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26(주) 주일예배 본문 고전 14:26 제목 교회의 덕을 세우는 성령의 은사 목적 은사의 다양성 이해, 은사의 진정성, 은사의 참 목적성을 이해하는 성도가 되게 하려 함이다. 옆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을 해보는 시간을 잠시 가져 보겠습니다. 서로간에 이렇게 여쭈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혹시 카리스마가 있어 보입니까?” ....... 저도 성도님들께 질문을 드리겠습니까? “제가 좀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떤 지도자, 예술가를 묘사 할 때 “카리스마가 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어떤 힘과 천재성이 합쳐져 남다른 어떤 권위를 풍길 때 때 주로 이 단어를 씁니다. 존 스토트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는 세속적인 스타들에게 이 말을 적용하는 것을 정당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카리스마란 단어는 “고통, 위험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하나님의 선물”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종교적 재능, 권능”을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단어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는 말이기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 말을 쓰는 것을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이 말을 왜곡해서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을 묘사 할 때 “카리스마”가 있다고 했을 때, 그 의미의 기본적 뉘앙스는 “남다른 어떤 권위”가 있다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래서 마치 눈에 확들어 오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을 때만 이 단어는 쓰는 것처럼 인식 되어 있습니다. 쇠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두에 서로 “제게 카리스마가 있어 보입니까?”라고 서로에게 물었을 때 “예”하고 자신 있게 동의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쇠뇌되어 교회에서 조차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눈에 확 들어오는 은사들만 가리기는 것처럼 사용합니다. 그 부작용이 뭡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소하게 보이는 카리스마, 즉 은사들인 “긍휼을 베푸는 일, 관대함, 다양한 봉사”들에 대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시시한 은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잘 못 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 모든 것에 대해 “카리스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띠는 것만을 은사로 여겨 더 높이고, 그만 못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잘 못된 생각입니다. 로마서 12:6-8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자 이 말씀 첫 머리에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쓰인 “은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리스마”입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보통 “gifts, 선물들”로 표현합니다. 사회에서 오용하는 “남다른 권위가 느껴지는 어떤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바로 카리스마, 은사, 즉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선물이 평범하여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정녕 하나님 주신 카리스마입니다. 그렇기에 평범한 카리스마, 은사이나 그 은사로 겸손히 교회를 섬길 때 우리는 이런 성도를 진정으로 이렇게 표현해야 합니다. “와우, 카리스마 있네” 한 번 우리끼리 그렇게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평범한 봉사로 교회를 겸손히 성도 두어 분의 이름을 호명 할 때 답을 해보십시오, “와우 카리스마 있네” “아무리 힘들어도 예배 순서를 스크린에 올리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고재균 성도” (와우 카리스마 있네) “맛있는 밥을 지어 섬기고, 또 맛있게 먹고 즐겁게 설거지 하고, 서로를 세우는 우리 모두”(와우 카리스마 있네) 한편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카리스마, 즉 은사가 아직 뭔지 정확이 모른다 할지라도 우린 그 사람에게도 “드러나지 않은 카리스마”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 우리 청소년, 청년들, 혹 믿음 생활을 막 시작 하신 분들이 거기에 해당 됩니다. 고전 12: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모든 일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 그리고 엡 4:7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이 두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카리스마”즉 은사, 선물을 주시는데, 그 뜻대로 주시되, “각 사람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즉 어떤 특정한 사람만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각 성도들에게 “카리스마,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그 은사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다 하더라도 믿는 모든 사람들 각각에게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장기와 지체가 다 각각 다른 고유의 역할과 기능이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모두는 각각 고유의 은사가 주어졌고,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진심으로 믿는 성도 모두는 다 “카리스마”가 있고,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옆 사람에게 믿음의 눈으로 답을 해봅시다. “와우, 성도님, 카리스마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다 각각, 각기 다른 카리스마, 즉 은사라는 선물을 주시며,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어느 것 하나 요긴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고전 마지막 절인 12:31절은 이렇게 마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더욱 큰 은사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이 말씀에 앞서 12: 28절에서 30절에 걸쳐,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하는 자,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말하는 은사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 이런 은사를 행하는 사람들뿐이겠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나서 31절 말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그래서 이 구절을 해석 할 때 많은 경우 ‘더욱 큰 은사’를 앞서 기록한 은사들보다 더 크고, 더 뛰어나고, 더 눈에 잘 드러나는 굉장한 은사를 구하라고 하는 것처럼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원문의 단어를 살펴보면 “더욱 큰 은사”란 “보다 유용한, 보다 쓸모 있는, 보다 유익한”이라는 의미가 더 큽니다. 즉 바울은 은사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든든히 서도록 주신 것이라는 차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남들이 알아주고, 눈에 띠는 은사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속한 교회에 필요하고 유용한 은사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서는데 보다 유익하고 필요한 은사가 더욱 큰 은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은사를 구할 때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든든히 서기 위해 꼭 필요한 은사를 베풀어 주소서” 2. 겸손하고 거룩하고 진실한 신앙의 길을 가며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은사를 주십니다. 눈에 띄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주십니다. 그래서 은사를 받아 일도 잘하고 열심입니다. 심지어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이 일을 열심히 충성되게 수행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에 덕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바로 이런 문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은사를 받아 열심히 일하고 뭔가 하는 것 같은데, 실은 다 쓸데 없는 짓, 도리어 교회를 허무는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 쓸데 없고 도리어 교회를 허무는 것이 되는 것일까요? 그 열심과 충성에 “사랑”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렇게 열심을 내고, 그렇게 수고하는 것이 도리어 교회를 자라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싸우고 아픔을 주고 분란케 하여 허무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 13:1-3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 어떤 탁월하고 대단하고 놀라게 하는 은사를 선물로 받았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 은사를 가진 사람은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그 자신에게도 그 어떤 유익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행하는 행위는 교회를 시기와 비난과 상처와 분란의 장으로 만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허물을 가려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교회를 섬기는 은사는 반드시 이러한 사랑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은사가 교회에서 쓰이는 더 좋은 길입니다. 참고, 교만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진리에 따라 행하고,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 없는 봉사는 누군가에게 반드시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교회를 섬기는 일을 은사를 따라 수행 할 때 내 안에 성경에서 말하는 이런 사랑이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없다면 회개하고 주님께서 원수 된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리고 견디며 모든 것을 주신 그 마음으로 채워지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3. 이렇게 은사를 따라 사랑으로 교회를 섬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은사를 주셔서 섬기도록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 고린도교가 하나님을 예배 할 때 거기에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가 있었습니다. 시편 같은 말씀을 낭독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또 가르치는 말씀, 즉 설교와 교육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시는 계시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 방언의 말씀도 있고, 이를 통역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꼭 이런 일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활동이 예배와 공동체 활동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 이러한 섬김과 활동들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 속에 사랑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질서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른 나라의 말을 하는 방언, 혹은 세상의 언어가 아닌 신비스러운 방언 들을 하는 사람들이 무질서 하게 입을 열어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유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신 은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합니까? “모든 것은 반드시 교회의 더욱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교회에 유익해야 한다는 말로 쉽게 해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 단어를 살펴보면 “덕을 세운다”는 말의 뜻은 일차적으로는 “건물을 세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은유적으로 쓰이게 되면 “기독교의 지혜, 신앙, 행복함, 거룩함 안에서 다른 이의 성장을 증진하는 활동”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라는 말씀을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서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견고히 세워지도록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그리고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형제자매를 그리스도의 인격과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세우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를 이루어 어떤 직분, 어떤 사역이라는 은사를 받았을 때, 그리고 그것을 수행할 때 그 모든 것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을 세우는 것“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서 견고히 서서 다가오는 모든 시련을 이기는 성도와 교회로 세우는 것이 우리가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활동의 목적입니다. 바울은 이 근본적인 목적을 에베소서 4:7,11-12절에서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 그가 어떤 사람에게는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의 몸을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 우리에게 은사를 주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눈에 띠던, 그렇지 않든,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 모든 봉사는 남을 위한 것이요, 예수의 인격과 형상을 닮은 견고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수행 할 때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이 자라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사람이 되도록 하는 열정을 품게 하는 동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런 섬김의 길을 가는 성도를 보고 배우는 것이요, 도전을 받는 것이요, 실제로 그 봉사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교회 활동과 섬김을 위해 주신 은사는 사랑과 함께 움직여야 하고, 우리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가운데 싸여 갈 때 우리는 “이 세상으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장차 주께서 오셔서 주실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한때 성공회의 감독이 되기를 꿈꾸었던 사무엘 브랭글이라는 청년이 구세군에 지원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러나 부스 장군은 그의 지원을 마지못해 허락 하면서 그에게 겸손한 마음을 키워 주기 위해 다른 훈련생들의 군화를 닦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낙심한 브랭글은 속으로 ‘내가 군화나 닦으려고 내 꿈을 좇아 대서양을 건너왔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어느 날 환상 중에 예수님께서 무식한 어부들의 발위로 허리를 굽히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저는 그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성도를 세우라고 직분과 그것을 수행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다른 사람, 곧 자격 없는 우리를 하나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주신 직분과 은사를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해 섬길 때 우리 모두 함께 자라서, 세상에 살아계신 하나님, 주님이 오셔서 주실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는 산 표지가 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교회를 향하여 함께 기도하고 도전하고 섬기라고 우리는 부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