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10일 주일설교 - 서장원목사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하는 일”(요 11:50-52, 창 12:1-4 / 20060910)
임종을 앞에 둔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지금 병원에 입원되어 있으면서 순간순간 점점 어려운 시간을 맞고 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심장마비와 또 이에 따르는 강한 진통제로 인해서 정신이 몽롱해진 가운데 있습니다.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다 희미해진, 감각이 희미해진 그런 상태입니다.
간호사가 큰 소리로 이분에게 외쳤습니다. “할아버지, 아드님이 왔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간신히 눈을 돌릴 정도입니다. 간호사는 또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드님이 왔습니다.”
해병대 복장을 한 건장한 청년이 병실에 들어섰습니다. 노인은 윤곽을 알아볼 정도밖에는 분명하게 사람을 볼 수가 없는 상태이고,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아주 쇠약해진 손을 내밀었습니다. 청년은 그 손을 두손으로 꼭 잡았습니다. 서로 주고 받는 말은 없습니다. 그렇게 한밤을 꼬박 지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간간이 들어와서 상태를 체크했습니다. 간호사는 앉아 있는 그 청년을 보고 잠깐 눈이라도 좀 붙이라고 말하지만 청년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여전히 노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새볔녘이 되었을 때 노인은 세상을 떴습니다.
꽂아놓았던 산소 호흡기며 주사바늘을 다 뽑고 제거하고 나서 간호사가 물러설 때 청년은 노인을 가리키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노인은 누굽니까?” 간호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당신은 이 노인의 아들이 아니세요? 이 노인이 당신의 아버지가 아니세요?” 청년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간호사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해서 저 노인과 함께 밤을 지새운 겁니까?” “이 병실 문을 여는 순간 저는 아차했습니다. 무슨 착오가 생겼구나, 이 노인의 아들과 내가 동명이인인가보구나, 그래서 사무착오로 내가 여기 오게 됐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 노인의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거기에 사로잡혔고 도저히 ‘내가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이 자리를 지켜야 했고 임종을 보아야 했습니다. 나는 도저히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목이 타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냉수 한 그릇입니다. 오직 냉수입니다. 그에게는 냉수 아닌 아무것도 소원이 없습니다. 사랑에 목말라하는 임종의 노인에게는 누군가가 옆에서 손을 잡아줄 바로 그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간절한 소원을 뿌리치지 아니한 이 청년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가장 행복한 그런 생을 사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성녀 마더 테레사는 말합니다. <가장 큰 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니라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바로 그것입니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고친다고 하지만 고독과 절망은 아무것으로도 고칠 수 없습니다. 오직 따뜻한 사랑뿐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한 개의 빵 외의 그 어떠한 것으로도 사랑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빵 하나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닙니다. 빵 하나에 담긴 사랑이 사람을 살립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2장의 말씀은 하나님이 한 사람을 선택하실 때 어떤 뜻을 두셨는지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기록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명령하시면서 그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한 사람을 통해 민족을 살리시려는 뜻입니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복을 받는다, 참 가슴 뿌듯하고 근사한 일입니다. 여러분, 아브람에게는 얼마나 가슴 벅찬 말이었을까요?
아브람은 더 이상 그의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족을 넘어서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입니다. 한 사람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뜻, 온 세계, 온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람은 이 뜻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뜻을 좇았습니다. 본토, 고향을 떠난다는 것, 친척과 아비를 떠난다는 것, 더구나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난다는 것은 분명 모험입니다.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야 했습니다. 민족의 미래가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진로를 민족의 관점에서 수정합니다. 희생의 각오를 합니다. 그리고 나그네로서 미지의 땅, 그러나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여러분, 아브람, 어떻습니까? 민족을 사랑한 사람, 애국자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하나님의 뜻이 비단 아브라함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바로 아브람의 후손이자, 아브람이 믿었던 동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바로 여러분과 저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비전,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 수 있도록 ‘으쌰! 해보자’하면서 한 마음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의, 나라와 세계를 바라보는 삶과 믿음의 시선은 좀 더 넓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21세기판 아브람입니다. 민족의 관점에서 삶을 생각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또 다른 본문인 요한복음의 말씀은 모든 민족의 가장 큰 애국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애국자일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애국자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민족의 애국자이십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50절) ‘한 사람이 죽어야 이스라엘 민족이 망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시에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한 말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학대를 받으며 가난과 굶주림과 헐벗음의 천대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수많은 표적으로 굶주린 백성들에게 떡을 먹이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려내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당시에 교권주의자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공회원들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로마와 결탁해서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하면서 살아왔는데 만약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민중봉기를 일으킨다면 로마의 권력자들이 이 모든 책임을 자신들에게 전가하면서 자기들의 지배체제를 위협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민중들의 봉기를 예방하고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지키려고 모여서 회의를 하는 중에 가야바가 이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민족이 망하지 않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어찌 알지 못하느냐 이 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가야바는 한 사람을 죽여야 민족이 산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한 사람이 죽어야 자신들이 산다는 매국적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야바가 한 말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가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그 민족 뿐만 아니라 흩어진 전 세계의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서 하나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라”
다시 말하면 가야바는 자기 욕심으로 예수를 죽여야 된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입을 통해서 그 민족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을 위하여 예수가 죽어야 된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스라엘을 살리시고 온 세계 민족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죽으실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한국 민족의 최대의 애국자를 말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 민족을 사랑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창세 전부터 ‘내가 죽으므로 이 민족이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도 애국 운동을 하면서 죽었지 ‘내가 죽으므로 이 민족이 산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순신도 임진왜란 때 남해 바다에서 왜구들이 침략한 배를 격침시키고 왜놈이 쏜 총에 맞아 죽었지만 그가 이 민족을 구한 것은 아닙니다. 조금 희생했을 뿐입니다.
유관순도 민족을 위해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죽었지만 그가 민족을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해서 죽였지만 이등박문 하나 죽였을 뿐이지 민족을 살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민족을 살리는 위대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와 함께 살기 때문에 나 자신도 이 민족을 위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분명한 비전과 의식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면, 고국에 있을 때 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차원이 다른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외국이기 때문입니까? 인종차별 때문입니까? 그리움 또는 외로움 때문입니까? 스트레스와 억울함 때문입니까?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이유 때문에 동기부여되어 애국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 때문에 우리는 나라사랑 민족사랑을 외치며 실천해야 할까요?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이 모든 민족이 누릴 행복을 위해 나그네 삶을 시작했고 통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 모든 민족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민족을 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특별하거나 거창할 필요 없습니다. 나로 인해서 민족이 행복하고, 나로 인해서 민족이 생명을 얻는, 다른 말로 살맛을 느끼도록 하는 일은 우리의 삶이 터전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가정이 화목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 간에 오순도순, 이해하며 격려하며, 인정하며 받아주며 화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인사회가 화목해야 합니다. 같은 민족입니다.
더 나아가서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에 있는 동포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핵이나 미사일은 다른 차원입니다. 정치의 안경을 벗고, 편견의 안경을 벗고 힘겨워하며 죽어가는 사람을 봐야 합니다.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이 북한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팔짱을 끼고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베풀 것입니다. 줄 것입니다. 방법을 생각할 것입니다. 살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행복이란 게 참 신기합니다. 내가 충분히 가지고 있고, 건강하고, 살맛을 느껴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 이외의 사람이 늘 부족하고, 아프며, 살맛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 쪽에서는 굶어 죽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방법은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더불어 살려고 하는 삶의 비율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의 행복지수는 높아집니다.
우리는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작년에 ‘Jesus' child India Project'에 손수 선물을 만들어 동참하시면서 어떠셨습니까? 얼마 전, 뉴질랜드성서공회 사역에 후원작정하시면서 어떠셨습니까? World Vision을 통해 아프리카 어린이에게 육의 양식을 후원하는 일에 동참하시면서 어떠셨습니까? 우리의 삶이 <더불어>라는 나침판에 이끌려 끊임없이 흘러간다면, 그 삶이야말로 천국 아니겠습니까?
이번 주 토요일에 있는 북한 우정농장 돕기 게라지 세일은 얼마나 의미있고, 감동적이며, 은혜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여할 때, 그것은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