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10(주)주일예배 본문 레위기 19:1-1 제목 거룩한 나라를 위하여 2016년 10월 13일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지에서 “국가도 실패한다. 국가가 실패했던 세 가지 사례”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습니다. 그 기사에 뜬 실패한 세 나라는 짐바브웨, 아르헨티나, 이집트였습니다. 짐바브웨 같은 경우 국가가 실패한 이유를 위정자와 지배층의 심한 착취였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지배층의 착취로 인해 2009년에는 국민의 94%가 실업자로 전락을 하고, 실패국가 지수에서 소말리아 다음으로 전 세계 2위에 랭크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나아 졌다고 하지만 현재도 실패국가지수 전 세계 10위에 해당합니다. 북한은 2016년 조사에 의하면 항목별로 인권, 정부 합법성, 공공서비스, 경기침체 측면에서 나쁜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정부 합법성은 10점 만점에 9.8점을 받아 가장 불안정한 항목으로 나타났습니다. 종합 실패지수는 조사 대상 177개국 22위에 해당했는데, 가장 나쁜 단계인 한계에 달한 국가로 분류가 되었습니다. 중국은 76위로 위험한 국가에 포함됐고, 미국은 159위, 한국은 156위로 상위권에 들면서 안정적인 나라로 평가 되었습니다. 한편 2017년 2017년 1월 블룸버그는 한 나라의 연구개발강도, 제조업부가가치, 생산성, 첨단기술밀도, 고등교육효율성, 전문연구원수, 특허활동 등 7가지 지수를 평가하여 선정, 글로벌 혁신지수를 발표했습니다. 발표에 따르면 2016년에 이어 대한민국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어 스웨덴, 독일, 스위스, 핀란드 순으로 뒤를 이었습니다. 자 이러한 지수 등을 보면 대한민국은 미국수준으로 매우 안정 된 나라이고 혁신적인 국가로 성공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한 때 헬 조선이란 단어가 회자 되었듯이 한국에서의 삶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여성들은 아직도 남자들에 비해 열등하게 평가 됩니다. 그래서 임금 등에 있어 성차별의 갭이 매우 큰 나라입니다. 남자랑 똑 같이 일하는데 여자는 남자보다 평균 37%를 덜 받습니다. 남녀를 떠나서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행패를 부리는 갑질의 모습이 일상의 삶에서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최근 대한항공 가족의 갑질 모습이 방송에서 자주 거론되며 공분을 사고 있는데, 인크루트의 조사에 의하면 직장인의 97%가 상사의 갑질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아파트 입주인은 경비원에게, 영화감독은 배우들에게, 어떤 소비자는 힘없는 종업원에게, 심지어 학교에선 일진들이 힘없는 같은 반 학생에게 갑질을 합니다. 그래서 이 갑질로 인하여 인격에 심한 모욕과 손상을 입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고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아가 세상의 나라들이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보고 계십니까? 각 자의 이해정도, 정치적 견해,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기준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 때 좌우에 흔들림 없는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거룩한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이 어떠해야 함을 명령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백성은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 여호와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 할 자들로 택함 받은 이스라엘은 마땅히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룩히 경외 하도록 하기 위해서 택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때가 되면 나라를 수호하기 위한 군인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에 따라 일정기간 엄청난 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근무해야 할 부대를 배치 받습니다. 그리고 거기 가서 자기 보직에 맞게 또 훈련을 받습니다. 왜요? 전쟁을 대비한 군인으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부름에 합당한 정체성을 갖게 하고 지키게 합니다. 마찬 가지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되도록 부름 받았기에 거룩하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은 무엇을 말할까요? 원어에서는 “카도쉬”라는 단어를 씁니다. 카도쉬는 거룩한, 거룩한 분, 성도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를 하나님께 대해 쓸 때가 있습니다.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는 말씀처럼요. 이때의 거룩함이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모든 것과 구별 되는 가장 높으신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즉 이 세상 그 어떤 신, 어떤 존재도 비견 될 수 없는 홀로 높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모든 존재와 구별되는 분입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이 우러러 볼 수밖에 없고, 우러러 봐야만 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존하심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권능과 영광이 너무나 높고 높기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모든 죄로부터 구별 되는 완전한 거룩함입니다. 특히 세상의 모든 죄와 구별 되는 완전한 거룩입니다. 이 완전한 죄 없음의 거룩히 완전한 반영 된 모습이 역사적으로 한 번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심 속에 나타난 그 의미가 반영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 짓기 이전의 모습입니다. 평화와 사랑과 의가 가득한 모습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말씀을 거역하면서 하나님을 그 중심에서 밀어냄으로서 관계가 깨지면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죄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담이 남탓하는 것이요, 그들의 자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중심에서 밀려나고 인간 자신이 주인이 될 때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 없는 자들, 여성들, 못 배운 자들, 젊은이들, 힘없는 사람들, 착하게 사는 사람들,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손해보고 착취당하고 무시당하고 핍박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너무나 끔찍한 곳이요, 너무나 깊은 아픔의 눈물이 가득한 곳입니다. 또 성적으로 타락하여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를, 남의 여인을 자기 여인처럼,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사람이 짐승과 하는 수준으로까지 내려갑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악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부르셨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짐승 같은 세상에서 진정한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진정한 인간의 삶을 새롭게 살게 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곤 그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거룩한 삶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그렇기에 여기에서 명령하는 거룩하라 하심은 “하나님 없이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려 하는 거룩한 땅에서, 세상의 풍속을 좆지 말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면서 2절 이하 3절부터 19장 마지막 절까지 거룩한 삶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말씀하십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 안식일 지키는 것, 우상숭배 금지, 하나님과의 화목한 삶,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 이웃의 것을 훔치거나 거짓말 하지 말 것, 재판의 공정함, 이웃에 대한 비방과 상하게 하는 것의 금지, 이웃 사랑, 자연질서의 교란 금지, 이방의 풍습금지, 딸에 대한 거룩한 보호, 노인에 대한 공경, 무당과 신접한 자에 대한 접근 금지, 이방 나그네에 대한 배려, 공정한 상행위 등을 명령합니다. 즉 거룩이 무엇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바른 관계입니다. 둘째는 이웃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이것은 이웃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속이지 않고,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억울함이 없도록 공정한 것입니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깊이 배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거룩이란 단지 죄를 짓지 않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이요, 이웃에게 의와 사랑을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들을 새 이스라엘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교회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참 자녀, 참 백성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이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묻는 자의 질문에 대한 답에 나와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그렇다면 우리의 조국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나라의 모습은 바로 무엇입니까? 겨레가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되는 것이요,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것이 가장 진정으로 바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으로 모든 민족과 나라가 회복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 큰 일이 났습니다. 한국에 큰 둑이 터졌습니다. 한국교회의 둑이 터졌습니다. 기성세대 중에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21%라고 작년에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생은 5% 미만이 기독교인이라고 답을 했습니다. 더 나아가 학생들은 3.5%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교회인 우리가 잘 못 살기 때문입니다. 보여주어야 할 것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전체 인구의 52%나 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못 믿겠다고 했고, 비신자들의 경우에는 기독교를 신뢰한다고 하는 사람이 10% 미만에 이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저희 교단 중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그렇게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며 은혜롭게 설교하시던 그 교회 담임 목사께서 편법을 써서 당신의 아들을 담임목사로 세습하게 했습니다. 교단 총회 헌법이 엄연히 세습을 금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신학생들과 교단 교수들과 또 한국의 다수의 뜻있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그것만은 안 됩니다 했지만 세습을 강행했습니다. 온 한국의 온 교회와 사회가 교회가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바르게 보여주는지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행했습니다. 이로서 교회에 대한 일말의 모든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교회 성도들은 말합니다. “우리 교회 일인데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냐?” 자 여기에서 한국 교회의 중요한 인식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즉 한국 교회 성도들이 많은 경우 한국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 교회 중심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대한 인식이 땅에 떨어지던 말 던 우리 교회 만 잘 되면 되지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댐 무너져서 그 밑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휩쓸려 죽어 나가는데, 자기 집은 댐 위쪽에 있다고 뭔 상관이냐 하고 뱃놀이 하는 사람이랑 똑 같은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겉은 교회 인 것 같지만 실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자기들만의 이익집단, 종교집단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시라면 그 무너져 내리는 댐을 막아서서 사지가 찢어지도록 막아섰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 세상에 나가 이웃을 위해 사는 삶을 살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가능한 인격적이고 존엄한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에 들어가 진정한 삶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 안에서 새롭게 시작 된 교회가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동시에 진정한 사랑으로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에 들어가 그 모습을 보여줄 때 많은 영혼들이 주 예수께 돌아왔고, 그들이 또 새롭게 되어 또 나가서 그 놀라운 소식을 나눔으로 마침내 로마를 변화시킨 그것처럼 그런 길을 가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안에서 부름 받은 우리는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바르게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 세워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한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볼 때는 찌질 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도 예수의 진리로 무장 될 때, 그 진리로 말미암아 세상을 깨트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갈릴리의 어부들이 세상을 깨트렸듯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겨레를 위하고 나라를 위한 다 할 때, 즉 이 나라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정한 이웃을 위한 삶을 사는 백성으로 가득한 나라로 회복되기를 구할 때 그 첫 번째 길은 바로 우리가 진정한 교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단지 나 자신의 구원 받은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겨레와 이 땅의 나라들을 거룩한 나라로 회복하시려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전하고, 가르치고, 세울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우리가 함께 모여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 사랑하고 배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회복시키려는 거룩한 나라의 이상은 교회와 성도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교회, 세상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붙들고 사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이웃을 위해 자신을 주는 삶, 이웃을 위해 공의의 길을 가는 사람, 진리를 사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회, 성도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가 무너져 내려서가 아니고, 나라가 형편없어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런 것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그 길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생의 길, 진리를 따라는 사는 길, 생명의 길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 길을 몰라 이 잔인한 세상에서 고통 하는 사람, 겨레, 나라들에게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진리를 심고 진리를 따르는 세상이 되게 하라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마28:18-20)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의 진리로 무장하여 실력을 갖추고 가정, 경제, 정치, 문화, 예술, 영화, 법, 음악, 교육, 스포츠, 시장 등 모든 영역에 침투해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없는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곳에 들어가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진리로 변화시키는 위대한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먼저 이 망가진 세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자신의 몸으로 다 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멀리 있고 알지도 못했던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 불타 없어질 쓸데 없는 현세의 복이 아니라, 이 땅에서는 핍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해도 영원히 남는 진리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또 모든 겨레와 나라가 이 진리로 진정한 삶, 진정한 나라가 회복 하도록 이 땅에 오셔 십자가로 사랑으로 부활로 그걸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위한 자비, 공의라는 거룩한 모습으로 세상에 들어가라고 말입니다. 거룩한 나라가 그들 위에 임하기를 꿈꾸며! 우리 나라와 겨레가 나아가 이 땅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이 뜻하신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꿈꾸며, 기도하며,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공의와 배려와 사랑하는 거룩한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부르심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이 일에 함께 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