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2(주) 주일예배 본문 시편 119:71-72 제목 흑암을 지나며 깊어지는 믿음 목적 흑암의 터널을 지나는 시련을 통하여 더욱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나가시는 하나님을 보고 신뢰하고 의지도록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두 내외가 의사였습니다. 외국에 나가 병원선교 사역을 하였습니다. 신앙이 특별했던지라 두 내외는 한국에 들어와 신학공부까지 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겨우 16세 된 사랑하는 딸이 원인도 모른 채 죽습니다. 얼마 후 남편의 어머니도 훌쩍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부부가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절박하게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은 정작 그들 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깊은 흑암 속에서 처했을 때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깊은 절망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접고 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아내도 남편을 따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20세기 복음주의 거장이자, 최고의 기독교 신앙 변론가인 C.S 루이스는 느즈막에 암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조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곧 죽을 것으로 알았던 아내가 놀랍게 회복되면서 꿈같은 신혼의 길을 걸으며 아내를 깊이 사랑 했습니다. 그러나 3년 뒤, 암이 재발하고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의 곁을 떠납니다. 그는 아내를 정말 사랑했기에 그 상실의 고통은 정말 깊었습니다. 그때 루이스는 슬픔을 이기기 위해 일기를 씁니다. 그 일기기가 ‘헤아려본 슬픔’이라는 책입니다. 그 일기에서 그는 아픔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지금 그녀는 가버렸습니다. ... 하루하루가 얼마나 지루하고 맥 빠지고 무의미한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든 것이 죽은 것만 같고 희색 빛인 것만 같아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좋아진 게 무엇입니까?...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단 말입니까? 제가 행복해하고 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별로 필요하지 않을 때 그분의 현존은 언제나 저의 주위에 자욱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의 도움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때 저의 고통과 슬픔이 너무 커서 그분을 향해 소리 지르고 있을 때 저는 단지 그분이 저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 버리고 아내 잠그어 버리고 또 잠그어 버리는 소리만 들릴뿐입니다.“ 20세기 기독교 신앙의 최고 변증가 였던 C.S.루이스마저 이렇게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신비롭게도 하나님은 당신을 가장 잘 섬기는 사람들을 버리신다” 그러니 평범하기 그지없는 우리는 얼마나 더 쉽게, 더 자주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지 모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언약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러나 현실의 고통 속에 있을 때 이런 말씀이 아무런 힘이 되지 않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언약하신 말씀과 달리 우리를 고통 속에 던져 넣고는 모른 체 하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얼굴을 숨길까요? 이에 대해 고려신학대학 박영돈 교수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죄의 문제입니다. 신자가 계속 되는 죄 속에서 살면 성령이 근심하며 성령의 은헤가 소멸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심령은 사막과 같이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시고 버리신 것 같은 영적비애와 황폐함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즈워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신자가 죄를 확실히 도살 할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며 성령의 위로와 소망을 불러일으켜 주시지 않는다. 만약 죄가 처리 되지 않은 채 성령의 달콤한 위로와 평강의 은혜가 회복 되면 그 은혜는 오히려 죄 짓는 삶에 더욱 담력과 위로를 안겨주는 요인으로 역기능 할 수 있기 때문이다.”(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p176) 죄의 문제를 해결 하지 않는 성도로 하여금 죄를 떨쳐 내기까지 하나님은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죄의 길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있음에도 버리지 않을 때 하나님은 징계를 사용합니다. 고난 속에 던져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얼굴을 숨기십니다. 영혼과 삶에 공허와 황폐로 가득 차 어떤 찬송도, 어떤 고백도 진실함을 담지 못하게 놔두십니다. 비참한 영혼이 됩니다. 사랑한다 하면서 극심한 징계라는 고난에 던져 넣고 얼굴을 숨기시는 것일까요? 자녀를 혼낼 때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녀를 혼낼 때 장난 하듯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예쁘고 사랑스럽다 할지라도 혼내는 순간만큼은 엄하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의 징계를 장난으로 알 것이고, 자녀는 더욱 망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죄가 있을 때 징계 시에 매우 혹독하게 매우 엄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그 얼굴을 잠시 가리는 것입니다. 책망을 뼈아프게 느끼고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였을 때 성령이 그를 떠났고, 이내 황폐한 영혼이 되었습니다. 언약궤를 다윗 성에 들일 때 춤을 추며 영광을 돌렸던 그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대신 깊은 죄책감과 영적 황폐함이 그를 장악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했던 마음은 갈가리 찢어지고, 영혼의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떠난 그 고통을 철저하게 경험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고통 속에서 다윗은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시 50편에서 처절하게 구합니다. 죄는 징계 이전 그 자체로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게 하고 우리 영혼을 죽입니다. 노리지의 줄리안은 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죄는 택함 받을 수 있는 영혼이 맞을 수 있는 가장 호된 매다 이 매는 남녀 영혼을 마구 후려치고 난타하여 파멸로 몰아간다.” 그렇기에 죄가 있을 때 그 마음은 기쁨과 평안대신 공허와 황폐를 경험합니다. 게다가 반복 되는 죄에서 떠나지 않을 때 하나님은 회초리를 엄하게 듭니다. 철저히 자신을 돌이켜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사 건져 내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결한 기쁨을 잃고 영혼의 황폐함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다면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새롭게 덧입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1 1:7)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는 두 번째 원인은 진정한 믿음을 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신혼의 달콤함은 너무나 고소합니다. 마찬 가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가 나를, 이 세상을 구원하기 오신 구원의 주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기꺼이 예수를 나의 주로 영접합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신혼살림이 시작 됩니다. 그래서 매일, 아니 한 순간이라도 더 예수를 생각하려 애를 씁니다. 그것이 너무나 달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입에서는 찬양이 흘러나오고, 기도할 때 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 절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때가 지나면 어느 순간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 같이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정말 필요 할 때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기쁘게 증거했던 예수님을 더 이상 전 할 수 없게 됩니다. 나의 죄와 상관 없는 다양한 고통들이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1)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에 빠지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예외가 없습니다. 배가 물에 가라앉으면 비그리스도인은 배와 함께 가라앉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보호하사 물에 둥둥 뜨게 하지 않습니다. 지진이 나면 교회당만 멀쩡하게 서 있는 특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 같이 무너집니다. 2) 또 우리 몸의 장애와 한계에서 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피곤해 하고, 나태해지고, 다치고, 병들고 죽습니다. 죽음의 질병이 우리 몸을 괴롭힐 때 그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주변 사람 또한 얼마나 고통을 겪는지 모릅니다. 기도해도 속 시원하게 고쳐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3) 또 사회적 고통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죄인이지만, 우리는 다른 죄인들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부모와 친구, 배우자와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줍니다. 나아가 사회의 부조리로 인한 고통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여 자신의 죄와 상관없이 고통을 겪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비극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외 없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고통 속에서 신혼의 달콤함 같이 주님과의 달콤함에 빠져 있던 영혼은 혼란이 일어납니다. “기도했는데 왜 구원하여 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계니까?”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의심하고 회의를 품습니다. 고난이 믿음의 뿌리조차 뽑아 버리려 하는데도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의 조롱과 비아냥이 들여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고난을 우리에게 허용하시고 안 계신 것 같이 자신을 숨기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답을 주십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이 고백의 주인공은 고난이 유익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비로소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진리임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유일한 길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뜻대로 사는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유익, 달콤한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요, 마땅히 신뢰하고 따라야 할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나의 상황, 나의 여건, 사회의 풍조, 세상의 대세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섬김과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임한 고난이 유익하다, 곧 선하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먹다가 때가 되면 이유식을 주듯이 그렇게 하나님은 은혜의 달콤함에 빠져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위해 영혼의 젖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 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달콤함에 마음을 빼앗겨 믿음의 자라지 못하는 폐해로부터 건져 내기 위함입니다. 박영돈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황량한 사막으로 내모셔서 감정적으로 매우 메마른 시기를 거치게 합니다. 그 광야에서 하나님은 육적이고, 세속적인 불순물이 혼합 된 우리 신앙의 열정과 감성을 정제하고 순화하신다.”(박영돈, 성령충만, 실패한 자들의 은혜, P179) 광야에 처할 때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 확연이 들어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지, 정말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에 자신을 드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광야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은 순도 높은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를 세웁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고난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련은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 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매력을 한 층 높여준다. 참된 덕은 악조건 속에서 가장 아름답다. 진정한 기독교의 거룩함과 탁월함은 최고의 시련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위의 책, 328) 믿음의 선배들은 이와 같이 고난을 없었어야 할 짐이 아니라, 짊어지고 그 속에서 정결하고 강건한 믿음을 길어 올리는 은혜의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도리어 하나님을 향한, 이웃을 향한 더욱 온전한 믿음을 길어 올린 것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세상을 멸시하는 마음이 영혼 안에 이전보다 커진다. 이 고통 중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세상에는 전혀 없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제 영혼은 피조물들에 훨씬 더 초연하게 된다. 오직 창조주만이 자신에 위로와 만족을 주실 수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테레사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오직 창조주만이 나를 위로하고 만족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깨닫기에 이르게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정금 같은 신앙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아내를 잃은 극심한 슬픔과 고통 속에 처하였던 C.S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슬픔 속에서 하나님을 목놓아 부르고 있는 지금 제가 진정으로 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당신이 맞는 것입니까? 혹시 제 마음 속에서 조이를 다시 되 살리기 위한 수단으로 당신을 이용하고자 구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과 당신의 나라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며 단지 조이와 재회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서는 저의 카드로 만든 집을 무너뜨리셔야만 했는지요? 아마도 그분은 제가 담아 두었던 그녀의 마지막 이미지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우상의 형태로 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것을 파괴하셔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결국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우상 파괴자이십니다.“(c.s.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것 p241-2) 루이스는 자신에게 임한 고통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다만 어렴풋이 그러한 고통을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왔고 간직했던 기쁨, 특별히 아내를 통해 얻은 기쁨을 앗아감이 하나님을 수단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원이요 목적으로써만 구하고 바라게 하시려는 것으로 이해해 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결국 고통을 통해 자신이 처한 상황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면서 새로운 시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위의 책 p243)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새로운 눈, 즉 정금 같은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으로 세워나가십니다. 구약의 족장 욥은 한 날에 모든 재산과 모든 아들을 다 잃었습니다.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을 시련하사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고통의 한 복 판에 있을 때 욥은 괴로워했고, 그 고통을 용납 할 수 없어서 자신의 인생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고통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이해를 넘어 계시는 하나님을 뵙고 자신의 무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곤 자신의 교만을 회개합니다. 고난에는 나의 이해를 넘어선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그럴 때 고난 속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고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은총이 임합니다. 고난 속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뜻이 있는 것입니다. 대사도였던 바울도 고난의 유익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을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8-9) 하나님은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고난 중에 있습니까?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시는 줄로 믿고 감사하며 인내하십시오. 그 때 주께서 우리에게 이 고백을 우리 입에 넣어 주실 것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할렐루야! |