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7일 주일설교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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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왕”(마 21:1-11)
미국의 전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자꾸 전세가 어려워질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서 계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링컨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나는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네. 그러나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나 그것이 걱정이라네.”
교회력으로 오늘을 Palm Sunday,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앞에 십자가의 고난이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 때 종려나무 가지가 쓰였다고 해서 이 주일을 특별히 종려주일이라고 이름 붙이게 되었습니다.
종려주일에 이어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일주일의 고난 주간 끝에 부활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난주간이라고 하는 일주일이 호산나의 승리로 시작해서 부활의 승리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진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모습은 그 당시 왕의 대관식 행사입니다. 왕이 왕으로 취임할 때, 행하는 행사 중 하나입니다. 지금 눈 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여기저기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퍼레이드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하실 수 있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합니다. 먼저 승리하시고 승리를 향하여 밀고 올라간 겁니다. 이 종려주일에 있었던, 나귀를 타고 올라가시는 행사, 이것을 통해서 십자가의 의미는 설명될 수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예수님께서 아무 것도 모르고 얼떨결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체포되셨다면,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어디선가 붙들렸다면, 어땠을까요? 예수님은 미리 아셨습니다.
여러분, 나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그 심정으로 예수님은 나귀를 타십니다. 온 천하에 메시야, 구원자, 왕 중의 왕, 그 권세를 알리시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여러분, 여기서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자발적이고 자원적이고 선택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다리는 십자가를 향해서 초연하게 나귀를 타고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세요. 이 속에 여유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힘이 모자라면 목소리가 커져요. 행동이 거칠어집니다. 그런데 힘이 넉넉하고 자신감이 있으면, 여유가 생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유가 있는 사람은 온유합니다. 웃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승리자입니다. 이긴 사람입니다.
지금 저 앞에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십자가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며 카운트다운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악당의 소굴을 향해서 나귀를 타고 호산나 호산나 소리를 들으면서 올라가는 모습을 보세요. 여유만만입니다. 여기에 해학이 있습니다.
특히 이 깊은 뜻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본문 가운데는 권세는 겸손이다, 겸손하여 나귀새끼를 타고 올라간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초라한 행사 속에, 이 조용한 사건 속에 엄청난 능력이 숨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겸손이 능력이라는 진리입니다.
빌립보서 2장 7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자기를 비어서 사람이 되고 종의 형체를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비었다는 말, 헬라어로 “에케노센”이라는 말은 empty, 없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알아요. 그러나 몰라요.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할 수 없어요. 얼마든지 반항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전혀 반항할 마음이 없어요. 자기능력, 자기존재를 완전히 비워버렸어요. 이것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이었습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리하면 믿겠노라. 장님의 눈을 뜨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능력을 행하던 사람이여,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리하면 믿겠노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 같으면 당장 내려오겠어요. 박힌 못 순식간에 다 빼고 뛰어 내려서, 그 다음은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랬으면 얼마나 통쾌할까, 혼자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러나 예수님은 참았어요. 예수님이 참으신 것은 마음의 병을 일으키는 참음이 아니었어요. 비우는 참음, 여러분, 아십니까? 다 비우니까, 능력이 없어요. 남은 살리나 자기는 죽어요. 남은 고치나 자기는 못 고쳐요. 초라하고 형편없어 집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굉장한 능력, 온 인류를 살리는 생명의 힘이 숨어있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또 하나,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복종해야 할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복종했습니다. 거기에 또한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 기도하시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께 복종합니다. 내 의견, 내 생각, 내 판단 깨끗이 포기합니다. 힘이 모자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여러분, 복종을 두 가지로 생각해봅니다. 굴종이 있고, 순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쪽입니까? 소위 말하는 신세타령, 팔자타령 하면서 복종하는 굴종이 아닙니다. 기쁘고 깨끗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순종입니다. 여기에 깊은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습니까? 식사하시는 것도 잊으신 채, 가르치시고, 치료하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수고, 그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에 대한 보상을 묻지 않으십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입니까? 나 죽은 다음에 제자들은 어떻게 되고 내 한평생 수고한 것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습니까? 알 바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 맡깁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그대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 결과를 빨리 기다립니다. 내 수고와 내 희생에 대해서 너무 조급한 보상을 기다립니다. 때때로 이것 때문에 겸손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하신, 거기에 겸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겸손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겸손을 배우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이 성난 파도처럼 일렁거리고 있습니까? 상할대로 상했습니까? 속이 하도 타서 잿빛을 띠고 있습니까? 기다리다 지쳐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다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에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와서 주님의 겸손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쉼이 주님에게도 필요한 적이 있었고, 이 쉼을 주님이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쉼이 있었기에 주님은 그렇게도 당당하게 온유하게 순종하면서, 예루살렘, 생을 마감하는 장소로 나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쉼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겸손이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비방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사도 야고보도 역시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권면합니다.
겸손이 비결입니다. 겸손에 능력이 있고 초연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겸손한 왕을 깊이 묵상하십시다. 실패자의 길 같아 보이나 그 길은 승리자의 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