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9㈜ 주일예배 본문 여호수아 5:13-15 제목 네 신을 벗어라 목적 위기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게 하려 함이다. 오늘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입니다. 하여 마땅이 그에 따른 말씀을 드려야 하겠으나, 애찬후에 김구태목사님의 특강이 있어서 저는 그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무엇인가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러나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 더 깊이 아는 은혜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장애를 두려워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힘있게 나아가는 승리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고 있을까요? 첫째 위기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어떤 마음 상태일까요?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습니다. 그리고 길갈에 12 돌을 쌓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여 이스라엘의 수치를 제거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무장케 하신 것입니다. 이제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지도자 여호수아는 깊은 생각에 잠겨 여리고 성에 가까이 갑니다.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앞에 산 처럼 버티고 서 있었으니 그 성을 어떻게 공략할지를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아직까지 여리고 성 정복에 대한 아무런 말씀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907년부터 시작 된 여리고 성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여리고 성은 견고한 바위 위에 세워진 매우 튼튼한 성벽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성의 구조는 외벽과 내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벽은 먼저 돌로쌓은 기초벽이 있습니다. 이 벽 높이가 4-5m 였고, 기초벽 위에 기초벽 위에 진흑벽돌로 높이 6-8m, 폭 2m의 성벽을 더 올렸습니다. 그래서 기초벽부터 따지면 최하 높이가10m, 최고 13m나 되었습니다. 이것이 외벽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외벽 안쪽에는 외벽보다 14m 높은 언덕 위에 내벽이 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훈련 된 군대,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이 쉽게 공략 할 있는 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을지 짐작 할만 합니다. 1장에서 보았듯이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네가 너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리라”는 언약을 받았음에도 현실은 어떻습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큰 난관 앞에서 두려움과 불가능, 불확신이라는 기제가 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홀로 여리고성을 이런 심정으로, 그러나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하며 기도로서 성을 살펴봅니다. 저는 여호수아가 높은 2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여리고성,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공략할 수 없는 여리고 성을 바라보며 리더로써 가졌을 고뇌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았지만 그 약속과 자신이 처한 현실 사이에서의 고뇌하는 여호수아의 입장이 이해가 됩니다. 약속을 받았지만 자식을 보기까지 25년이라는 긴 시간의 괴리 속에 처하여 있었던 아브라함 고뇌와 다를바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가장 아끼는 보물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나의 못남과 현실의 장벽에 막혀 있는 딱한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다 고뇌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여리고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스스로의 감당 할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는 여호수아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두려움과 불가능과 불확신의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칼을 빼들고 서있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놀랬을까요? 얼마나 겊이 났을까요? 적의 성이 가까이 있는데 느닷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칼을 들고 서 있으니 간 떨어질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놀라 묻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쉽게 말해 “아군이야 적군이냐” 묻는 것입니다. 이에 칼을 빼들고 서 있는 사람이 뭐라 대답합니까?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여기에서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란 ‘만군의 여호와”와 같은 유사한 표현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수아 앞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언제 오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 언제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왔다고 합니까? “지금 왔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지금이란 언제를 말하는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난공불락 같은 여리고성을 정복해야나 그것을 감당 할 능력이 없어 약속와 현실 사이에서 서서 고뇌하고 두려움과 불확신에 처하여 있는 바로 그 때입니다. 즉, 두려움과 불확신의 순간에 하나님이 찾아 오신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위기의 때, 감당 할 힘이 없고, 앞날이 깜깜하여 두려워 할 그 때의 나를 아시고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편139:1, 11-12)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이방인 850명의 선지자와 영적대결에서 승리했으나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고 도리어 죽음의 위협 앞에 처할 때 그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황량한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처량하게 죽기를 구합니다. 참으로 기막힌 인생의 처지가 아닙니까? 자신의 기도와 수고와 희생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고, 도리어 죽음이 기다린다 할 때 어떤 사람이 죽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선지자로 부름 받음과 자신이 처한 현실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고뇌를 감당 할 길이 없어 죽기를 구하는 그 뼈저린 아픔의 순간에 엘리야를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그를 어루만지십니다. 아이가 병들어 누워 고통속에 울다 잠든 사랑하는 아들을 쓰다듬는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으로 엘리야를 어루만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야, 일어나서 먹고 힘을 내라. 네가 길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왕상19:5, 7) 우리가 가장 약할 때, 가장 힘든 그 때, 이미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아파 울다 잠든 아이 곁에서 밤을 새며 울며 기도하며 어루만져 주시는 어머니의 손길이 가장 뜨겁고 가까이 아이 곁에 있듯이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현실 사이에서 눈물 흘릴 때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가까이 와서 우리를 붇들고 밤을 새며 함께 계셔 주시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약속대로 우리에게 오사 그렇게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눈에 안보인다 열매가 안보인다 실망하고 낙심 할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아픔과 눈물의 때에 이미 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가까이 계심을 믿고 더욱 기도에 힘쓰고, 가야 할 길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때가 되면 마침내 모든 고뇌와 눈물이 벗겨지고 씻겨주는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로 이렇게 위기 때 오셔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대장이라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뭐라 말씀합니까?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노라”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 군대의 대장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일까요?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이라는 생명을 건 전쟁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전쟁을 그린 영화를 보게 되면 용감 무쌍한 군인들이 죽음을 두려워 않고 적을 향하여 용감하게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박수를 치고,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미 아칸소주립대에서 군사학을 가르치는 데이브 그로스먼의 책 ‘살해론’(On Killing, 1995년판)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중 50만4000명의 미군이 정신질환으로 군복을 벗었다고합니다. 이는 50개 사단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 규모입니다. 당시 미군 징병검사소는 징집대상자 가운데 80만명을 정신질환을 앓는 ‘부적격자’로 판정, 1차로 걸러냈습니다. 그런데도 50만명의 현역병이 그뒤 ‘부적격자’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대부분은 전투중 얻은 정신질환 탓이었습니다. 용감한 군인들 처럼 보이는데 왜 이렇게 정신질환이 많은 것일까요?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 병사는 전투를 두고 많은 생각을 하지만, 무엇보다 살아남고 싶다는 강한 희망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얼씬거린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2차 대전 막바지에 전개 되었습니다. 이 상륙작전으로 인해 독일군을 물리치고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조사에 의하면 노르망디 상륙 후 60일의 전투 후 미군생존자의 98%가 정신적 상처로 괴로워했고, 2%는 병적인 증세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신동아,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왜 그럴까요? 전쟁의 공포, 죽음의 공포가 전쟁 내내 엄습하기 때문이요, 전쟁 중 격는 동료의 처참한 죽음이 주는 고통, 나아가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양심의 고통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런 전쟁을 앞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고 이겨야 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것이요,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이 몰살당하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호수아가 격는 그 심리적 압박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그에게 나타나야 가장 적절 했을까요? 바로 그 전쟁을 앞두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필요한 모습, 여호와의 군대의 대장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내가 이 전쟁의 대장이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너의 대장이 되어주리라. 내가 이싸움을 이끌어 네게 승리를 주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현실 속에 놓여 있습니까? 무수한 크고 작은 일들과 염려거리들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제, 정치, 이민법의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시는 하나님 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삶에 도전을 합니다. 어느 것 하나 속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현실과 하나님의 함께 계심의 괴리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그 사랑과 그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유혹에 빠집니까? “굳이 하나님의 가르침과 방식을 따를 것 뭐있나? 일단 살고봐야지”하는 심리에 빠집니다. 그결과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방법을 찾기보다는 자신의 가진 것을 신뢰합니다. 경험, 지식, 힘, 돈, 관계를 활용합니다.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우선시하는 우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무용한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오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도 여리고라는 넘기 어려운 성을 앞에 두고 수 많은 전략을 생각 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동원 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짜내려고 수 없이 생각 했을 것입니다. 급기야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여리고와 타협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도 모릅니다.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타협하여 함께 잘 사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가진 것과 무능함속에 고뇌하는 리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임하십니다. “내가 너의 대장이라”는 것입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며,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성도의 길을 성도님들과 우리 교회를 이끄는 대장은 누구입니까? 우리 안에 우리 인생, 우리의 선한 싸움의 대장으로 오신 하나님, 곧 성령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여호수아를 부러워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경험하지 못하였고, 고대했던 그일, 곧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이미 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대장 되사 우리에게 예수가 진리라는 믿음의 방패를 주셨습니다. 나아가 적을 찔러 이기는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로 확증 된 말씀의 검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셔서 대장 되사 우리를 무장시키시고 이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고, 성령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고 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따라 기도로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 때 이미 오셔서 함께 계셔 우리를 붙들어 이끄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우리는 날마다 새힘을 얻을 것입니다. 크고 작은 모든 위협과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의 인내와 승리를 얻게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한 싸움의 승리는 대장 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셋째로 그렇기에 네 신을 벗으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수아 하나님의 약속과 감당 할 없는 현실의 사이의 괴로움, 전쟁의 두려움과 불확실성 속에서 고뇌하며 여리고 성을 바라보는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은 군대 대장으로 찾아오사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에게 승리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대장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 지금 너와 함께 있고, 이 전쟁을 이기게 할 것인 즉 두려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대장 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놀랍고 감격에 차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을 만나니 그의 마음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제 두려움과 불활실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에게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게 갑자기 왜 신발을 벗으라 한 것일까요? 바울이 하나님의 전신 갑옷으로 무장 하라 하면서 “평안의 복음이라는 신발을 신으라” 할 만큼 군인들에게 있어서 신발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발이 발을 보호하여 거침 없이 싸움에 임할 수 있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장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에 입대하면 제일 사회에서 신던 신발을 벗고, 어떤 싸움에서도 든든하게 몸을 지탱하고 적을 이길 힘을 주는 군화를 지급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중요한 장비인 신발을 벗으라 하신 것입니다. 왜 신발을 벗으라 한 것입니까? 여호수아가 선 곳이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왜 거기가 거룩한 곳입니까? 바로 그 자리에 거룩한 하나님이 임하여 계시기에 신발을 벗으라 한 것입니다. 96년도에 스리랑카에 간적이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수도는 바닷가의 콜롬보인데, 내륙쪽에 캔디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옛 수도가 있습니다. 거기에 스리랑카 인들이 자랑으로여기는 달라다 말리가와 불교사원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사원이 매우 유명하고 자랑하는 이유는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캔디를 방문했을 때 이 절에 가보았습니다. 아주 웅장한 절이었는데 그 절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해야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불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이슬람인이든 상관 없이 무조건 신발을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의 진성 사리가 모셔진 아주 거룩한 곳이니 더러운 신발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까? 신발은 더러운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방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지 않습니까? 마찬 가지로 하나님께서 임하여 계신 곳에서 여호수아게 더러운 신발을 벗으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신발이 더러우니 벗으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더러움은 갖는의미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두려움, 생각, 계획을 의미합니다. 즉 네 자신의 주권, 권리를 내려 놓으라 하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 할 때 나오미의 밭을 사 가문의 땅을 이어가게 합니다. 이 때 많은 증인들 앞에서 그 땅을 자신이 감당하게 될 것을 확약할 때 파는 사람이 신발을 벗어 줍니다. 당시 신발을 벗어준다는 것은 신발 받는 사람에게 권리를 넘겨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행위 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더러운 신발을 벗으라 했을 때, 여호수아가 신발을 벗은 행위는 하나님의 대장 되심을 경외함이요, 자신의 권리를 대장 되신 하나님께 넘겼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신 것입니까? 신발을 벗으라 하심으로 하나님 만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모든 권리를 넘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네 자신을 내려 놓고 오직 대장 되신 여호와 하나님 만을 경외하고 따르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왜요? 앞에 전쟁을 이기는 길은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군대의 힘에 있지 않고, 여호와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엎드려 그 말씀을 듣는데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려고 “신발을 벗으라” 즉 “너를 내려놓고 너의 대장 되신 하나님 여호와 만을 경외하고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Youth with a Mission 이라는 예수전도단을 설립한 로렌 커닝햄 목사가 있습니다. 로렌이 어느날 아내와 함께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당시 아내가 운전을 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차가 도로를 벗어나 낭떠러지로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정신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한 참후에 정신이 겨우 들어 깨어났습니다. 머리는 깨져 피가 흐르고 옆자리를 보니 아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르며 내동댕이 쳐져 저쪽에 너부러져 있었습니다. 아내의 눈동자는 동공이 열려 있고 호흡은 멈추어 있었습니다. “아이고, 아내가 죽었구나” 그런데 어디서 “로렌”하고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구나” 그래서 그 자리에서 무릅을 꿇고 “네 주님”하고 답을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물었습니다. “로렌 이레도 여전히 나를 섬기겠냐” 그 때 로렌은 “예, 주님 그래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이제 제 인생에 남은 것이라곤 이 목숨 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주님이 원하신다면 가져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내 달린을 위해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이에 그는 아내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자 그 때 동공이 열리고 호흡이 멈춰 있던 그의 아내가 “후-“하고 호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 눈동자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내가 다시 살아 난 것입니다. 이사건을 통해 로렌은 한 가지를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내려 놓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내 차, 내 아내, 내 사역을 주장했었습니다. 사고 이후 저는 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때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권리들을 주님 자신과 주의 복음을 위해 맏겨 드릴 때 우리는 온 세상을 유업으로 받는 비결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후 그의 권리포기와 헌신을 통해 예수전도단이 전세례로 확산되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전개 되었고, 수많은 영혼을 구하는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 같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네 신을 벗으라 하십니다. 더러움 곧 우리의 옛 습관, 우리의 고집, 우리의 욕심, 우리의 야망, 우리의 권리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장 되사 우리 삶, 가정, 사업, 미래, 교회를 이끄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내려 놓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도록 하십시요.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나를 이끄시도록 내려놓고, 말씀하실 때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대장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길을 가십시요. 인내로 주의 길을 기다리십시요. 거기에 주께서 함께 하사 대장 되심의 역사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괴롭고 두렵지요.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우리의 대장으로 오셔서 함께 계시고,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 말고 감사하며, 신뢰하며, 그 말씀에 기를 기울여 듣기를 사모하고, 말씀하실 때 내려 놓고 순종의 길을 가십시요. 신발을 벗으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