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2(주) 주일예배 본문 요 4:25-29 제목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 목적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를 더욱 주로 모시고, 기다리며, 깨어 있는 삶이 되게 하려 함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목이 마르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잘 되었으면, 자식이 잘 되었으면, 좋은 남자, 혹은 여자를 만났으면, 사업이 잘 풀렸으면 하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실패한 인생, 상처, 아픔, 고통, 눈물에서 벗어나고픈 갈망, 애타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 아픈 곳을 톡 건들기만 해도 뜨거운 눈물을 바가지로 쏟아 놓은 아픈 목마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다 가진 사람에게도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허무입니다. 세르반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을 보내면서 허무감을 느껴 본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헛되이 보낸 것이다.” 허허한 우주 속 먼지 한 톨 같은 이 지구에 사는 자신의 유한성을 생각 할 때, 나아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 할 때 모든 것을 가졌다 하는 것이 다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랄파르처라는 사람은 “이 세상의 행복이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세상의 명성이란 무엇인가. 꿈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지역 수가성의 여인도 바로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다섯 남자와 살았으나 다 실패하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살면서 갖은 소리를 들으며 낮아 질대로 낮아진 자존감, 동네 사람들의 입방에 오르내리며 사회적으로 냉대 받고 버림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여인이었기에 그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 뜨거운 정오 12시, 아무도 다니지 않는 그 시간에 물을 길러 나올 수밖에 없을 만큼 딱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사마리아에 들어간 예수님이 그 뜨거운 한 낮에 지친 몸으로 덜썩 우물가에 않습니다. 그리고 그 때 사람을 피해 물을 길러 오는 그 여인을 만납니다. 아무도 만나고 싶어하지도 않고, 말을 섞고자 하지 않았던 그 여인에게 예수께서 찾아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해 이 여인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떻게 달라집니까? 첫째 인생의 목표가 달라집니다.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물 뜨러 온 사람이 물을 버리고 동네로 들어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목마르다 했듯이, 일반적인 사람들은 육신의 필요를 찾습니다. 이 세상의 필요를 찾습니다. 그것이 있으면 좋을 것 같고, 행복할 것 같고, 안전할 것 같으니 그런 것입니다. 이 여인도 물이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도 물을 마셔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밥해야지, 설거지 해야지, 씻어야지, 빨래해야지... 물 없으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만큼 물은 중요하고 필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물을 길러 왔던 여인이 물을 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여인이 메시야, 곧 구원의 왕이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인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필요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가 인생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주신 예수, 자신의 죽음으로 나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신 예수, 이 사랑으로 항상 나를 붙드시는 예수, 인생의 허무에서 건져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 건설을 위한 부름 받은 존재로 살게 하는 예수, 모든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신 예수를 만나는데 어찌 인생이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를 만날 때 인생은 새로워집니다. 만약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예수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인생이 바뀔 것이요, 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질투와 시기와 경쟁과 보이지 않는 술수를 서슴치 않았던 사람이 다 내려놓고 손해 보더라도 예수를 따르는 길을 갈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일 것입니다. 자기의 명예를 구하던 모습을 내려놓고 형제를 높이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이용하던 악한 모습을 버릴 것입니다. 대신 작은 자까지도 인격적으로 대하고 존중하고 섬기기를 기뻐 할 것입니다. 이 모습이 초대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차별이 없고 가난한 자도 없고 함께 형제자매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는 길을 간 것입니다. 그러자 사회가 그걸 알아보고 더욱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개인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진정한 희망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생의 참 된 목표가 되시는 예수를 만날 때 비로소 죄로 오염된 세상의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를 따라 새로운 삶을 살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예수를 정말 깊이 알고 만남으로 말미암아 내가 붙잡았던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예수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또 어떤 변화가 여인에게 일어났습니까? 둘째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웃과의 회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이전까지는 이 여인에게 있어서 이웃은 두려움의 대상, 회피의 대상이었습니다. 만나고 싶지도, 대면하고 싶지도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만나느니 차라리 연을 끊고, 담을 치고 사는 게 편했습니다. 우리도 속상하고,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귀찮기도 하지만, 두려워집니다. 자존감이 낮아 질대로 낮아져서 이웃이 다 자기를 손가락질 하는 것 같고, 수군거리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그래서 담을 점점 더 높이 쌓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하염없이 고통스런 고독의 길을 갑니다. 살아있다고 하나 실은 죽은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에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없습니다. 오직 고독과 괴롬과 쓸쓸한 황량함이 있을 뿐입니다. 그랬던 이 여인이 그토록 회피했던 사람들을 향하여 갑니다. 스스로 그들의 이웃이 되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생명의 역사 일어난 것입니다.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는 힘이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몇 주 전 한국에서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러시아인 엄마를 둔 중학생이 같은 학교 친구들의 집단 괴롭힘을 받던 나머지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러시아도 아니고, 잘 살아보겠다고 한국에 왔는데, 남편이란 사람은 떠나고, 홀로 아들을 어렵게 키우고 있는데, 그 아들이 그만 그렇게 가슴 아프게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가 파괴 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죽음의 병입니다. 그 병이 어느새 아직 어린 저 중학생들에게까지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 그리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 된 죄의 결과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회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 외면하고 왕따 당하던 이 여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대화를 통하여 이 여인의 눈을 열어줍니다. 한 많은 이 여인이 그 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를 보여줍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그동안 자신을 얽어매었던 세상의 짐을 버리고, 사람들에게로 달려갑니다. 자기를 욕했던 사람들, 자신을 외면했던 사람들에게로 달려갑니다. 더 이상 과거의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눅19장 삭개오의 얘기가 나옵니다. 이때도 예수께서 삭개오를 찾아갑니다. 예수님 앞에 나설 자신이 없었던, 그저 나무에 올라 먼 발치서 나도 예수를 만났으면 하는 마음만 품고 있던 삭개오를 예수께서 아시고 그를 만나주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매국노라 욕하고 사람취급하지 않았던 그에게 가서 “네가 오늘 너의 집에서 묵어야겠다. 네 집에서 좀 쉬어야 겠다”하십니다. 삭개오를 인격적으로 대하며 존중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비로소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사람다운 존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어떻게 합니까? 세리장으로 활동하며 착취하며 빼앗은 것을 네 배로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자들의 아픔을 회개하고 씻어주는 길을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로 파괴 된 관계 이 사회의 관계가 회복 되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죄 없음에도 죄인에게 오셔서 그 죄 값을 대신 짊어지신 예수를 만나는데 있습니다. 죄 없음에도 자기 생명을 주기까지 모든 것을 주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의 길, 화평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신 예수를 통해 나를 높이고, 자존심을 세우고, 자기를 지키려던 옛 모습을 버리고, 용서와 화해를 위한 십자가를 지는 길을 가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관계가 파괴된 나 자신, 이 사회에 유일한 희망은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인이 또 어떻게 변했습니까? 셋째로 한 마을을 예수께 인도하는 위대한 증인이 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꼭 숨겨두었던 자신의 가슴 아픈 얘기를 달 알고 계신 분을 이 여인은 만났습니다. 남편이 다섯이 있었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또 한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편이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는 남자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자신을 버리고 떠날 사람인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 아프고 기구한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여인이 글재주가 있어서 소설을 썼다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 많은 이 여인의 고뇌를 담은 그 스토리는 눈물 없이는 읽지 못할 기막힌 그 얘기에 공감하며 가슴을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저 여인의 깊은 가슴속에 묻어둔 그 기막힌 아픔과 눈물을 아셨습니다. 그걸 아시고 모든 희망을 잃은 여인을 찾아가 세상에 마르지 않은 생수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비록 천대 받는 사마리아 인이라도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장소, 신분, 인종,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하십니다. 이로써 불의한 인생의 모습으로 인해 조롱받고 외면당하는 이 여인을 자유케 하십니다. 이런 사람조차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그 은혜의 품에 안길 수 있다고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낮아질대로 낮아진 이 여인의 자존감에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고 그를 이렇게 어루만져 주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말하지 않도 그 모든 아픔과 눈물을 다 아시고, 그 여인을 그렇게 찾아가 그렇게 품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여인은 천하고, 자격 없고, 배운 것도 없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자기의 속을 다 아시고 책망치 않고 다 품어주시는 분이 그토록 기다리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놀랍니다. 그리곤 메시야가 오셨고, 그 메시야를 만난 그 놀라운 감격과 감동을 여인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을 길러 온 목적도 내 던지고, 즉시 동네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지금까지는 손가락질 하고 비난하고 멸시하던 천박한 여인이라고 상종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께 나아오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고, 예수가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믿는 자들이 됩니다. 즉, 유대인들에게 외면 받고 천대 받던 그 아픔과 소외의 땅이 이제 하나님을 성령과 진리를 따라 예배하는 땅이 됩니다. 가장 천한 자들로 취급받던 영혼들이 가장 깊은 사랑의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그 모든 은택을 누리는 구원, 곧 나라가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누구를 통해서 시작 되었습니까? 그 성에서 가장 못난 자, 가장 불결한 자, 철저히 실패한 자, 여름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천박한 여인, 그러나 이 세상을 구원하기 오신 메시야, 예수를 만나고 새롭게 된 이 여인의 헌신과 증언을 통해서 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 버림받고, 천대 받고, 주목하기는커녕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가장 천하고 낮은 한 여인, 자신조차 자기의 인생에 어떤 희망 도 발견 할 수 없는 철저히 실패한 한 여인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아가 모두가 버린 이 여인을 일으키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더 나아가 가장 작은 이 볼품 여인을 통해 흑암의 땅에 소망의 빛을 비추고 그 땅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흉악한 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살 자격이 없다 하는 영혼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데 까지 추락하여 모든 사람이 버릴 수밖에 없는 영혼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가진 것 없고, 남들보다 뛰어나지 못하고, 늘 드러나지 못하는 별거 아닌 인생 같은 비애를 품고 기죽어 지내는 영혼들을 귀하게 여기사 조용히 다가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네 문을 열어라. 내가 너의 주인이 되어주겠다. 내가 너의 길이 되어 주겠다. 내가 너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통로가 되게 하겠다. 너를 통해 이 땅에서 소망을 잃은 영혼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는 등불이 되게 하리라. 동서남북을 둘러보라. 그곳의 영혼들이 너를 통해 소망의 빛을 보리라”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과 달리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분이요,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도리어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 가는 등불 같은 가난하고, 천하고, 배운 것 없고, 실패하고, 상처투성이요, 세상이 다 외면하는 그 영혼을 통하여 세상을 살리는 빛과 소망의 통로가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예수님이 바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희망이십니다. 이 시대의 희망이신 예수님을 날마다 만나십시오. 날마다 부어주시는 생수로 넘치게 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