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12장1-6 제목 우리의 기쁨이신 예수 목적 기쁨의 우물(근원)이신 예수님을 날마다 만나 기쁨을 길어 올리는 성도가 되도록, 나아가 웃게 하는 자가 되도록. 성경이 항상 일관 되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희망”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경을 피면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절망, 좌절, 낙심, 죽음에서 건져내시고 끌어 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피면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희망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영혼은 비로소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기쁨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그렇습니다. 이사야 예수님 오시기전 약 740년 경부터 680년경까지 60여년간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시대에 여호사밧,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등 네 왕이 거쳐 갑니다. 그러나 이중 웃시야왕은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받는 그해 죽습니다. 그 다음은 요담 왕인데 약 20년 정도 위에 있었습니다. 그 기간 현재는 다마스쿠스라 불리는 다메섹을 중심으로 한 아람이라는 나라와 북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곤 했습니다. 즉 늘 전쟁의 위험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됩니다. 그는 약 15년을 통치했습니다. 그가 왕으로 있는 동안 당시 근동세계의 패권 지형이 달라지는 시대 였습니다. 앗시리아가 힘을 얻어 서진하 때 였습니다. 그래서 아람이란 나라와 손잡고 남이스라엘을 위협하던 북이스라엘도 그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되었고, 남 이스라엘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그러니 나라를 통치하는 왕의 입장에서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가 쳐들어 온다는 소식은 참으로 끔찍한 흉보였습니다.
나라가 사는냐 망하느냐가 달려 있고, 나와 백성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달린 심각한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은 이것은 하나님의 채찍이었습니다. 불의를 행하고, 형식적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힘과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였던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두어분 빼고는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 전쟁이란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죽이면 살고, 못죽이면 죽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인격이란 개념은 통용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지금부터 2700여년 전 전쟁일진대 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전쟁을 통해 강한 군대에게 군인들이 다 죽어나갑니다. 포로가 되어도 거의 죽음에 처해집니다. 산다해도 노예로 끌려갑니다.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가족들, 아내, 친적, 어린 아이들이 다 죽습니다. 전쟁 속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살륙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이런 전쟁임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당시 세대이기에 왕들은 두려웠습니다. 백성도 떨었습니다. 실제로 아하스가 남이스라엘 왕으로 있을 때 BC722년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함락시켰습니다. 죽일 자들은 잔인하게 다 죽이고, 포로로 데려갈 자들은 앗시리아로 데려 갔습니다. 동시에 정복한 북이스라엘을 자신들의 땅으로 영구화 하기 위해 앗시리아 인들을 이주시킵니다. 자국민을 심은 것 것입니다. 그 결과 앗시리아인들과 북이스라엘 인들이 혼인관계를 맺으며 사마리인들이 나타납니다. 북 이스라엘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럴진대 당시 나라를 통치하던 왕이었던 아하스 왕 뿐만 아니라 백성들 조차 이제는 전쟁의 손문을 들으며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 때 이렇게 절망고 두려움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사야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그 유명한 말씀을 아하스 왕에게 증거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그리고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러한 시대에 두려움과 절망에 싸여 희망과 기쁨을 잃은 백성들에게 전한 희망의 멧시지 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말씀이 바로 “그 날에”라는 말씀입니다. “그 날에”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하시는 날입니다.(10:27) 불의를 깨트리고 공의와 정으로 다스리시는 왕이 임하시는 날입니다. 불의의 세력인 강대국은 깨트리고 의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날인입니다. 하나님을 무시고, 자기들의 힘만 믿고 떵떵거리고 살면서,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자들을 심판하는 왕으로 오시는 그 때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날이지만,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상의 왕과 세력들을 다 꺼꾸러지는 심판의 날입니다. 이사야는 징계의 째찍을 거두시고 이스라엘을 위로하고 영광을 회복 할 그 날이 오게 될 것이라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날이 되었을 때를 미리 내다고보고 그 날이 이루어진 날 있게 될 일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다스릴 그 날이 올 것이며, 그날에는 이렇게 될 것이니 희망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왕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그날에 어떤 일이 있게 될까요?
1절입니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주께서 나를 안위 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라” 하나님의 징계가 그치고 하나님의 위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서 하나님께 감하는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떨던 백성, 전쟁에 패하여 죽고, 포로로 잡혀간 그 백성에게 위로, 즉 회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망했던 나라가 다시 사는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죄의 짐이 끝나고 용서와 회복의 은혜가 임하는데 어떻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또 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말씀과 같이 고백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날이 되면 지금까지는 세상의 힘, 권력, 돈이 가진 힘, 스펙이 가진 힘, 강대국의 우산 아래 들어가는 전략, 즉 구원의 능력이 없는 우상들을 바라보고 예배하던 이스라엘이 완전히 바뀌에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해도 번거롭게 여기고, 형식적으로 드리던 이스라엘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바뀐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나의 구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입니다. 나의 노래입니다. 나의 구원입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고 믿고 예배하는 자들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이 자리에 계신 분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이사야가 선포합니다. 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요즘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름인 4-10월까지 6개월간 비가 오지 않습니다. 10월 이후 그 다음해 3월까지 우기인데, 우기라도 해도 평균 강우량이 46mm에 불과합니다. 이렇듯 매우 건조하고 물이 귀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물에서 물을 길는다는 말은 그 자체가 희망과 생명과 기쁨을 상징합니다. 메마른 땅, 드물게 있는 우물에서 목말라 애타는 사람이 물을 길어 올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요.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그 시원한 물을 마실 생각에 모든 시름이 떠나고 만면에 기쁨이 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실 때 그 몸이 살고, 희망이 솟는 것이지요. 마치 그런 것과 같이 그 날이 오면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게 될 것이라 희망을 선포합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웃음을 잃은 백성, 공허하며 황폐한 백성, 슬퍼하고 쇠잔하는 백성, 죄로 더러워진 백성, 죄의 저주에 사로잡힌 백성에게 그 날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날에” 대한 선포는 오늘 본문 앞서 10:27, 11:6, 24:21, 25:9, 26:1, 27:1에서도 계속 됩니다. 예를 들면 26:1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음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로다” 하나님께서 2중으로 난공불락의 성 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마치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날이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에 대한 사상은 이스라엘 민족엔 “구원의 날, 해방의 날”이요,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들에 대해서는 “심판의 날”로 발전합니다. 오늘 함께 교독한 스바냐 선지자의 선포도 그와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요시야라는 훌륭한 왕이 통치 할 때 였지만, 이미 남 이스라엘은 멸망을 향해 가고 있을 때입니다. 아하스 왕 때는 앗시리아가 문제였는데, 요시아 왕 때는 앗시리아를 멸망케 한 바벨론이 문제였습니다. 그 때 스바냐 선지가 희망을 선포합니다.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쫒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19-20) 그 때가 되면 강대국에 핍박을 받던 이스라엘, 망하고 포로되어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는 초라한 민족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망했던 민족을 일으켜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민족의 슬픔, 고통, 수치가 제거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겨레를 그토록 능멸하고 압제했던 일본이 패망하고 반대로 우리 겨레엔 해방이 임하여 만세와 웃음이 회복된 나라 되었듯이 그런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을 기대했던 그 날은 이스라엘이 망하기까지 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물론 그 날과 비슷한 날은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망해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이 페르시아 고레스 왕 때 돌아와 성을 세우고, 성전을 다시 세운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로도 헬라제국, 로마제국에 넘어가고 맙니다. “슬픈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게 하시겠다”는 언약은 공허 한 것 같이 보여졌습니다. 그 때는 언제 오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천년 전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에게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가 말하는 그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오셔서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일을 행하는 자, 곧 메시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선포한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라는 말씀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까?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구원의 우물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의 길어 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 자리에 계신 예수를 믿는 성도님들께서는 예수 안에서 이 하나님, 즉 우원의 우물이 되신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두레 박만 내려 퍼 올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만이 주시는 유일한 생명의 물, 곧 하나님만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소망으로 우리를 웃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명령합니다. 그리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명령합니다. 기도와 간구로 구원의 우물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 기쁨의 물을 길어 올리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흔들거리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마음을 제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요?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지 못한 놀라운 지혜로 하나님의 비전과 소망을 다시 살아나게 하고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나아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성숙한 신앙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나아가 성도들 조차 기쁨을 잃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를 통해 열린 우리의 구원이시며, 힘이시며, 구원의 샘이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길어 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벼운 재밋거리로 영혼을 채우려고 엉뚱한 우물을 팝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이스라엘에게 말했듯이 “물을 저장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세상 재미에 매여 있을 수록 영혼은 황폐해집니다. 거기에 하나님 없기에 영혼 깊은 곳에 임하는 기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구원의 우물이신 예수께 나아가 그 물을 깃는다고 생각해보십시요. 거기에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깊은 위로와 만져 주심이 임합니다. 진흙과 같은 나를 하나님이 빗으시는 귀하게 쓰일 토기가 되는 은혜와 기쁨이 임하는 것입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치료하시고, 고치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고,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나이 90 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대로 사라가 90세에 아이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입니다. 그 때 태어난 아이가 약속의 아들, 이삭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때 사라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하신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시로다” 그런데 웃게하시는 이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임하셨습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그 때가 임한 것입니다. 예수 안에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떠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의 권면대로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나아가것입니다. 기쁨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을 저 깊은 곳에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 내 영혼의 두레박을 하나님께 내릴 때 거기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쁨의 우물을 길어 올리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대한 믿음이 견고해지고,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습관이 굳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날마다 구원의 생물, 기쁨의 우물을 밥 먹듯이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이 언제 일지 모르나, 이미 오신 주님과 함께 날마다 그 구원의 기쁨으로 가득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회복하여 소망 없는 얗은 재미에 빠져 있는 이웃에게 진정한 기쁨을 나누고 소개하는 성도의 길을 가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