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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수님의 감사”(요 11:33-44 / 20061001)2007-03-21 15:42
작성자 Level 10
“예수님의 감사”(요 11:33-44 / 20061001)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두 가지 비극이 있었다. 하나는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인한 고통이었다. 이름하여 불만이라고 하는 의미의 고통이다. 또한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때가 있었다. 그때에 나는 그 성공에 대해서 스스로 실망했었다. ‘이렇게 시시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 때문에, 겨우 이것을 위해서 내가 그토록 많은 땅을 흘려야 했던가’하고, 정말이지 실망했었다. 그래서 떄로는 ‘다음 결과는 어떻게 될까?’하는 절망과 공포에 빠지기도 했다.”

여러분, 산에 올라가본 적이 있으시죠? 올라갈 때에는 올라가지 못해서 힘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다 올라가놓고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이거 막상 올라와보니 별 것도 아니네. 겨우 이걸 보려고 올라왔나?> 하지만 그 다음에는 내려갈 것이 걱정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사가 대체로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결코 소유도 성취도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형편에 있든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 형편이 복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 감사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대로가 복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다 하더라도 또 불평 또 원망 또 공포에 매여 있다면 그는 결코 복된 사람이 아닙니다. 온세상 사람이 다 부러워해도 정작 본인은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깨달음에 있고, 감사함에 있습니다.

감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Subjunctive Mood, 가정법의 감사입니다. “만일 ~하다면 ~할 것이다” “만일 이렇게 되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제나 미래적이고 조건적입니다.

“내가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하는 장사가 잘되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때 가서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더 큰 소원, 더 큰 욕망이 눈앞에 놓이기 때문에 그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조건부적인 감사입니다.

두 번째는 because of의 감사입니다. ‘무엇 때문에 감사하다’, 과거적입니다. <이러하니 감사하고, 저러하니 감사합니다> 이만하면 괜찮습니다마는 역시 상대적입니다. 이제 그 조건과 환경이 변하면 이제 그 감사가 무슨 말로 바꾸어지겠습니까?

건강하니 감사했습니다. 병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공하니 감사했습니다.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성공이 실패를 향해서 곤두박질한다면 그때에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상대적인 감사는 환경이 변함과 더불어 그 감사의 마음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는 in spite of의 감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환경변화와 관계없습니다. 이미 감사의 엄청난 조건을, 감사의 소재를, 감사의 의미를 채웠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이유, 그것을 이미 찾고 그 감격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세대가 아무리 곤두박질을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 그는 감사의 여건을 만족스럽게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헬렌 켈러 여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요, 장님입니다. 그녀가 영국의 글래스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동경의 눈으로 쳐다보며 ‘과연 그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까?’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박사학위를 받고 청중 앞에서 답사하는 시간에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암흑과 침묵도 전진하는 나의 정신력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 모두가 감격하며 숨을 죽였습니다. 여러분, 그 어려운 여건에서도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날 캐나다의 어느 신문기자가 헬렌 켈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그녀는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혼자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더랍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so beautiful!, 아름답다, 정말로 아릅답다!”라는 탄성이었습니다.

신문기자는 ‘도대체 장님이 무엇을 볼 수 있다고 저런 말을 할까?’하고 궁금해서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헬렌 켈러 여사님, 여사님께서는 지금 아름답다고 하셨는데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여사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시지 않습니까? 이 아름다운 정원을 전혀 보실 수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이 아름답다는 것입니까?”

헬렌 켈러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보는 것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맑은 공기와 이 향그러운 냄새와 이 분위기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게 해줍니다.”

여러분, 나는 뭐가 없고, 뭐가 없고, 뭐가 없다, 그래서 감사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그렇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감사는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됨의 기준입니다. 인격과 신앙, 그 모든 수준이 감사에서 결정 나기 때문입니다.

불평체질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감사가 없습니다. 영원히 불행합니다. 감사체질의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냅니다. 불평체질의 사람을 어떻게 구제할까요? 체질개선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자기만 그런게 아니에요. 모든 사람들을 다 휘저어놓아서 그들까지 다 불행하게 만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여러분,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 하고 입버릇처럼 되뇌입니다. ‘그저 내가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지’, ‘내가 정직하게 사고, 내가 깨끗하게 살고, 내가 의롭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지’라고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뜻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감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감사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11장 3절 말씀을 보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병든 것만이 아니라 죽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장례식까지 끝난 마당에, 이 초상집을 예수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동생 둘이 예수님을 붙들고 웁니다. “우리 오빠가 죽었습니다. 진작에 오셨더라면 안죽었은 텐데,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원망조로 말하면서 웁니다. 주위 사람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도 우셨습니다.
“무덤을 찾아가자.”
“가실 필요 없습니다.”
“가서 돌문을 옮겨놓으라.”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열어볼 것이 뭐 있겠습니까?”
“옮겨 놓으라!”

드디어 돌문을 옮겨놓은 바로 그 시간, 침통한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41절)”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는 무덤 앞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거기서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보셨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환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땅을 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에도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바라보십니다. 땅을 보면 절망과 실망이요, 원망과 불평뿐입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바로 그 시간이 중요합니다.

독일의 어떤 그리스도인이 혀에 암이 생겼습니다. 혀를 자르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기에 어쩔 수 없이 혀를 잘라야 된다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이제 수술하기 전, 마취대에 오른 그에게 의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는 혀를 자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십시오.” 환자는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있다가 그 혀로 마지막 말을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자, 선생님 이제 수술하십시오.”

여러분,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비통하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을 향하여 생각을 위로 올리면 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생각이 자꾸 땅을 향하니까 문제입니다. 우러러보아야 합니다. 위로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무덤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위로 향하여, 신령한 세계를 생각하면 사실은 상가집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에 놓고, 하늘을 향하여 감사하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것은 아주 절대적입니다. 미래를 향하여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감사의 절정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인간적인 절망과 가장 비극적인 시간에 가장 높은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신 그 깊은 뜻은 아무도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이런 감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 상대적인 허영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현재의 일을 감사하는 것, 이 변하는 세상에서 또다시 마음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감사는 미래를 향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절대적 신앙, 종말론적인 신앙에서 비로소 참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무덤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감사의 결과로 나사로도 살아났고, 예수님께도 부활의 아침이 왔습니다. 감사가 승리입니다. 감사의 능력으로 새로운 역사가 창조된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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