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4(주) 주일예배 본문 베드로전서 1:22-23 제목 사랑의 예수를 기다리며 동영상보기 -고이태석신부 고 이태석신부는인제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복무하다 사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2000년4월 27일 종신서원을 하고, 2000년 6월 28일 로마에서 부제 서품을 받았고, 구로3동 천주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곤 2001년 10월 아프리카 선교사로 출발하여 12월 7일 아프리카 남부 수단 와랍 주 톤즈에 부임합니다. 그곳에서 가난과 기아, 질병 등으로 도탄에 빠진 마을의 참상을 보게 되고,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겸한 의료와 구호 활동으로 주를 따르는 수도에 헌신합니다. 이때 병실 12개짜리 병원을 짓고 진료소를 만들어, 하루 200~300명의 환자를 돌돕니다. 또 인근 80여개 마을의 순회진료와 예방접종도 했습니다. 학교를 만들고, 초·중·고교 12년 과정을 꾸려 수학과 음악도 가르쳤다. 기숙사도 짓고 톤즈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악기도 가르쳤습니다.(위키피디아 사전에서 인용) 영상에서와같이 고 이태석신부의 이러한 활동이 특별히 남수단 톤즈 마을과 그 지역 사람들에 깊이 각인되고, 그의 죽음에 대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은 그의 사역이 탁월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지역을 돕는 다른 봉사 단체도 있었음에도 그들과 달리 고 이태석신부는 자신을 톤즈 사람들과 동일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요, 기아와 전쟁과 질병으로 고통하는 그들과 함께 참 인간애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와 그 죄가 낳은 악으로 고통하고 신음하는 이 세상에 예수께서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흠 없는 피를 흘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는 참으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오신 주, 구원자,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이 은혜의 혜택을 입어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나라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 구원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첫번째 주제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 목적은 “사랑의 길을 가는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랑의 길을 가는 새 사람이 되라”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진리를 순종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죄 없으시고 순결한 예수와 그 가르침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참 이상하죠? 예수와 그 가르침을 좇았더니 부자 되었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순종했더니 세상에서 성공했더라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합니다.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오셔서 그 모진 굴욕과 치욕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를 건져 내서는 그 따르는 자들에게 어떤 삶을 주셨다는 것입니까?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는 그 피로 우리를 불러 세상을 호령하는 권세자, 세상이 부러워하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거짓 없이 사랑을 하는 새 삶을 사는 사람이 되도록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창조의 목적, 구원의 목적,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이 오직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하나님 나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동시에 서로 한 형제자매가 되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서로 사랑하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이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회복하기위해 예수께서 오셨고, 이제 완성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즉 창조와 예수의 오심과 다시 오심의 모든 초점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는 어떤 핵심 가치위에 서 있을까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동시에 너와 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 위에 하나님 나라가 서 있고 그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타락 이후 죄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목표도 어디에 있습니까?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랑을 회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도 이타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와 그 가르침을 좇는 성도의 대표적인 모습은 무엇입니까? 거짓 없는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피차 뜨거운 사랑을 하는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믿는 다고 하면서도 이 사랑의 길을 가지 않으며 사랑의 교제하기를 멀리 한다면 아직 예수와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니면 진리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요일2:9-11) 그러한 점에서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얼마나 많은 회개를 해야할런지요?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 곧 사랑의 길을 가는 새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두번째로, 그렇다면 사랑의 길을 새 사람이 되라고 부름 받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사랑의 표준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윗 구절인 베드로 전서 1:18-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세상의 은이나 금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 죽음에 대해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됨을 취하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기까지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라 (빌2:5-8)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격 없는 죄인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은 바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기초하여 있습니다.
세번째로,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 현실속에서 어떤 모습이었까요?
첫째, 낮아진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저녁이면 성탄절 이브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오심을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예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동등한 위를 가지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연약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를 버리고 인간으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게다가 세상에 태어나는 자리마저 동물의 거처였고, 포대기에 싸여 뉘인 곳은 여물통이었습니다. 태어나자 마자 헤롯의 위협에 직면하여 피난가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공생애가 시작 되기 전까지는 갈릴리 나사렛이란 시골에서 목수 일을 배우며 무명하게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그 당시 성경에 정통하고 경건성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소위 여호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다는 신앙 좋은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비난과 비판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제자들에게까지 버림을 받는 자리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벌겨벗겨 대중 앞에 메달리는 수치와 모욕을 받으며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철저히 버림받는 자리까지 낮춰짐을 당합니다. 반면 이러한 자리에 낮아지기까지 예수를 몰아넣은 사람들은 어떠 했습니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밖도록 허락한 빌라도는 자기 지위를 지키려고 유대인에게 아부했습니다. 예수를 철저히 배격했던 소위 믿음 좋은 장로,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또한 자신들이 누려온 지위를 잃지 않고자 예수를 죽였습니다. 예수를 그나마 따랐던 제자들 또한 죽음 앞에 고민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모른채 자신들의 지위가 더 높은 곳에 이르기를 다퉜습니다. 이 모든 모습은 무엇입니까? 죄로 병든 모습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보전하고 더 높아지기 위해 모른채 하고, 다투고, 없는 죄를 씌워 사람을 바보를 만드는 죽음의 문화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 없이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고 그 노예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심에도 자신을 낮추었고, 낮춰짐을 받아들였습니다. 진정한 애정, 진정한 사랑이 그 낮아짐을 자취 하신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간 거짓 없는 사랑의 길을 간 성도들을 품어 그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의 사랑은 인내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낮아짐의 길을 가야지 하는 마음은 성도의 마음속에는 다 있을 것입니다. 아니 성도가 아니라도 겸손한 길을 가야지 하는 지혜는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 낮아짐에 오는 고통 때문입니다. 낮아짐은 고고한 모습을 띠고 모든 것을 달관한 사람 처럼 보이는 길이 아닙니다. 세상에 가장 바보 같은 취급을 당하는 자리에 내려가는 것입니다. 모든 비난과 수치와 모욕과 배신의 자리에 내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바로 그런 길입니다. 그러니 그 수치감, 그 모욕감, 그 배신감, 그 좌절감이란 상상 할 수 없는 고통 그자체였습니다. 특별히 온갖 조롱 후에 십자가에 벌겨벗겨 못박히는 치욕과 모욕, 살이찢어지는 그 고통의 상황하에서 그를 못 박은 자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네 자신도 한번 구해봐라”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해봐라” 하고 조롱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악 할 수가 없습니다. 죄가 낳은 악의 모습입니다. 한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밖혀 그 참을 수 없는 모멸감과 찢어지는 고통속에 아파하는데 그걸 보는 자들은 웃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십니다. 참고 또 참습니다. 견디고 견디어냅니다. 그 수치와 그 치욕과 그 모욕과 그 배신감을 참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죽이며 인내하십니다. 생명이 다하기까지 참아냅니다. 모든 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그 수치와 모욕과 조롱과 배신을 다 받으시기까지 참고, 견디되, 생명이 다하기까지 참으십니다. 그리곤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하시고 운명하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이 인내의 길을 뒤 따른 참 성도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주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 길을 따른 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셋째로, 주 예수의 사랑은 십자가를 대신 지는 사랑이었습니다.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땅을 장악하고 있는 죄와 사탄을 멸하고, 죄에서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것이 었습니다. 이로써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새롭게 회복하려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하고 흠없는 사랑의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가능하게 하기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그 모진 수치와 치욕의 십자가에 못 밖혀 죽는 길을 가야 했습니다. 이 땅에서 영광을 얻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을 대표하여,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죄의 값을 담당하는 희생의 제물로 보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를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죄를 씻기 위해 흠없는 어린양을 제물로 드리듯이, 흠없으신 하나님 예수는 모든 인간의 죄를 자기 죄 처럼 짊어지고 속죄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는 예수께서 어떻게 이런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아니 어떻게 아무런 흠조차 없으신 하나님 예수께서 세상에서 가장 깊고 깊은 치욕과 모욕을 짊어져야 할 가장 극악한 죄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 당하는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이 불가사의 하고 불가해한 일을 설명 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입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깊고 깊으면 멸망 받아야 할 원수를 위해서도 자신이 그 수치와 모욕과 죽임당함을 기꺼이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 원수가 새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사랑으로 그 십자가를 대신 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면 이 길을 따른 참 성도의 눈물을 닦아 주실 줄 믿습니다. 대림절 마지막 날, 우리는 기다립니다. 예수 안에서 참 사랑의 길을 간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 주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듯이, 이제 다시 오실 주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 소망의 기다림 속에서 다시 오실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그 길을 갑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신 하나님 나라의 새 계명을 거짓 없이 순종하는 길을 갑니다. 세상 모두가 참으로 기다리는 사랑의 길을 갑니다. 이것이 예수의 피로 거룩하게 된 성도가 가야 할 새 인생의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거룩함과 서로 사랑하는 새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으로 낮아지십시요, 사랑으로 죽기까지 인내하십시요, 사랑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십시요. 이 모습으로 사랑의 길을 가십시요. 곧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