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3(주일)교회창립24주년 기념주일 본문 사 43:18-21 제목 우리 안에 새 일을 이루실 하나님 어느새 1월이 지나고 2월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는 여전히 새해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습니다. 아직 뭔가를 새롭게 시작 할 수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두 가지 관점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는 우리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새 일의 관점에서, 다른 하나는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새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새해의 계획을 세우셨을 것입니다. 기대와 꿈이 담긴 계획을 말입니다. 특히 뉴질랜드에 새롭게 오신 분들은 그 어떤 분들보다 꿈에 부풀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의 경우 새해가 되었다 해도 기쁘지 않고, 더 뭘 기대할 것도 없는 모습으로 맞이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기대와 희망에 대한 소망을 줄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지속 되는 과거의 아픔과 상처가 마음을 억눌러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의 잘 못 된 선택으로 인해 요 모양이 되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며 후회하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오늘의 나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 날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전일, 옛 일이란 무엇일까요? 16-17절에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큰 물 가운데 지름길를 내고, 병거와 말고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부 같게 하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대로부터 천년을 거슬러 올라간 사건, 홍해의 사건을 말합니다. 애굽에서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홍해를 가르고 지름길을 내어 건너가게 하신 하셨고, 반대로 뒤 쫒는 애굽 군대는 물에 수장 된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전일, 옛날 일을 잊으라는 말씀은 ‘그 위대한 홍해 사건’을 잊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너무나 중요하고 큰 사건이어서 사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홍해사건은 우리 민족으로 치면 8.15일 광복절 같은 날입니다. 우리는 광복절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겨레에 있어서 너무나 너무나 중요 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홍해사건을 잊으라합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으로 역사하실 하나님의 새 일이 그 일보다 더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 개인에게 적용한다면 과거의 어떤 영광,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갔으면 하는 그 기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나의 인생을 살게 한 그 어떤 것, 오늘의 초라한 나의 모습을 가져오게 한 그 사건 이전의 좋았던 그 때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로 되돌아 갈 수만 있었으면 하는 후회와 아픔이 교차하는 그 기억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되돌아 갈 수 없고, 그 때 그런 일이 없었어야 했는데, 그 때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며 나를 괴롭게 하는 그 기억 말입니다. 그렇기에 인생의 광야가 실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찢기고 후회로 가득한 우리 마음이 바로 광야요 사막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일, 옛 적일을 기억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함없이 이어지는 한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다양하게 표현 할 수 있겠지만 쉽게 표현하자면 “희망이요, “회복”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망가진 이 세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 창조의 세계 그러나 망가져 가는 이 세계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나 죄와 그 죄가 만들어낸 악에 빠져 신음하고 고통 하는 인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아픈 현실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케 하시는 희망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눈이 너무나 어둡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일을 이루시는 희망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과거와 현재의 고난, 혹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선포 될 때 그 말씀을 들어야 할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간 그 비참한 처지였으니 무슨 기대와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새 일을 행할 것이요, 곧 나타낼 것이라”는 회복과 희망의 멧시지를 전합니다. 그러니 “새 일을 행할 날이 네게 이를 것이니 지금 네가 있는 그 상황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새일, 길이 없는 광야에 놓여 진 존재 같고, 극심한 갈증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곧 죽음에 이를 것 같은 메마른 사막에 놓여진 것 같은 우리 인생에 길과 강을 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배다른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다 다행히 죽음을 면하나, 형들은 애굽에 장사하러 가는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아버립니다. 채색 옷을 입고 폼 잡고 다니던 자가 하루아침에 먼 이국땅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에 갇히기까지 합니다. 이런 일이 성도님들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기막힐 일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요셉의 사건을 보자면 참으로 묘한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없었으면 했을 그 비극적 순간순간들은 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그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요셉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애굽의 핵심 요직에 이르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지 않았으면 애굽에 갈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또 애굽 왕의 경호대장 집에 노예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는 본의 아니게 권력의 최 측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성범죄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데, 하필 그 감옥이 정부요인들을 가두는 옥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왕의 최 측근의 꿈을 해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그를 통하여 요셉이 왕 앞에 이르게 되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알아본 왕의 신임을 받아 총리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눈으로 치면 억울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는 그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하나님께서 허투루 쓰지 않습니다. 없었으면 좋았을 그 일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은 지름길을 내십니다. 할렐루야! 잊지 못하게 하고 지금도 잠을 못 이루게 하는 과거의 아픔과 후회는 무엇입니까? 지금 성도님들을 짓누르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그 일들을 통하여 지금 새 일을 행하시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시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아직 그 끝이 안보이고, 아직 희망의 구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넘어 새롭게 역사하실 권세와 능력이 있으시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한수를 준비하여 놓고 계십니다. 다만 그것을 나타내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 때까지 우리에겐 믿음의 인내로 오늘 가야 할 길을 가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요셉에게 하셨듯이 우리의 후회와 아픔, 없었으면 좋았을 그 사건을 통해, 광야 같은 우리 인생에 길과 강을 내사 우리로 하나님을 뜨겁게 찬양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참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새 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오늘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전체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참 이스라엘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 곧 교회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이 땅에서 핍박과 고통과 멸시와 조롱을 당하는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잠시 우리 교회의 현실을 되 집어 보고 싶습니다. 뉴질랜드의 상황입니다. [1814년 크리스마스에 뉴질랜드 최초의 선교사인 성공회 신부 Samuel Marsden에 의해서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 뉴질랜드는 1980년대까지 최대 선교국 미국과 더불어 세계 선교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나라였습니다. 지금도 많은 뉴질랜드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며 사회 곳곳에 기독교의 정신이 스며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독교인들이 빠르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시인하는 사람들의 수가 50% 이하로 줄어들었고, 반면 나는 어떤 종교도 없다고 라고 하는 사람들이 50%를 넘어섰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습니다. 국가 행사를 할 때는 예배를 먼저 드리면서도, 국회 개회 기도를 할 때는 기도문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문구를 빼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다른 세속적인 정책을 추진합니다. 동성애를 합법화 했고, 마리화나를 합법화 하려고 합니다. 고등학교에서 성경공부시간을 없애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더 합니다.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말을 해도 신용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뉴질랜드라는 이국적 상황이기에 그나마 그 혜택을 좀 봅니다. 교회라는 모임에 가야 그나마 이 사회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달라지지 않는 한 이러한 이점도 별 것이 아니게 될 것은 자명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가 이 사회에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 시대에 교회는 세속적 가치가 밀려오는 혼란 속에서 그리고 교회다움에 늘 온전히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 속에 그만 용기와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망하여 모든 희망을 잃은 것처럼, 거대한 세속의 물결과 비아냥, 우리 자신의 지난 후회스런 모습에 포로가 되어 더 이상의 어떤 놀라운 꿈을 꾸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문제는 단순히 개 교회가 더 성장해서 이름을 얻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과연 이 시대에 희망과 소망을 줄 수 있느냐의 문제요,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속의 거대한 흐름 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드러내고,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놀라운 새 역사를 지금 교회인 우리가 감당해 나갈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럴만한 힘이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속의 문화는 너무나 강력하게 세상을 지배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바벨론의 도도한 권세와 위력 앞에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했던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이전 일과 옛적 일을 기억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내리라”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꿈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배출 되는 성도들을 통하여 마치 밀물이 들어오듯이, 이 도시를 복음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꿈에 사로잡혀, 깨어 그 것을 위해 사는 성도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뉴질랜드에 올 때는 자식 때문에 왔지만, 이곳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비전에 사로잡혀 시대를 새롭게 하는 성도로 세워, 도시 곳곳에 하나님 나라를 심는 위대한 인생으로 파송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 되고, 예수의 하나님 되심이 증거 되고, 그를 통해, 한국인뿐만 아니라, 키위들과 다른 나라의 사람들까지도 예수 앞에 이르게 되는 역사를 꿈꾸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렇게 돌아온 키위와 다른 민족의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위대한 비전에 사로잡혀 다시 내 보내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만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신 진정한 왕이시오, 주이시오, 진리이시오, 희망이라는 위대한 고백과 이 세상에 길과 강을 내시려는 위대한 비전을 품고 나아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같이 작은 교회가 이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참으로 유일한 왕이시오, 진리시오, 희망이심을 신뢰하고, 이 하나님의 비전에 사로잡혀 구할 때 하나님은 긴가민가 의심하고 콧방귀를 뀌는 우리의 메마른 가슴에 길과 강을 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도 문제가 안됩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길이 다 준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회복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지친 영혼이 쉬고 다시 힘을 얻고 다시 세상에 나가게 하는 회복이 있는 가정 같아야 합니다. 즉 사랑이 지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수 많은 죄의 마음과 입과 손과 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감히 고개를 들 수조차, 아니 용서 해달라고 말할 수도조차 없을 만큼 면목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피를 대신 흘리시며 그 생명을 주어 우리 죄를 지고 죽으셨고,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했냐? 그 때 잘 좀하지” 하고 핀잔이나 책망을 주는 것 없이 우리를 그대로 다 받으시며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용서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였고, 그 사랑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사랑으로 서로를 품어 줄 때, 이 사랑으로 형제의 필요를 채워 줄 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평안하고 새롭게 회복되는 가정 같은 사랑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일본의 가난한 목사 나가오의 집에 가난한 신학생이 신세를 지러 왔습니다. 이 신학생은 가난할 뿐 아니라 폐결핵을 앓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결핵 환자를 만나면 사람들은 입을 막고 재빨리 도망을 갔습니다. 문병을 온 친척들 중에는 방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소리 치고 돌아가 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그만큼 전염성이 강한 병입니다. 당시로는 사망률이 적지 않은 병이었기에 무서워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한 번 결핵을 앓으면 셋방이나 하숙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받아주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결핵은 모두가 싫어하는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병을 앓은 신학생 이었음에도 나가오 목사 부부는 가족의 한 사람같이 대해 주었습니다. 집에는 어린 아이들도 있었으며 또 목사 자신도 가난했음에도 그리했습니다. 거절하려면 거절 할 수도 있었으나, 이 부부는 최선을 다하여 사랑하며 정답게 대해주었습니다. 이 신학생은 나가오 목사의 가정에서 “신앙은 사랑이다”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이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임을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신학생이 “세계의 가가와”라고 일컬어지는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였습니다. 가가와 목사는 뒤에 고오베의 니이가와라는 빈민가에 뛰어들어 사랑의 전도자로서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란 남의 실패나 실수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내가 이런 사람하고 동시대를 같이 산다는 것이 슬프다”라고 여겨질 만큼 실망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그런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나를 위해 비난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는 최악의 수치와 모욕을 주고, 가장 극심한 고통을 주는 십자가 처형을 받기까지 내려 가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악으로 벌려 놓은 그 악취 나는 길을 그렇게 주님이 십자가로 뒤치다꺼리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하여 이 사랑의 길을 갈 때, 교회가 이 시대의 희망을 주는 되는 길과 강이 될 것입니다. 광야 같고 사막은 이 세대의 길과 강이 되는 것입니다. 참 사랑과 참 사람을 찾는 이 광야에서 길과 생수의 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새 일을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이 희망을 붙잡고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 성령께 순종하여 주님의 그 사랑으로 서로를 회복하는 공동체, 나아가 그 모습으로 세상에 들어가 세상의 희망이 되어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와 교회에 새 일을 하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