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20일 주일설교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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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_x000D_
(요 8:26-30)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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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의 질과 행복지수는 자기가 오르려고 하는 삶의 정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한평생 오르기를 원했던 삶의 정상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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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과 함께하심에 대해 무한한 긍지를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자신과 함께하시는 까닭을 예수님은, 자신이 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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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29절의 말씀입니다. _x000D_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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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 올라야 할 삶의 정상이 어디이어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 정상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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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대체 어떤 일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친히 밝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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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란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바로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잘 아셨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사랑하셨고, 사람을 사랑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셨습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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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26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_x000D_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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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뒤돌아서면 온갖 죄를 다 저지르는 한심한 인간에 대해, 왜 주님의 판단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한심한 인간들을 사랑하시기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 임의로 판단치 않으셨습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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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당신의 판단을 접으시고, 주님 역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초청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_x000D_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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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문 28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_x000D_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른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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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인자가 들린다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어 달리심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에야 주님의 사랑을, 사랑의 주님을 사람들이 비로소 바로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었음도 그제야 깨닫게 되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의 전 생애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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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는 것이 당초 당신의 뜻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시려 당신의 뜻을 꺾고 십자가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셨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군병들을 원망치도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 사랑을 위함이었습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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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이 이런 말씀으로 끝나고 있는 이유입니다. _x000D_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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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주님께서는 지금 오병이어와 같은 표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표적을 보고서도 주님을 믿지 못하던 유대인들, 표적을 보면 더 큰 표적을 구하던 유대인들이 이번에는 주님의 말씀만을 듣고도 주님을 믿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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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대언하시는 주님의 눈동자, 주님의 미소, 주님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사랑의 파장이 그들의 영과 마음을 감전시킨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감전 속에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인격을, 신성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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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바로 믿고 섬긴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하는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입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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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외면하고서는 크리스천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얼마든지 꾸짖을 수도 있고 책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까닭도 목적도 오직 하나, 즉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또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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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려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현실적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당사자의 얼굴만 보면 사랑의 마음이 아예 싹 가시고 맙니다. 홀로 기도할 땐 될 것 같은데, 당사자와 대면하는 순간 오히려 미움이 더 커집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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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판단과 정죄와 포기로 상대방에 대한 마음의 정리를 끝내서, 사랑하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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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만으로 사랑하려 하는 한, 인간을 진정 사랑할 수도 없고, 그 결과 자기 절망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는 것입니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단지 인간이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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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사랑과 무관한 인간이 애쓰는 것만으로는 그 속에 사랑이 생성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은 인간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본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사랑이 주어질 때에만 인간에겐 사랑이 가능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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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 그것은 절대로 평범하거나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면 세상은 대개가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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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인생을 걸고 도전하는 비장한 각오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비장한 각오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가를 지불하기 싫어서 대개가 쉬운 쪽을 골라잡습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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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삶의 질은 떨어지고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인지 세상의 자녀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이라면, 일은 평범해 보일지라도 그 일은 절대로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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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 기쁘게 하실까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인생 최대 최고의 목적으로 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함께합니다.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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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2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_x000D_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_x000D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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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그분은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십니다. 늘 함께하십니다. 이 말씀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저에게 늘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