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0729(주) 주일예배 본문 엡 5:18-21 제목 성령충만에 이르는 길 2 목적 성령의 충만한 지배에 이는 길을 깨닫되, 공동체적으로 함께 충만한 지배에 이르는 길을 가는 법을 알게 하고 도전하게 하려함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에 의해 전개 된 교회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역사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진 사람들을 통해 전개된 역사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세례, 즉 성령의 임재를 덧입을 때 였습니다. 이들은 성령의 임재와 더불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즉 성령의 강한 역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임재와 동시에 성령의 강한 역사에 의해 생전 가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나라들의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심하고 술 취했다 하는 자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기까지 했습니다. “술 취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성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셨으며,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증거를 듣고 마음에 찔린 자들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 믿고 성령의 임재를 덧입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공동체, 교회가 되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빠른 속도로 퍼지게 되자 예수를 죽였던 세력들이 증언자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그 자리에서 다시 역사하사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 했습니다.(행4:31) 또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일들을 섬기도록 일곱사람들을 뽑을 때 “믿음과 지혜가 충만”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라야 했습니다. 그 일곱 명 가운데 교회역사 최초로 순교를 당한 스테반 집사가 장엄한 증언을 마쳤을 때의 모습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라고 증거합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임재와 함께 덧입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에 사로잡힌 증언자들의 역사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헌신 된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특징” 중하나가 바로 “성령충만, 성령으로 채우심을 받은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성령세례와 충만 p57) 그런데 그리스도께 헌신 된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성령 충만, 성령으로 채워짐“의 모습은 항상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 중심에는 항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로 충만 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임 당한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이 예수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이루어진 그 놀라운 사랑, 그 놀라운 은혜로 가득 했습니다. 오직 이 예수만이 온 세상의 주와 그리스도라는 믿음으로 가득 했습니다. 나아가 아들을 주시기까지 이렇게 죄인들을 사랑한 성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변함없는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신뢰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기에 그렇게 예수를 핍박하고 교회를 압살하려 했던 바울 조차 죽음에서 부활하사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고는 그의 인생을 예수께 던졌습니다.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 되려 함이다”(빌3:8)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을 품고, 오직 예수를 의지하고, 오직 예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제가 어떻게 바뀝니까? 세상의 부, 세상의 인정, 세상의 명예, 세상의 재미, 세상의 멋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충만하다,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졌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예수의 주되심, 예수의 십자가 사랑,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오는 평화,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를 신뢰하고 따르는 믿음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성부와 성자 예수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지라”는 명령은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의 지배 상태 속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지배 상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계속 해서 예수와 그 은혜로 이끌림을 받습니다. 그 말씀으로 이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명을 향한 헌신으로 이끌려집니다. 즉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지는 자는 성령의 지배를 통하여 계속해서 “예수에 모든 시선이 고정되고, 예수의 뜻에 그 삶이 드려지는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 했듯이, 지금까지 내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그 모든 세상의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를 붙들고, 그 은혜 안에 머물기를 원하고, 그 삶을 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을 오해 합니다. 어떤 환상에 사로잡히거나, 입신에 들어가거나, 신비한 감동에 빠지거나 하거나, 뭔가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어떤 체험, 현상을 생각합니다. 즉,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만족을 구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했을 때, 혹은 은혜 받았다고 여길 때 그 결과를 봐야 합니다. “정말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품고, 예배하고, 신뢰하고, 따르고자 하는 결단과 헌신으로 새롭게 자신을 드리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성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과 예배와 순종으로 열매 맺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붙들고자 하는 조급한 마음에서 어떤 뜨거운 것을 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한 간구와 열망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와 그 사랑의 은혜를 깨닫것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증거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특별한 경험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의 최종 종착지점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를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성령으로 충만으로 채워지기를 구하는가” “나는 왜 뜨거운 경험을 원하는가” 나의 만족을 위해서인가? 어떤 신비에 들어가 보기 위해서인가? 진정으로 성부와 성자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감사와 찬양과 헌신을 위해서인가? 오직 예수께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나를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을 이기고 예수께 모든 영광을 돌리기 위함인가? 우리는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뻐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자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님처럼 이웃에게 예수의 향기를 내뿜는 사람이 되고자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지기를 구해야 합니다. 나아가 “나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는 사람” 이 성령으로 채워지기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고 행할 때 다가오는 세상의 시련과 유혹을 이기기 위하여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와 세상의 유일한 왕이신 예수를 품고 그 은혜와 사랑과 권능에 사로잡혀 삶과 말과 나눔으로 증언하는 사람이 되고자”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지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어떤 신비한 경험, 어떤 환상, 둥둥 떠다니는 무아지경에 빠지는 경험에 사로잡혀 어떤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날마다 한숨 쉴 수밖에 없는 꽉 막힌 현실 속에서 여전히 예수님만이 이 어둠을 밝히는 밝은 빛이심을 믿는 믿음이 살아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 몇 주 전에 한 이상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우리 교회 시설을 주일 오후에 빌려 쓰기를 원했습니다. 이분을 만나기 며칠 전 메니저를 통해서 우리는 허락 할 수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 왔습니다. 이분을 만나기 전에 허락 할 수 없다고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세워진 이 건물에서 다른 영의 활동을 전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명목상으로는 세계평화를 위한 활동이라 했지만, 이 운동의 핵심은 인도에서 시작된 우주의 기와 같은 Ekam이라는 어떤 현상에 접목하여 명상하는 활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서로 연결하여 함께 명상함으로 그 에너지를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테면 기를 모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저를 찾아온 그분이 자신을 소개하기를 자신의 아버지도, 그리고 자신도 장로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에서 “너를 에베소교회의 사역자로 삼은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딤전1:3)고 썼습니다. 여기에서 신화란 그리스 신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만물에 영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저를 찾아 온 분은 장로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성령이 아니라, 바울이 금하고 있는 인도의 신화에 빠져 엉뚱한 것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불교인들 중에도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고, 잡신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현상을 대단하게 여기고, 그런 현상이 있는 곳이 신비로운 뭐가 있는 것 같이 여겨지는 것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하는 사람, 연약한 인간에겐 당연한 모습입니다. 아마도 저를 찾아온 그분은 예수 보다 이캄이라는 어떤 신비한 현상에 접목하여 뭔가를 얻는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 경험이 그분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고 새로운 세계를 보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를 믿는 다하면서 실은 우주의 기에 연결 되려는 마귀적인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믿음이 어린 사람들에게 넘어지게 하고, 방언을 안 받으면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고 믿음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어떤 현상을 좇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적과 은혜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깨닫는 것이요, 이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어떤 두려움이 몰려오고, 절망의 상황이 몰려와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유일하신 주이시며, 유일한 진리인 예수가 나를 붙들고 함께 계심을 믿는 것이 가장 큰 기적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가르치신 그대로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15:26) 성령이 무엇을 증거 할 것이라 했습니까? 예수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시면 땅 끝까지 가도록 권능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권능이 어떤 이적, 기적의 권능을 포함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권능 그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넘어 열방으로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오직 예수를 위해 이방의 문화, 국경을 넘어서라도 예수를 증언하겠다는 그 믿음의 담대함을 말하는 것이지 신비한 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간절히 이루기를 원하시고 또 이루가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다시 오실 예수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 예수의 사랑과 은혜와 권능을 맛보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예수를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길이요, 참 된 승리의 길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보게 하고,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꿈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와 그 은혜와 그 영광과 능력과 비전에 사로잡혀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오직 예수 위해 살고 예수 위해 죽는 사람, 즉 성령께서 계속해서 마음속에 오직 예수를 향한 마음을 뜨겁게 일게 함을 좇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뜻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간으로 더욱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예수를 붙들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도 세상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와 계십니다. 믿는 모든 자에게 부어지신 성령 하나님이 와 계십니다. 그렇기에 성령께서 내 눈을 열어주시고, 내 마음을 열어주시고, 내 귀를 열어주사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깨닫기를 더욱 사모하여 무릎을 꿇고, 그 은혜에 더 깊이 들어가기를 사모하며, 내 어둡고 지친 마음에 소망의 빛으로 살아계신 주님으로 모시기를 사모함으로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면 성령께서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점점 우리 안에 예수로 채워집니다.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채워집니다. 나와 함께 계셔서 붙드시는 분임에 대한 믿음으로 채워집니다. 나를 고치고 새롭게 하는 은혜를 덧입어 찬양과 감사가 솟아납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존재에서 사랑과 겸손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삶으로 성경을 번역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이요, 찾는 자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마7:7) 성령을 통해 이 은혜가 깊이 임하기까지 계속해서 조용히 하나님을 찾아 무릎을 꿇고 십자가의 예수, 살아계신 권능의 왕 예수, 우리 삶속에 오신 복음서의 예수를 묵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앎과 그 은혜와 사랑과 믿음으로 채워지기를 구하십시오. 특히 성령이 역사하시는 주일 예배를 사모하며 참여하십시오. 찬양하고 노래하고 섬기고 서로 순종하며 주를 높이십시오. 성령이 주시는 말씀이 아니면 삼가십시오. 함께 기도하고 은혜를 나누십시오. 성령께서 이길 가는 우리에게 하루하루 예수로 충만하게 하실 것이요, 믿음으로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이요, 나를 자녀를 가정을 새롭게 하는 은혜로 충만케 하실 것이요 날마다 붙드시고 함께 계시는 권능으로 세상을 이기도록 충만케 하실 것이요, 오직 예수께 대한 신뢰와 예수님의 비전에 대한 헌신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이요, 감사와 찬양과 사랑과 용서와 겸손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