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림은 마라에서 멀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5:22-27/2004.10.03)
살다 보면 노래하고 싶을 때, 춤추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오고, 어깨가 들썩이면서 기쁨을 발산합니다.
그런가 하면 내 마음에서 춤과 노래를 빼앗아 가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올 때 노래하고 춤추는 일을 계속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상황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출애굽기15장1절을 보시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자, 노래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출애굽기15장은 시작하고, 그 노래는 21절까지 계속 됩니다.
그러나 이 노래와 춤은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15장24절을 보시면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뭐 한다고 그랬습니까? 원망하며, 그랬습니다. 노래는 그치고 탄식과 신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지도자를 원망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삶에 고통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구절, 22절에 보시면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며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얼마를 행하였다고요?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더라>.
자, 홍해를 건넌 후에 꼭 사흘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지 사흘만에 상황이 지금 역전되었습니다. 마라라는 장소에 도달했지만, 물을 얻지 못했어요. 여러분, 광야에서, 사막에서 물은 정말로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물을 얻지 못하고 목이 타는 갈증으로 그들은 지금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한 겁니다.
‘마라’라는 말은 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인생의 쓴 맛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마라는 찾아옵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노래를 빼앗아 가는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의 춤동작을 멈추게 하고 우리의 가슴을 치게 만드는 고통이 우리의 삶에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때,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저에서 유명한 말을 합니다. “고통이란 동일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란 있고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고, 선한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무슨 고통을 당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자세로 고통을 당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고 고통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Victor E. Frankle)이라는 분을 우리는 압니다. 그는 나치독일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많은 고통을 겪었고,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포기를 한 사람에게 고통은 저주이지만,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에게 고통은 놀라운 축복일 수 있다”.
여러분, 우리가 고통을 당했을 때 고통 그 자체보다도 더 괴로운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고통의 의미를 모르고 고통을 당하는 겁니다. 내가 왜 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를 몰라요. 훨씬 더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고통이 심해도 내가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견딜 수 있습니다. 버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극복할 수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 이것처럼 중요한 과제가 없습니다.
만약 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더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하나님은 고통의 교훈을 깨우치기 위해서 아직도 그 교훈을 깨닫지 못한 우리들에게 또 다른 마라를 준비하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나에게 찾아온 고통의 의미는 무엇일까?> 고통의 의미,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을 가슴에 품고 오늘 본문의 세계로 들어가겠습니다.
1.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다함께 따라 해보실까요?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이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즉각적으로 이런 반문을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성경에 내가 보니까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시험이라니요> 예, 옳으신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1장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그 단어는 Tempt 유혹한다 라는 단어입니다. 명사로는 Temptaion 유혹, 이런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파괴적인 의미에서의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파괴적인 의도를 가지고서 우리를 결코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의도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이것은 교육적인 의미에서의 시험입니다. 영어로는 Test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를 테스트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으로부터 받는 시험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 공부라는 것을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이런 분이 계십니까? <공부할 때, 시험날짜가 다가오면 어쩐지 나는 가슴이 설레이고 시험이 기다려진다, 내 인생에서 시험처럼 기분 좋은 일이 없다> 이렇게 느끼신 분 혹시 계십니까? 한번 손들어보세요.
안 계시네요? 아마 그런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누구도 시험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시험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학생은 시험을 치뤄야 합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객관적인 내 실력을 평가하고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거기서 나는 무엇이 부족한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완할 때 우리는 성숙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의도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본문의 시험은 그런 의미의 시험입니다.
여기서 25절의 말씀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15:25 / (읽기) / 거기 중요한 단어가 둘 나옵니다. 법도와 율례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저들을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는지 시험해 보셨다는 뜻입니다. 진정 너희가 나의 백성인지, 가나안 복지까지 갈만한 신앙적 자세가 되어 있는지, 테스트해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면, 중세기 신학의 큰 획을 그은 분,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분을 만납니다. 그분의 얘기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축복을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신앙을 가진 것이 나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아니, 대부분 우리의 신앙생활의 출발은 어쩌면 이런 동기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 차원에서 우리의 신앙이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할 지 모르지만 그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원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더니 그 하나님이 너무 좋은 거에요.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요. 조건 없이 사랑해요. 그래서 이렇게 찬양하고, 기뻐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왜 시험하셨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원하신 거에요. <아까는 홍해가 갈라져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지만, 마라에서도 그럴 수 있겠니?>
오늘도 주님은 물으십니다. “오늘도 찬양할 수 있니? 이 광야에서도 감사할 수 있니? 마라의 쓴 물 앞에서도 나를 향한 사랑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겠니?” 이것이 테스트입니다.
여러분! 그 어떤 고통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은 흔들리지 마세요. 어떤 경우에도 원망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테스트를 잘 통과해야 합니다. 흔들림 없는 사랑과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고통 너머에서 복을 준비해놓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따라해보실까요?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고통의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요,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축복이 주어집니다. 고통과 축복은 어울리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입니다. 역설적 진리입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어떻게 고통이 축복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고통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통이 없다면 기쁨을 체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기쁨으로 안내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주인공,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후에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첫째, 쓴 물이 변하여 단 물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물이 없어서 고통을 당한 후에 저들은 단 물을 맛보게 됩니다. 마라의 쓴 물 너머에 꿀 맛 같은 단 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쓴 맛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 변화된 물의 단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쓴 맛을 알고 나니까 단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이 없이는 기쁨을 알 수가 없고, 고통이 없이는 평안을 알 수가 없고, 이별의 고통이 없이는 만남의 감격을 알 수 없습니다. 쓴 맛 후에 단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고통이 남기고 간 쓴맛을 맛보아라. 고통이 지나가면 반드시 단맛이 스며든다>고 말했습니다. 고통 자체는 아픔이지만, 동시에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통하는 통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25절 말씀을 보니 쓴 물이 단 물로 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일이고, 둘은 쓴 물에 던져 넣을 한 나무입니다. 그랬습니다. 저들이 마실 수도 없는 쓴 물을 어떻게 다시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까? 모세의 부르짖는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고통 앞에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고통 앞에서 해야 할 일, 원망이 아닙니다. 기도입니다.
부르짖는 기도와 함께 또 하나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무입니다. 쓴 물에 집어 넣으면 즉시 단물로 변하는 나무, 이 나무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무 십자가, 그것은 내 인생에 들어와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 주는 기적의 나무입니다.
우린 십자가 그늘 밑에서 안식의 단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신 그 감격과 기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십자가입니다.
둘째 축복은 무엇입니까? 모든 질병을 치료해주시는 복입니다.
저들은 애굽에 내렸던 그 모든 재앙과 질병을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저들의 마음 속엔 질병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모든 질병을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라!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라!
그런데 여호화 라파, 치료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26절의 긴 말씀을 하나로 압축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청종이란 단어입니다. 내 말에 청종하면, 청종하면 치료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기만 하면 우린 건강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말씀을 듣지 않으니,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삼가 듣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청종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소리에는 민감하지 못하고, 그저 세상의 소리에만 귀가 솔깃해서 세상의 길로만 따라가면 되겠습니까? 돌아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의 질병이요, 육신의 질병입니다. 결국 온갖 질병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나서야 다시 하나님을 찾아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말씀이 가지 말라 하는 곳은 가지 마십시다. 말씀이 하지 말라 하는 일은 하지 마십시다. 대신, 말씀이 가라 하는 곳엔 목숨 걸고 가십시다. 말씀이 하라 하는 명령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순종하십시다. <청종하면 질병을 내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치료하여 주리라!> 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던 마지막 축복은 27절에 나옵니다. / 15:27 / (읽기) / 엘림에 도착한 복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하나님께 참 감사하는 일이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성지순례를 다녀올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사실, 한국적 상황에서 30대 초반에 목사 안수를 받은 직후, 그것도 부목사가 성지순례에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이 마라라는 곳에 가볼 수 있었습니다. 큰 우물이 있었습니다. 그 큰 웅덩이에 그 많은 물이 있었는데, 마실 수 없는 쓴 물이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행은 다시 광야길을 달렸습니다.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차 안에서 바라보는 광야길이란 참 지루합니다. 어떤 색깔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큰 녹색지대가 보였습니다.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가이드는 저것이 바로 종려나무 숲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노란색의 태양빛과 거의 무색에 가까운 광야지대에 펼쳐진 녹색의 종려나무 숲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또, 종려나무가 얼마나 큰지 정말 놀라웠습니다. 시원한 그늘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차를 세우고 잠시 목을 축였던 기억이 납니다.
마라에서 겨우 목을 축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엘림이란 말은 종려나무라는 뜻입니다. 엘림에 와 보니, 거기에는 물 샘이 열둘이나 있었습니다. 오아시스입니다. 종려나무도 칠십 그루나 있었습니다. 성경은 저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쳤다고 말씀합니다.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넌 지 꼬박 사흘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요, 마라에서 엘림까지 거리가 얼마인 줄 아십니까? 불과 10km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물이 풍성한 오아시스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저들이 마라에서 끝까지 원망하고 포기했다면, 저들은 엘림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금 만 더 걸어오면 이토록 아름답고 풍성한 오아시스가 있는데, 거기 마라에서 주저앉았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여러분! 엘림은 마라에서 멀지 않습니다. 지금 이 곳이 아무리 힘든 곳이라 하더라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하나님 예비해 두신 오아시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엘림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엘림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은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림의 비전을 품지 못한 사람은 끝내 여기 마라에서 주저앉고 말 것입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보이지 않아도 엘림은 존재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오아시스는 존재합니다. 바로 저 앞에 있습니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엘림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라는 분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은 왜 때때로 지체하시는가? 우리가 고난 당할 때 하나님 왜 침묵하시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체하실 때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준비하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원망이 아니라 기도할 때, 주님의 십자가 그늘 아래 있을 때, 인생의 쓴물은 단물로 바뀝니다. 주님의 말씀에 내 모든 것을 내어맡길 때, 마음과 육신의 질병이 치유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엘림에 다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엘림은 마라에서 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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