를 국교로 하는 조선이 세워집니다. 사람은 하늘의 뜻에 따라야 바른 인간이 된다는 것과 이의 근본은 효와 충으로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조상을 잘 섬기는 제사가 발달합니다. 도리를 다하는 예가 중시되고, 도리에 맞는 체통과 체면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래서 1300년 대 중반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유교가 조선의 정신세계를 이끌어나갑니.

그러나 유교가 성리학으로 발전하여 하늘의 이치, 인간의 이치를 설명하려고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하늘을 모르는 인간의 이론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자기의 생각이 맞다는 주장과 싸움을 하다가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결국 나라도 잃어버리는 파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에 1800년 말에 기독교가 조선 땅에 들어옵니다. 온갖 잡신을 믿던 땅에, 스스로 고뇌에서 벗어나려는 불교가 들어오고, 하늘의 신이 무엇인지를 모르지만 하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논리로 무장한 유교의 틀에 얽매였던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입니다.

 

한반도에 있는 273종이나 되는 잡신도 그렇거니와 불교와 유교에 흐르는 일맥상통하는 한 가지는 인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것이라든가,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를 닦아야 한다든가, 하늘의 뜻에 따르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온갖 예를 지켜야 한다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예입니다.

 

프랑스의 인격주의 철학 운동을 시작한 엠마누엘 무니에는 인간의 생명은

거룩한 불안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평화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것은 소멸되지 않는 영혼에 새겨진 명령이다.’ 라고 말했습니다.(찰슨 콜슨)

 

모든 인간은 불안합니다. 사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불안합니다. 참새가 길거리에 떨어진 음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워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먹기 위해서는 자신을 노리고 있을지 모를 뭔가의 두려운 대상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참새와 다를 바 없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인간은 질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한 존재이고 인생은 왜 이렇게 고달픈가. 이 불안과 고통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인간은 생각을 하고 인생의 의미를 밝혀줄 진리를 알고자 합니다.

 

그래서 캐톨릭의 교황 요한 바오로 2는 이렇게 말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진리를 찾아다니는 자로 정의 할 수 있다.’

진리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는 불안한 존재인 우리인간에게 한국의 토속 종교는 귀신을 쫓아 내야한다든지, 굿을 해서 노여움을 달래든지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득도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유교에서는 예를 잘 갖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연약하고 불안한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은 그런 요구를 다 맞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요구에 다 맞추어 행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죄가 많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해서 자신의 죄와 불의함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거룩하고 선한 것 보다는 그 반대의 것을 더 짜릿하게 여길 뿐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기적인 욕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바른 것 같지만 사람의 속은 온갖 죄와 이기심으로 가득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거짓 없이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 스스로 무엇을 해서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은 더 큰 고통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면 할수록 자신은 죄로 똘똘 뭉친 덩어리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인생과 운명에 관한 진실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인생의 고통 속에서 고뇌하며 인생의 의미와 진리를 찾아구하는 이 세상에 예수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온 우주와 이 땅, 그리고 이 땅의 영혼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이르는 자만이 그 고통과 고뇌에서 자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있어서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곳은 어머니의 품이듯이, 모든 불안한 인간이 가장 평안한 곳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왜냐하면 그 품에는 내 영혼을 어루만져주시고 품어주시는 사랑이 한 없이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습니까?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의문을 가집니다. ‘아니 그러면 다시 어머니 배속에 들어갔다 다니 나와야 합니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온 인간중심의 철학과 종교가 활개 치는 세상에 마치 쓰나미 같은 엄청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의 모든 것을 다 갈아 없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얘기에 니고데모는 어안이 벙벙하여 다시 질문을 합니다. ‘아니 어떻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시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일어났던 한 가지를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나온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 받은 가나안 땅에 가까이 이르렀지만 여전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기를 우리를 애굽에 놔두지 왜 여기까지 나오게 해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여기는 음식도 물도 없고, 우리 마음도 이제 지쳐 이 매일 먹는 만나도 지겹다원망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뱀을 보냅 징계합니다. 이제 뱀에 물린 사람들이 독이 올라 죽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지도자인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는 죄를 범하였으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이 우리에게 떠나게 하소서

 

이에 모세가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 여호와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어라. 물린자 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21:7-9) 이에 놋으로 뱀을 만들어 모세의 지팡이에 달았고, 그 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았습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스스로 무엇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뱀만 보면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과거의 사건을 들어서 설명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신이 지팡이 위에 달린 뱀과 같이 될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 지팡이 달린 뱀만 보기만 하면 그 즉시로 낳았던 같이,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예수를 믿는 자마다 거듭나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사람을 살리는 놋 뱀이 지팡이에 달린 것 같이, 인생을 죄와 방황 속에서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의 품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당신도 그렇게 십자가 위에 못 박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선행과 의로운 행동 혹은 도를 터득하는 고행이 아니라, 오직 내가 씻어야 하고 벗어야 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난다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4-15)

 

그러면서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세상에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당신을 믿음으로 거듭나는 영생의 길, 하늘과 땅과 온 우주와 인생을 창조하신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의 의미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뇌와 방황은 하나님을 떠난 죄요, 그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품에 이르는 거룩함을 덧입는 새롭게 거듭나는 길예수님 외에는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밖혀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품에 들지 못하고 방황하고 고뇌하며 아파하는 우리 영혼들을 긍휼이 여기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 길만이 인간 스스로 벗을 수 없는 씻을 수 없는 죄와 고뇌를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내어주고서라도 이 길을 마련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며,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의 은혜의 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중국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였습니다. 한 건물 속에서 한 어머니와 아기가 발견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생명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육중한 건물 밑에 함께 깔려 있던 아기는 기적적으로 살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위해 그 건물이 무너질 때 온 힘을 다해 막으며 아기를 보호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건물에 깔려 죽어가면서 배고플 아이를 생각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 아기 젓꼭지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비록 건물을 무너지고 어머니는 죽어가는 비극과 고통의 상황이었지만 어머니의 품에 안긴 어린 아기는 그곳이 가장 안전한 어머니의 품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아기는 어머니의 젓을 먹었고, 마침내 구조대에 발견되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이 이 아기를 살린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함께 담당하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온 우주와 땅의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리고 성자 예수께서, 그리고 성령께서 그 고통의 희생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 오셔서 우리게 이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거듭날 것이며, 하나님 품안에서 영원히 함께 하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증거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 대신하여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나를 거듭나게 하시는 구원의 주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오직 한길,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구원의 주로 믿으십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요, 하나님의 품에 이른 사람입니다. 나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과 그 사랑과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그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혹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주신 이유는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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